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난 20일간의 중국 여행 #2
여행을 하면서 소지품을 분실하게 되면 그것의 물적인 가치의 상실 때문만이 아니라 심적으로 매우 불편, 불안해집니다. 누구나 다 여행을 하기 전 여정을 계획할 때, 여행 중에 경험하게 될 많은 것들을 실제 이상으로 조금은 달콤한 상상을 곁들여 꿈꾸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러한 예기치 못한 사태의 발발이 품어왔던 기대의 상당 부분을 허물어버리게 되고, 내가 서 있는 여기도 역시나 현실의 한 귀퉁이였을 뿐이구나 하는 엄혹한 자각이 환상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또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원하지 않는 사태에 대한 염려 때문에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선을 여행을 마칠 때까지 견지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특히나 내 곁을 떠난 그것이 내 여행 중 차지할 물적, 심리적, 실질적 중요도가 크다면 그 상실감은 더 할 겁니다.
리장의 만고루에서 시차를 두고 촬영한 옥룡설산
나는 이미 몇 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특히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05년도 큰 놈과 유럽 배낭여행 갔을 때, 분실한 줄도 모르고 있었던 돈봉투를 하루가 지난 다음에 정직한 네덜란드 소녀 덕분에 되찾게 되었을 때의 환희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120만 원이 든 달러와 유로화 돈봉투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을 상실감보다 몇 배나 더 큰 보상을 받은 듯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아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보다 여행 자체를 훨씬 더 감미롭고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준 사건이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사건 전모는 다음의 링크를 클릭하면 파악이 됩니다.
http://blog.naver.com/road4535/50180088017
2005년, 유럽
또 하나는 2007년 작은놈과 역시 유럽 배낭여행 갔을 때 바르셀로나에서 신용카드를 분실했을 때입니다. 그때도 카드 분실 사실을 모른 채 다음 행선지인 로마로 갔었는데, 거기서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으로, 집으로 급히 전화 좀 해 달라는. 그 당시에는 폰을 로밍하지 않고 대신 UMC(Ultra Mobile Computer)라는 삼성에서 개발된 펜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방식의 혁신적인 컴퓨터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음성 통화는 공중전화를 이용한 대신 문자 메시지는 수시로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UMC는 전화 외에는 노트북 컴퓨터의 모든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음악 감상, 외장하드, 인터넷 등등. 기존의 노트북보다 크기도 작고 디자인도 깜찍해서 기차를 타고 갈 때면 테이블 위에 놓인 이 놈을 주위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쳐다 보기도 하고, 어떤 기차 승무원은 지나가며 엄지를 치켜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삼성 브랜드가 자랑스러웠습니다(2007년, 유럽).
아니나 다를까 어제 바르셀로나 캄포 축구장 갔었을 때 인근에 있던 스포츠용품 전용 Mall에서 약 30분간 350만 원 정도가 연속으로 결제돼서 결제내역이 폰으로 날아갔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른 카드 사용행태가 의심이 돼서 현대카드에서 독자적으로 사용정지를 걸었다며 어찌 된 일인지 다급하게 물어오는 애엄마의 숨 가쁜 목소리를 듣고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카드 분실이구나. 근데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이런 사단이 벌어졌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바르셀로나 축구장 인근에서 카드를 분실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그날 저녁 호텔에 돌아와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가지고 간 컴퓨터로 분실카드에 대한 피해보상 대책 등을 인터넷을 꼼꼼히 검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바르셀로나 FC 전용 축구장(2007년, 유럽)
바르셀로나 축구장 구경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머스터드 소스 세례를 받은 겁니다. 근 10년 지난 지금까지도 그게 우연한 사고였는지 의도적인 테러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고, 그 당시 왜 내가 그렇게도 얼이 빠져 혼비백산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머스터드 소스가 길을 걷고 있던 우리들에게 뿌려져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게 인도에 면해 있던 건물의 위층에서 실수로 쏟아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준원이 얘기로는 길가에 앉아 있던 애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뿌렸다는 겁니다. 소스 투척 세례를 받는 순간 나는 위를 쳐다보며 피했지만 이미 옷에는 머스터드 소스가 많이 끼얹힌 상태고 그건 준원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관광객인듯한 중년의 부부가 와서 괜찮은지 묻고 소스를 닦아주며,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던 젊은애들이 우리를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어쨌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카드가 분실된 건 그 와중인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일정이 여러 개가 잡혀 있어서 교통비를 아낄 심산에 지하철 1일권을 사서 그걸 여러 번 주머니 속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그런 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그 날 그 순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다가와 소스를 닦아내줬던 그 부부도 조금 의심스럽기도 하고(사실 그렇지 않다면 호의를 베풀어준 그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한 일이 되겠지만), 모든 게 꿈꾸듯이 벌어진 일 같았습니다. 악몽을 꾸듯이.
