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꿈처럼 느껴질 때

스위스

by 최열음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울지도 모를 곳에 다녀왔다. 스위스 인터라켄, 루체른, 그리고 취리히.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가졌다는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많이 감격하고 또 믿지 못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걸 처음 접할 때 자꾸 의심하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이게 맞나, 진짜 존재하는 게 맞나, 이럴 수가 있나. 그러나 의심이 아깝지 않을 만큼 스위스는 아름다운 세계였다.


나는 꽤 많이 지쳐 있었다. 3개월 여행의 끝자락에 다다랐기 때문일까.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기대했던 나라였음에도, 그냥 스킵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됐다. 긴 여행이란 건 피로와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숙소라도 제 집에 있을 때만 채워지는 에너지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내 집 같아진 숙소들이 있었지만,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 편은 진짜 집을 그리워했다. 가지지 못한 쪽을 그리워하는 기만 때문이다.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번 여행에서 느꼈다. 내가 걷고 있는 거리, 먹고 있는 음식, 함께 있는 사람들에 집중하는 건 딴생각보다 더한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곧 한국에 돌아가서 만날 남자친구의 얼굴이 보인다거나, 감격스러운 재회 장면을 상상한다거나 하는 생각이 자꾸 끼어들었다. 나와 함께한 현아는 현재에 충실한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걔가 아무리 낯설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뿌리를 내리며 사는지도 모른다. 내가 뿌리를 내릴지 말지 고민하며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동안, 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누워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모든 여행의 극치를 맛봤달까. 가난한 여행, 바쁜 여행, 아름다운 여행, 마지막 여행. 모든 방면에서 최고점을 찍은 것 같다. 우선은 가난한 여행. 스위스는 더럽게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다. 가장 유명한 융프라우 요흐 산을 올라가려면 왕복 30만 원에 달하는 교통비를 내야 하고, 적당한 외식을 한번 하려면 인당 5만 원이 기본이다. 지상에서 운행하는 교통편은 또 따로 구매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아낄 수 있는 건 오직 식비였다. 마지막 여행이니만큼 남은 돈이 눈에 보였다. 보이는 돈을 나눠서 쓰는 건 그래도 좀 쉽다. 스위스에 4일 머무는 동안 먹을 컵라면을 7개 정도 사기로 했다.


다행히 숙소에서 조식도 주고, 마트 물가는 꽤 저렴했으며, 맥도날드에서 세트 말고 단품만 먹으면 인당 만원에 식비를 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스위스 마트에는 신라면이 많았다. 지금까지 중 한국인이 가장 많은 여행지였던 것 같다. 이 낯선 땅의 낯선 마트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신라면을 보니까 왠지 쾌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호텔 근처를 지나다 보면 라면 냄새가 났다. 많은 한국인들이 매콤하고 짭짤한 맛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기고 귀여웠다.


또 바쁜 여행. 교통권을 미리 구매했기 때문에 뽕을 뽑아야만 했다. 첫날은 인터라켄 기준 서쪽으로 유람선을 타고 이동했고, 둘째 날은 동쪽과 위쪽 전망대를 올랐다. 셋째 날에는 융프라우 요흐와 피르스트 산을 올랐으며, 루체른으로 이동했고, 마지막 날에는 루체른 시내를 돌아본 뒤에 취리히로 이동했다. 취리히의 프라이탁 본점과 시내를 돌아본 후 짐을 싸고 다음날 새벽같이 공항으로 왔다.


아직 끝이 아니다. 공항에서 1시간 반 정도 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간 뒤에 저녁나절까지 암스테르담 시내를 돌아본 후 진짜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 모든 일정이 5일 사이에 이루어지다니. 새벽 한두 시에 자던 내가, 열 시에 곯아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빠야만 여행이 잘 굴러가고 있다고 믿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너무 바쁜 여행은 해로울 수도 있다. 적당히 쉴 줄도 알아야 여행이 계속 이어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스위스는 비싸니까 가능하면 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 좋겠다.

