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_01
나는 술을 좋아한다. 주종은 칵테일.
맥주는 배부른 느낌 때문에 반 잔도 못 마시고, 어린이 입맛이라 소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와인은 선호하지만, 숙취가 심해 작정하고 마시는 날 아니면 피한다. 칵테일은 3잔을 마시면 딱 기분 좋게 취하면서 숙취가 없는 유일한 술이다.
칵테일의 첫 경험은 교환학생 때였다. 시카고 여행 중 친구의 미국 친구가 이 아이스티를 시키는 걸 봤다며‘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철석같이 그냥 아이스티인 줄 알고 말이다. 하지만 롱티는 럼, 데킬라, 보드카, 진이 들어가는 엄청난 도수를 자랑하는 칵테일이다. 우리 둘은 공복이었고 대낮에 거나하게 취해 유리 벽에 기대어 해롱거리며 깔깔 웃었다.
정말 본격적으로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직장을 다니면서부터였다. 친구가 광화문 근처 호텔의 컨시어지로 일했는데 그 친구 덕분에 내자동의 코블러를 알게 되었다. 메뉴판이 없는 가게. 취향이나 그날의 기분을 말하면 칵테일을 추천해주는 흥미로운 곳이었다.
워낙 잘 되는 곳이기도 했고 영화 <소공녀>에서 이솜이 위스키를 마시러 가는 장소로 더 유명해지면서 자리를 잡기 힘들었다. 웨이팅이 귀찮고 힘든 늙은이는 집에서 좀 더 가까운 칵테일바가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견한 로빈스 스퀘어(줄여서 RS).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홍대 클럽 거리에 비밀스럽게 위치한 곳이었다.
이후 RS는 꽤 오랫동안 나와 내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합정에서 밥을 먹고 RS로 이동해서 칵테일을 마시는 것은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여러 친구와 함께 방문했고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 방문은 작년 추석이었고, 마지막 잔으로 RS에서 추석 시그니처로 만든 a good day를 마셨다. 그 후 논문 때문에 정신없는 2020년 연말을 보내고, 뒤늦게야 RS가 건물 리모델링으로 문을 닫고 연희동으로 이사하며 ‘코블러 연희’로 상호를 바꾸었다는 걸 알게 됐다.
논문을 정리하고 방문한 코블러 연희는 정말 근사했고 바텐더분들도 그대로 이동하셨기에 반갑게 인사를 하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래도 3년 넘게 추억을 쌓았던 곳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쉽다. 하지만 장소는 사라졌을지언정 칵테일로 그곳을 기억할 것이다.
이게 칵테일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다른 칵테일 바를 가도 아니, 세계 어느 곳의 바를 가도 김렛을, 올드패션드를, 프렌치 75를 만날 수 있으니깐. 메뉴판에서 반가운 칵테일의 이름을 발견하면 그날의 기억이 소환하고 한참을 떠들 수 있으니깐. 아, 쓰다 보니 칵테일이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