머스터드 소스 테러 전후 사진인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테러 후의 왼쪽 사진에는 셔츠에 머스터드 소스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2007년, 유럽).
일단 애엄마를 진정시키고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분실카드의 불법사용에 대해서는 카드사가 보상을 해준다, 그리고 내가 모바일 컴퓨터를 가지고 간 이유가 유럽 현지에서도 주식거래가 가능한 지 알고 싶었고, 그게 가능하다면 거기서도 실시간으로 주식거래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틀 전에는 새벽에 일어나서(우리나라와는 7시간 시차가 있습니다. 늦습니다) 삼성전자 주식을 매도해서 약 15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렇게 좀 진정된 애엄마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그 후 한국에 돌아와서 몇 차례 번거로운 피해보상 청구 절차를 거쳐서, 카드를 분실한 나의 부주의로 인한 귀책분을 약 50만 원 정도로 인정하고 300만 원 정도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인된 카드사의 위기 대처 능력이나 보상절차에 대해 나름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한국에서 약 30일간 묶을 유럽의 호텔들을 예약하는 과정에서도 카드사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사태 수습을 위해 고민했던 현장들. 준원이가 고민 중인 내 뒷모습을 찍은 것 같습니다. 아마 몰랐을 겁니다. 내가 고민 중인 것을(2007년, 유럽).
애들 엄마를 진정시킨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위안이 더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런 불편한 마음으로 앞으로 전체 여정의 2/3가 남은 일정을 소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비록 분실카드의 불법 사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카드사에서 상당 부분 보상을 해 줄 거고 그리고 내가 주식투자로 150만 원의 수익을 올렸으니 큰 손해는 아닌 거야. 결과적으로는 어쨌든 내가 돈을 벌었음을 나 스스로에게 거듭 확인시키고, 또 혹시 불안해할 준원이도 그런 식으로 안심을 시켜야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여러 가지 자기 위안, 자기 암시, 자기 합리화 등의 노력 덕분인지 카드 분실 사태는 그렇게 진화가 되고 남은 일정을 무사하게 잘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고 난 2 - 3일간은 사실 마음이 불편했던 건 사실입니다.
시안의 병마용
그런데 중국 다녀온 기행문을 쓴다면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지나간 추억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예, 분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전과 똑같이 그 사실을 한참 지나서 한국에 와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의 첫날에 대한 기록이, 약 600장가량의 사진이 몽땅 날아간 겁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제일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겁니다. 3주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해외에서 찍은 사진들을 16기가, 32기가짜리 메모리카드 두장에 다 담기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1 테라바이트 짜리 휴대용 외장하드(와이파이를 이용하며, 외장하드 본체에 SD카드를 읽어 들일 수 있는 리더기가 장착된)를 가지고 가고, 또 그것도 불안해서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카메라에서 폰으로 원본 사이즈를 대폭 줄인 복사본을 저장하는 방식으로 기록들을 저장해 왔는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첫날 투숙한 호텔의 와이파이 신호가 유독 약했습니다. 그런데다 마침 외장하드에 데이터를 전송하는 동시에 내 소식을 기다리던 한국에 있는 여인과 보이스톡을 하며 그 약하디 약한 와이파이 신호를 공유해서 그런지 어쩐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청두(성도)의 판다 보육 기지
나란 사람은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또 그 사진들을 저장하고, 단 한 장의 사진이라도 본의 아니게 손상되고 망실될까 걱정하며, 카메라보다 메모리카드나 휴대용 저장장치들을 더 신주 모시듯 하는 소심한 중늙은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사진과 관련하여 쓸데없는 상상도 자주 하곤 합니다. 작년 미얀마 갔을 때에도 카메라, 사진 및 저장장치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중국에서 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는데, 그때도 단 하루분의 사진이 부주의 탓으로 분실되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 나는 만약 그 사진들을 복원한다는 걸 전제로 내가 내 소지품이나 지갑을 분실해야 한다면 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손실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어이없는 망상을 하면서도 명쾌하게 결론을 못 내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100만 원은 너무 많고 그렇다고 10만 원은 너무 적고, 그럼 50만 원?.... 이런 피해망상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계속 있어왔던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증상이 점차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구채구
그나마도 불행 중 다행으로 폰에 저장된 몇 장의 사진이 있어 시안에 대한 기억은 그날의 비 내리던 우중충한 도시처럼 명쾌하고 분명하지는 않은 채로 조금은 복원될 수 있을 듯합니다.
4Kg이 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가벼운 보조 배낭까지도 걸머진 여행객에게 비는 상당히 성가신 존재입니다. 사진을 자유롭게 못 찍는 문제도 야기하지만 더 큰 문제는 소지품에 대한 주의력을 떨어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자칫 여행의 즐거움을 뺏아갈 수도 있는.
어쨌거나 첫째 날인 고로 시안의 랜드마크인 종루와 고루를 찾아서 비 속을 휘젓고 걸어가야겠습니다.
시안의 종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