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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드 Aug 02. 2022

선림원지, 구룡령 넘다 만난 절터

강원도 양양, 미천골 선림원지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훅’하는 더운 열기가 차 안으로 몰려들어와 깜짝 놀랐답니다.

바닷가를 달리는 데도 이렇게 후덥지근하다니! 6월이라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양양 바닷가에서 잠시 차를 멈췄습니다. 오늘 바다를 보는 건 여기가 마지막이 될 것 같네요. 저희 가족은 이제부터 구룡령을 넘어갈 것입니다.


낙산해수욕장의 연인. 참 보기 좋죠?

낙산해수욕장은 여름을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더위를 못 참은 사람들은 이른 해수욕을 즐기고 있네요. 그리고 그들 위로 멀리 낙산사 모습이 얼핏 보입니다.


바닷가를 빠져나와 한계령과 구룡령 길이 시작되는 길에 섰습니다. 그리고, 44번 국도와 56번 국도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56번 국도를 타고 구룡령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도로번호가 익숙지 않지만,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엔 '전국 도로지도'를 보고, 도로 번호를 찾아다녔습니다. 그 당시 '전화번호부'와 더불어 도로지도는 베스트셀러였지요.


구룡령은 예전에 딱 한번 함께 넘어본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그 당시,  한계령으로 넘어가는 차들이 하도 많아서, 시외버스는 구룡령 쪽으로 방향을 잡았었죠. 시외버스는 그렇게 "꼭" 정해진 길만을 고집하지 않았었습니다.


막히지 않는 길로 찾아다니는 건 운전사 재량이었죠. 지금까지 제 기억에 남아있는 이쪽 고갯길은 굉장히 험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이제는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달리는 내내 아름다운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이라 한적했고, 험난한 고갯길에 들어서기 전까진 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죠.


창문을 다시 열어봅니다. 바닷가에서 맞았던 후끈한 바람은, 여기선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네요.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저수지 구경도 하고, 매미 소리, 개구리 소리도 들으며 드라이브를 즐겨봅니다.


그러던 중 미천골 자연휴양림과 선림원지 이정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전 누군가가 쓴 책에서 읽었던 선림원지.


오지 중에 오지에 위치해 있다던 그곳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참 반가웠습니다. 구룡령 넘기를 잠깐 중단하고 휴양림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선림원지 이정표는 2km를 알리고 있었는데, 절반 정도 들어가니 휴양림 매표소가 먼저 나타났습니다.


매표소 관리원에게 선림원지에 간다고 하니, 차를 두고 들어가면 입장료는 없다고 했습니다. 입장료가 문제가 아니라, 굳이 이런 곳을 차 가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죠?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미천골의 아름다운 계곡을 바라보며,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태백산맥 동편의 오지인 미천골에 휴양림이 들어선 것은 1993년이라고 합니다. 지금 제가 찾아가는 선림원지는 거의 휴양림 입구쯤에 있는 것이고, 그 안으로 더 들어가면 야영장과 오토캠프장 그리고 숙박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답니다


미천골

미천골 이름은, 선림원에서 한 끼 밥을 짓기 위해 씻었던 쌀 뜬 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이르렀다는데서 유래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가 있어 한쪽으로 몸을 피해야 하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꽤 괜찮은 길인데, 오지였던 예전에 이곳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걸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공짜나 다름없네요.


입구에서부터 800미터 정도 걸으니, 마침내 담장길이 나타나고 언뜻언뜻 석조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절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죠.


그곳에는 선림원지를 알리는 이정표와 안내판, 그리고 딱 차 한 대 정도 세워둘 공간만이 있어 꽤 초라해 보였답니다. 그동안 다녀본 폐사지가 다들 이랬죠.


선림원은 804년경에 창건되어 홍각선사가 번창시킨 사찰로 당대 최고 수준의 선 수련원으로 알려지며, 당시 대규모의 절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10세기 전후에 일어난 대홍수와 산사태로 매몰되었다고 합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444)


계단을 올라 제일 먼저 삼층석탑을 보고, 절터 전체를 둘러보았습니다. 삼층석탑 왼편 뒤쪽으로 부도가 있고, 멀리 왼쪽으로 석등과 홍각 선사 탑비 귀부 및 이수가 보이네요.


선림원지 부도(보물 447)

얘기로만 듣고 상상하던 절의 규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니 좀 작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여 명이 넘는 스님들이 수양을 하던 곳이라던데, 좀 비좁은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누군가 폐사지 여행은 추운 겨울이 제격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네요. 적막함과 어울리는 계절은 아무래도 여름보다는 겨울일 테니까요.


​홍각 선사 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446)
선림원지 석등(보물 445)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폐사지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는데, 아침에 내린 비 때문인지 젖어있던 풀잎에서 조차, 아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적막하네요.


그리고 또 많이 덥습니다. 그늘 하나 없어, 그대로 온몸이 햇빛에 노출돼버린 저는, 폐사지를 빠져나오자마자 서둘러 나무 그늘을 찾았습니다. 그리곤,  올라왔던 계곡 길에 다시 접어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금방 시원해졌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미천골 입구를 빠져나와 구룡령 방향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곧, 본격적인 고갯길이 시작되었지요.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시선을 먼 산에 고정하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자동차 핸들을  굳게 움켜쥐어 봅니다.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진고개, 대관령 중에 어디 하나 험하지 않은 곳 있겠냐마는 처음으로 제 차 타고 넘어가는 고갯길이라 그런지, 지금 이 길이 더욱 험하게 느껴졌습니다.


구룡령. 예전에는 그래도 차들도 많이 다녔다던데, 이제는 언덕을 다 올라와서야 먼저와 있던 차 한 대 볼 수 있을 정도로 통행이 뜸해진 곳입니다.


​이유야 터널이 자꾸 생기기 때문일 텐데, 여행을 한다면 아무래도 빠른 길보다는 이런저런 추억이 새겨져 있는 옛길을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구룡령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도로 정상에 올라 먼 산을 바라보며, 꼭 다시 이곳을 넘겠노라는 다짐을 하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순간 적막한 산이 더 적막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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