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사지 가는 길은 강릉, 보현사 가는 길과 흡사했습니다. 비좁은 마을 길을 이리저리 구불구불 올라가는 것과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는 것, 감나무가 있는 풍경 또한 똑같았죠.
다만 보현사 갈 때는 가을이어서 곱게 물든 나무들 모습이 운치 있었지만, 지금은 녹음이 짙게 우거져 있답니다.
답사 책 속에서만 보았던 진전사지는, 제겐 마치, 울창한 숲 속에 달랑 석탑만 덩그러니 놓인 풍경으로 각인돼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답사지가 진정한 고급 답사지라고 했습니다. 입장료를 받는 곳은 초급 답사지.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같은 "답사"에 "답"자도 모르는 초보가 이런 고급 답사지에 가도 되는가? 길을 올라가며, 이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예전보다는 길이 좋아졌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차 한 대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이 곳곳에 있습니다.
운전이 미숙한 차량과 마주치면 고생 꽤나 해야 할 듯 한 길. 그래도 이런 길이 아직은 더 좋습니다. 폐사지 가는데 왕복 2차로의 넓은 길을 쌩쌩 달린다면 그 맛이 얼마나 반감될 것인가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위치한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입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는 진전사가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16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현재 절터만 남아있답니다.
그 절터에는 삼층 석탑(국보 제122호)과 부도(보물 제439호)가 있습니다. 또한 이 절은 우리나라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으로, 염거 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거센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 길을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요? 오른쪽에 삼층석탑이 힐끗 보입니다.
"아! 찾았다!"
하지만 차 세울 공간이 마땅치 않아 일단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정표에 진전사와 부도가 보였기에 우선 그곳에 먼저 가볼 생각이었죠.
바로 앞에 식당이 나오고 주차된 차들이 좀 보입니다. 그리고 산길이 나타났죠. 여기서부터는 완전 비포장도로입니다.
울퉁불퉁, 이리저리, 조심조심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차로 여길 올라가도 되는지 걱정도 드네요. 하지만 마땅히 돌릴 곳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올라야 했습니다.
"나중에 차나 돌려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걱정도 잠시, 여러 대의 차들이 조금 넓은 장소에 주차되어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진전사지 부도 70m’라는 이정표도 함께 있었지요.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커다란 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져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저수지가 있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둔전저수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70m만 올라가면 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70m만 올라가면 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진전사지 부도’를 보기 위해 걷기에 좀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랐습니다. 빗길에 미끄럽기도 했지만, 계단 자체가 금방 무너져 내릴 것도 같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지요.
'사람이 얼마나 다니지 않았으면 이렇게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을까?'
사람이 다니는 길은 풀들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흔적이 금방 남습니다. 울창한 나무숲 길을 걸으니 좋기는 한데, 인적도 없고 길도 많이 훼손돼있어서 으스스한 느낌도 드네요.
조금 숨이 가빠질 때쯤,8 각형의 부도 탑신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옆으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서 진전사지 부도는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겠죠? 그런데 왜 괜히 슬픈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전사지 부도
진전사지 부도(보물 제439호), 일반적으로 부도는 팔각 원당형(전체 평면이 팔각을 이루는 부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이곳의 부도는 기단부가 석탑처럼 방형(사각형) 이중기단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기단이란? 지면으로부터 본 건축물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곳을 뜻하는 건축용어입니다.
진전사지 부도는 보물 제439호로 도의선사의 부도 탑이라고 추측하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해요.
도의선사는 교종이 득세를 부리던 때에 선종을 통일신라에 전한 인물입니다. 교종이 서민들이 가까이하지 못하던 왕실의 종교였고, 왕권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쓰였던 불교였다면, 선종은 스스로 깨달으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지요.
당연히 왕실에서는 왕권 불교에 대한 반역으로 여겼죠. 그는 때를 기다리며, 진전사에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지방호족들과 연계되어 크게 중흥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도 옆으로 샛길이 나있고 넓은 터에 절이 보인다.
"아하! 저 절 이름이 ‘진전사’로구나"
그래서 이정표에 진전사라는 표시가 계속 있었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설악산 신흥사에서 조계종의 시조(선종)인 도의선사를 선양키 위해 1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대웅전과 요사체 등 2동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절에서 비포장도로이지만 길이 아래로 이어져있어서 내려갈까 하다가 그냥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기 위해 다시 부도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내려가는 길, 아까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옆으로 좀 편한 길이 있다. 지금은 진흙길에 풀이 무성하게 나있어서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지만, 누군가는 저쪽 길로 가면서 제가 걷던 계단 길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 길이 예전부터 있던, 원래 길일 테니까요.
다시 차를 타고 삼층석탑을 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식당 앞마당에 잠시 차를 세우고 석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122호
계단을 오르면 넓은 터가 나오고 삼층석탑 한기만이 외로이 서있습니다. 이 석탑은 국보 제122호로 높은 지대석(탑을 쌓기 위해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 놓는 돌, 탑의 제일 아랫부분)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하고, 3층 탑신을 조성한 통일신라 8세기 후반 것입니다.
아래 기단에는 비천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어있고, 위 기단에는 팔부중상이 각 면에 2구씩 조각되어있습니다.(비천상, 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선녀. 팔부중상, 불교의 여덟 수호신)
팔부중상 중에는 ‘아수라’가 있습니다. 어지럽게 난장판이 되어있거나 전쟁의 처참함을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된 아수라. 다른 신들의 이름과 형상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지만 이 아수라만큼은 기억하기 쉽습니다.
팔이 여섯 개 달린 형상만 찾으면 그게 바로 아수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팔부중상이 조각된 바로 위,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이 각 면에 1구씩 조각되어있습니다.
석탑과 절터를 한번 둘러보고 다시 차로 돌아왔습니다. 식당을 지키는 개 한 마리가 자기 집에 들어 누워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뭐 좀 알고 폐사지를 찾아왔냐고 묻는 듯하네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답사에도 등급이 있어, 이런 폐사지를 찾는 일은 아주 고급에 속한다고 하는데,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초급자가 이런 곳을 찾았으니, 제가 봐도 웃기는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