아름다운 여행, 사실 스위스에 오기 전까지 아름다운 자연과 건축물은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다 까먹어버렸다. 이전 것들을 다 까먹고도 남는 곳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떤 감흥을 느끼며 살까. 분명 자연에는 질렸을 텐데 저들이 반응하는 것은 무엇일지. 유럽에서 딱 한 나라를 여행한다면 스위스를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사실 하나를 고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나도 내 남자친구를 데려오고 싶어졌다. 이런 건 정말 혼자 보고 느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빠와 함께하고 싶다고 순수하게 느끼는 게 참 많아지고 있다. 우리가 해보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아름다운 걸 함께 보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건 매우 감사한 일이다. 물론 남자친구 말고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언젠가 그 애들과도 아주 먼 곳을 여행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지막지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사실 도움을 잘 받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번 여행이 의미가 크다. 이렇게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아주 많은 도움을 주고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소화한다고 해도 변수라는 건 참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생겨난다. 갑자기 잘 되던 어댑터가 고장난다든지, 가방에 짐이 다 안 들어간다든지, 먹던 걸 쏟아버린다든지. 우리에겐 어이없고 웃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럴 때면 서로의 도움을 주저 없이 구하고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도움받는 게 조금은 미안하고 많이 어색했던 나의 자아를 자꾸 확장시키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마지막 여행이 오다니.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캘린더에도 미리 적어두었다. 출국날에 <안 믿겨…>라고. 그리고 입국날에 <안녕 승희야 애플뮤직 해약해 종강하고 싶다 여행은 잘하고 있니 글은 잘 쓰고 있니 웃고 있니>라고도.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하고픈 말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종강을 바라던 나는 이제 여행을 마치고 유럽을 뜬다. 한국행 비행기에서 이 글을 쓴다. 시간이란 건 이렇게 유동적인 거구나,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더니 이제는 걷잡을 수가 없구나.


과거의 나에게 대답해 보자면, 애플뮤직은 음원 다운로드 기능이 없어서 이미 해약한 지 오래이다. 종강은 더 오래전 일이 되었고, 여행은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잘한 것 같다. 느낀 것과 버린 것과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글은 많이 쓰다가, 적게 쓰다가, 잘 쓰다가 별로일 때도 있다. 그래도 기회가 열리는 게 조금은 느껴진다. 원하는 강연에 참석하게 되고, 내 글이 어딘가에 실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웃고 있느냐. 그건 진짜 미안하게도 아주 간헐적으로 일어난다. 오늘 생각했던 건 조금 더 조정석스럽게 살고 싶다는 것.


조정석스러운 게 대체 무어냐 하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 또는 <건축학개론>의 납득이처럼 자기 할 일을 똑바로(?)하면서 여유도 부릴 줄 아는, 농담과 해학이 일상이고 에너지인 사람. 인생의 사람과 사랑과 시간을 주무를 줄 아는 사람. 내가 원하는 인간상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잘 웃거나, 아님 잘 웃기거나. 아무래도 전자는 어려운 것 같아서 후자가 나을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기본적으로 웃긴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진지해졌을까.


아마도 내가 심각함이라는 걸 깨닫거나 절망이라는 걸 하면서, 인생을 낙관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낙관적인 태도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버려서. 사실 문제를 대하는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할 때도 있다. 스트레스 관리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더 조정석스러워지자는 것. 절망 중에도 웃어넘길 줄 알고, 그럼에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알며, 쉽게 작아지지 않고 남을 작아지지 않게도 하는 것. 아마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인천까지 약 10시간 남았다. 한국행 비행기라 그런지 기내식으로 찜닭을 줘서 황송한 마음으로 먹었다. 비행기 안에서 하는 식사엔 살짝 체기가 있다. 잘 체하고 불편해지는 위장을 가진 자는 어딜 가나 쉽게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럭키하게도 세 개의 좌석이 붙어있는 곳을 나 혼자 쓰고 있다. 유럽으로 오는 비행기에서는 꽉꽉 차있는 탓에 고단했는데, 어쩐지 슬프게도 한국행은 자리가 좀 남는다. 세 자리를 혼자 쓰는 영광을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주변이 유럽인들이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괜히 다른 한국인들이 의식되기도 하는 마음이다.


벌써부터 남을 먼저 의식하는 한국인의 습성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어쩌면 한 번도 버리지 못했던 걸지도. 유럽에서는 많은 걸 신경 쓰지 않고 다녔는데 그게 금방 그리워질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상관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쓰면서 나의 집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빌린 집 말고 진짜 집, 집이 있는 곳으로.



2023.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