파리에서 하는 생각들

파리, 리옹

by 최열음

파리에서 무얼 쓰고 싶은가, 무언가를 쓰고 싶긴 한가… 쓰고 싶은 말이 없는 날은 어쩌지.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이 그냥 흘러가고만 싶은데. 내가 파리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믿을 수 있나. 내가 보는 게 루브르 박물관이고 모나리자라는 게. 위대한 작품은 어째서 이토록 코딱지만 한가. 그 코딱지만 한 게 어떻게 위대한 작품이 되었나. 내가 쓰고 있는 이 코딱지들은 어떨까. 튕겨버려야 하나, 돌돌 굴려서 잘 보관해야 하나.


가끔은 지독하게 혼자가 되고 싶다. 혼자 집에서 맨몸으로 먹는 퀸아망이 정말 짜릿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사광선을 쏘아대는 파리의 낮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 그늘 있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비로소 걸을 만하다, 걸을 만하니까 구경도 할 만하다. 유럽의 여름은 얼마나 더운 걸까. 파리 골목엔 아무것도 없는 상가에 책상만 딱 놓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저 책상과 의자와 맥북과 사람뿐이다. 길바닥에서 그냥 들여다보이는 곳에 작업실이 있다니, 조금 멋지다.

한국에 돌아가면 공유 오피스를 한번 써볼까. 아니다, 아빠 사무실 옆자리에 아주 큰 책상이 비어있구나. 아빠 바로 옆에서 나만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가끔은 옆방에서 일하는 고모부랑 사촌오빠랑 점심도 먹어야겠지. 생각해 보니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아빠 사무실에서 써봐도 좋을 것 같다. 적적해서 항상 드라마를 틀어둔다고 했던 아빠였으니까. 물론 헤드셋 끼고 타이핑하는 내가 어떤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불꽃 타자 소리로 백색소음은 내줄 수 있을 것이다.


나 없이 세 달 동안 두 남자는 어떤 밥을 지어먹고 사 먹고 받아먹고살았을까. 돌아가서 어떤 밥을 해먹을지 생각하다가 벌써 귀찮아져 버렸다.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은 걸 보니 한국이 그립긴 한가보다. 타지에서의 3개월은 녹록지 않구나. 이민자들은 더 외롭고 척박하고 입맛 떨어지는 삶을 살겠구나. 더는 밀가루로 만든 음식에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돌아가면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 있을까. 아니면 당장 여행을 일상처럼 할 수 있기라도 할까. 둘 중 하나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여기서 배우고 갈고닦은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 동거의 어려움도, 기쁨도, 슬픔도. 내가 아닌 누군가와 모든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가끔은 나 자신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서 견뎌낼 때도 있다. 아무래도 진짜 관계는 피곤하고 어려운 중에도 서로로 인해 웃어버릴 수 있을 때 시작되는 것 같다. 얼굴이 웃겨도 좋고 말이 웃겨도 좋다. 같이 보던 드라마나 유튜브가 웃기면 가성비도 좋다.


그러니 누군가와 여행을 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사항은, 그와 웃음을 공유할 수 있는지의 여부인 것 같다. 무엇이든 함께 보면서 또는 겪으면서 배가 아프게 웃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행해도 좋다. 결국 여행은 무얼 보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보고 얼마나 감격하는지가 관건이니까. 모든 건 마음의 문제고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그 뻔하고 상투적인 말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단축해 주는지 모른다. 파리에서는 이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여행했다.

포르투에서 회복한 휴양의 에너지들을, 파리에서 모두 쏟아내고 왔다. 이제 리옹에서 채우는 것들로 마지막 스위스를 여행하러 갈 것이다. 내가 스위스를 간다니… 내가 스위스를 보다니… 이런 생각이 드는 여행지일수록 조금은 부담이 된달까. 너무 오랫동안 생각만 해와서 현실로 다가오는 게 꺼려진달까.


파리에서는 더 이상 유럽스러운 건물이나 성당들을 보면서 놀라지도 않고 감동받지도 않았다. 진짜 봐야 할 거리와 사람들과 말들이 보이고 들렸다. 어쩌면 가장 기대했던 여행지들이 후반부에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초반의 긴장감과 힘을 빼고 여행자답게 여행할 수 있었을지도. 여행은 힘을 뺄수록 여행다워진다. 포르투, 런던, 파리, 스위스. 그 비싸고 좋은 곳들이 앞으로도 자주 그리워질 것이다. 나는 이제 익숙하고 맛있는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까.


돌아가면 먹고 싶은 것들은 닭볶음탕, 김치찜, 엽떡, 닭갈비, 마라탕, 청국장, 두부조림, 미역국, 냉면, 갈비, 삼겹살… 도장 깨듯 그 음식들을 하나씩 먹으면서 이곳의 빵과 거리와 소리들을 그리워할 게 뻔하다. 오늘 아침 읽은 글에서, 현재에 완전히 집중하는 게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과거를 아쉬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그 낭비에 있어서는 내가 전문가이기 때문에 금방 납득이 됐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리옹을 충분히 즐기고, 마지막 여정인 스위스를 기쁘게 여행하는 것이다. 끝이라는 건 언제나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 아쉬움으로 인해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내게 예비된 다음 일들로 인해 기뻐할 마음을 남겨두기로 하자. 그게 무슨 일이든,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보다는 너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