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 사연 담긴 대리기사-가족 60여명의 단체 기차여행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자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차창 밖으로 시원하게 펼쳐졌다. 좌석에 자매처럼 붙어 앉은 이미영씨와 고혜진씨가 그 광경을 빠져들듯 보고 있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을 기억 속에 꾹꾹 눌러 담아 오래도록 잊지 않으려는 듯이. 그 기차여행의 슬로건은 '마음잇는 기차여행'이었다.
지난 6일 일요일, 부산울산경남 대리기사 400여명이 가입되어있는 '카부기 공제회'는 코레일, 전국철도노동조합, 희망철도재단, 비영리단체 마음봄사람봄 등의 지원을 받아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마음잇는 기차여행에는 선착순으로 모집된 60여명의 대리기사와 가족들이 참석했는데 이만한 인원의 대리기사들이 단체로 기차여행을 떠난 것은 대리운전기사라는 직업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파편처럼 흩어져 일할 수밖에 없는 직종인데 이렇게 마음을 모으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당일 만난 카부기공제회 공동회장 김철곤씨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부산경남에서 대리운전을 하고 있는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린 동료들을 구호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2022년 카부기공제회를 설립해 회원들에게 입원·수술비 등을 지원하고 십시일반으로 어려운 동료를 돌보며 경조사를 챙기는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올해 8월 14일까지 공제회원 지원합계액이 7천만 원을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기사는 모래알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있을 만큼 공동체를 이루기 힘들고 다같이 모여 뭔가를 하는 것이 어려운 직업이 대리운전이다. 전국 3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대리기사들은 고립된 채 일을 시작하고 현장에서는 좋은 콜을 잡기 위해 불가피하게 서로 경쟁 심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일. 고독과 콜을 기다리는 따분함을 떨치기 위해 현장에서 오며 가며 얼굴을 익힌 기사들끼리 안부를 묻고 술을 나누기도 하지만 경조사를 챙기며 고통까지 함께 나누는 깊은 사이가 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토로다.
카부기공제회 회원을 대상으로 한 마음잇는 기차여행엔 희망자에 한해 가족 동반도 가능했는데, 여성 대리기사 10명 외에도 60대 대리기사가 30명, 부부가 8쌍, 자녀 동반과 손주 동반이 각각 1쌍 등이었다. 부부로 참석한 회원 중에는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한 번도 여행을 못 갔다는 이들이 많았다. 대리운전을 하러 나가기 전까지 몸이 불편한 손주를 보살펴야 하는 60대 초반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기차는 아침 8시에 떠나네
여행 당일 아침 기차역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는 회원이 여럿이었다. 오랜만의 여행, 그것도 기차여행에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설렜다는 것이다. 물론 밤새 생업 전선에서 콜을 타다 눈도 못 붙이고 온 회원들도 많았다. 참가자들은 울산에서, 창원에서,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부산역으로 구포역으로 모였다. 다들 피곤한 와중이라 지각자나 불참자가 나올 법 했음에도, 한 명의 사고자 없이 출발 10분 전에 모두 승강장에 도착했다.
관광열차답게 날개를 펼친 새들이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서서히 남도해양열차가 출발했고,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사이다와 삶은 달걀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요즘은 대리운전보다 농장 일에 매진하고 있다는 회원이 잔뜩 보내준 단감과 떡도 더해졌다.
이후 비영리단체 '마음봄사람봄' 활동가들이 마음을 잇는 기차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옆 자리에 앉은 동료나 가족에게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엽서에 담아 건넨다.
카부기공제회 공동회장이자 '여자만세'를 리드하고 있는 이미영씨가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고마운 동생이자 동료인 고혜진씨에게 준비한 엽서를 건네다 눈물을 쏟는다. 왜 함께 여행하고 싶어했는지 적은 엽서에는 "효부, 효녀, 두 딸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로 숨가쁘게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는 혜진이에게 잠시라도 쉼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적혀 있었다.
고혜진씨의 남편은 든든한 대리운전 동료다. 밤마다 성장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서야 했던 시린 사연을 가지고 있는 고씨는 작은 딸은 아직 중학생이지만 큰 딸이 고등학교 졸업반이 돼서 한 걱정 놨다며 밝게 웃었다.
이미영씨와 고혜진씨는 2022년 가을 '여자만세'라는 부산울산경남 여성대리기사들의 단톡방이 만들어지면서 친해진 사이다. 두 사람 다 경남 김해에서 콜을 시작하고 김해로 돌아오며 일을 마치다 보니 진작에 친분을 쌓았을 법 한데 현장에서 마주칠 때는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고.
여자만세 단톡방은 2022년 12월 부산이동(플랫폼)노동자지원센터에서 열린 부산경남 최초의 여성대리기사 간담회를 거치며 자조모임화되었고 2023년에는 자체 모금과 이동노동자지원센터 자조모임 지원사업 등의 후원을 더해 순천만 가을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미영씨와 고혜진씨 등 여자만세 회원들은 여성 대리기사들의 직업적 고충과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여러 방송과 라디오, 다큐 영화 등에 출연하여 목소리를 내왔다. 특히 이씨는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대학, 국회, 방송국 등에서 여성대리기사들의 권익보호를 주제로 한 토론회나 특강을 열 때 토론자나 강사로도 나서고 있다. 여자만세 회원은 50여명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여행에는 10명의 회원이 참석했다.
마음봄사람봄 활동가들은 엽서를 주고 받으며 마음을 잇는 회원들의 모습을 즉석 사진에 담아 선물했다. 그렇게 마음을 잇고 행복한 기차여행에 빠져드는 사이 기차가 순천역에 도착한다. 기념사진을 찍고 벌교 꼬막집으로 이동하여 맛있게 점심을 해결했다.
귀하게 마련된 여행인만큼 여러 곳을 구경하고 싶어 순천낙양읍성, 송광사, 보성 대한다원 3곳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잡았지만, 사실 돌아가는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저녁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서너시간 밖에 여유가 없었다. 약속된 일정이니만큼 대절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바삐 움직이기로 했다.
그 유명한 대한다원에 도착하니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향연이 눈을 사로 잡고 싱그러운 차향이 코끝을 사로잡았다.
"이런 기분 좋은 설렘은 참 오랜만입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회원들의 소감은 하나 같았다.
중학생 딸과 같이 온 40대 아빠도 있었는데 딸이 셋이다 보니 개인 사업으로는 부족해 대리운전까지 2개의 직업을 가진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같이 온 딸은 셋 중 둘째인데 둘째 딸의 서러움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빠는 하루 종일 같이 다니며 그동안 여행 못 가본 미안함을 씻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비가 제법 내리는 가운데 낙안읍성에 도착을 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비 때문에 송광사는 포기하고 순천 드라마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작년 이맘때 여자만세에서 여행을 다녀간 곳이라 여자만세 회원들은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작년과 같은 요란벅쩍한 고고장 춤사위를 선보였다. 박수와 웃음이 뒤섞인 축제가 한바탕 벌어진다.
밖을 보니 시종 느릿느릿 일행을 뒤따르던 한 회원이 혼자 드라마 세트장을 돌아보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말 없이 점잖은 그는 60대 초입쯤 되어 보였다. 그의 여행 소감을 듣고 싶어 조심스럽게 안부 몇 마디를 건네는데 의외로 금방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
" … 대리운전을 꽤 오래 했어요… PDA들고 다닐 때, 카드대란 때부터 했으니 거의 한 20년 ... 중간 중간 회사도 다니고 장사로 다시 일어서 보려고도 했는데 안정적인 직장도 아니고 밑천도 부족하고 결국 돌아오게 되더라고 이 일로. 남의 차지만 운전하고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거든. 근데 여행은 잘 안 가지더라고. 빚은 안 줄어들지, 아픈 노모도 부양해야지, 여유가 없었어. 이제 혼잔데 완전히… 앞으로는 나를 위한 여행도 좀 다니고 해야죠."
하루가 참 빠르게 지나갔다. 남도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잠을 설치고 온 회원들이 많아서 기차 안이 조용했다. 대절버스로 이동하면서 졸던 회원들이 이제는 편안하게 곯아떨어졌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낭독된 대리기사 공제회원들의 사연들을 찾아 다시 읽어본다.
어느 대리기사의 감사 사연
"어둠을 낮 삼아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꽃이 피는지, 단풍이 드는지, 낙엽이 떨어지는 지도 모르는 채 살아 왔습니다. 빚 갚느라, 가족부양하느라, 먹고 살기 바빠서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 다녀왔습니다.
(중략)
손주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심신이 불편했습니다. 그런 손주에게 누군가는 항상 옆에 있어야 했고 손주를 보살피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낮에는 손주와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했습니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손주를 볼 때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손주가 조금 부족하다고 하지만 내게는 손주가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이쁘기만 합니다.
그런 손주에게 아름다운 세상과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할배, 할매, 삼촌, 고모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재롱도 피웠으면 합니다.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 만들겠습니다. 살아가는 일들이 힘들고, 지치고, 주저앉고 싶을 때 오늘의 추억들을 꺼내보면서 다시 웃고, 다시 힘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행이 있기까지 힘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 포스팅은 카부기공제회 기차여행에 동행 취재한 것을 토대로 작성했으며 아래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