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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근 Sep 08. 2021

<운수 좋은 날> 떠오르는 코로나시대 대리기사들의 삶

택시.버스기사 등과 달리 운수업종 긴급재난지원대상에서도 누락돼

"부산경남 대리기사들이 모여있는 밴드 회원이에요. 모금 운동 글이 올라왔길래 처음에는 그냥 못 본 척하려고 했죠. 근데 애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암이 이미 4기라는 본인도 본인이지만, 애기도 재생불량성 빈혈이래요. 부인은 외국인인데 아직 국적 취득도 못한 상태고.

그런데 그 몸이 돼서도 어떻게든 일을 하고 싶어한대요. 가족들 굶을까봐. 도저히 그냥 못 넘기겠어서 코로나 길어지면서 다 해지하고 딱 하나 남은 보험을 담보로 몇 만원 소액대출을 받아서 보냈습니다... 살았으면 싶어서."

끝날 줄 모르는 코로나에 사지로 내몰린 대리기사들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대리기사들은 재난재해에 가장 취약한 계층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왔던 탓에 사회 안전망도 아직 갖춰지지 못한 대표적인 계층이다.


그간의 실태조사들을 보면 전업 대리기사의 비율은 60~80퍼센트 정도다. 대리운전을 생계의 방편으로 삼는 경우 기본 재산이나 보험 없이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기사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수입이 반 토막 내지는 반의반 토막 난 코로나 재난 상황을 1년 6개월이나 겪어왔으니 그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가중됐을지는 쉽게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새벽녘 홀로 공원에 남은 대리기사가 하염없이 콜을 기다리고 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처럼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대리기사가 암담한 삶을 살았다. 2018년 2월 부산에서 병든 아내를 보살피던 중년의 대리기사는 아내의 암이 재발하자 아내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해병대 소령 출신에 월남 참전용사로 알려진 그는 대리운전을 생계수단으로 삼은 뒤에도 누구보다 강건하게 살아왔지만 실은 아무 곳도 의지할 데 없는 삶이었다. 처음에는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되기도 했으며 왕래하던 후배 기사가 없었다면 언제 발견되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코로나 이후 그런 사건들이 더 많아졌을 것을 짐작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보니 정부와 지자체조차도 실태를 알 수가 없고 그래서 알려지지 않는 것일 뿐이다. 소리 없는 죽음들 곳곳에 이들도 말없이 숨어있을 것이다. 취재 중 사연을 접하게 된 부산·경남 대리기사들은 위로나 격려의 말조차 꺼낼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들이 많았다.


5년여 전쯤 모 중소기업 간부로 재직하다 퇴직하게 된 경남의 한 대리기사는 사정상 들어가는 돈이 많아 24시간 대리운전 프로그램을 켜놓고 자다가도 콜이 뜨면 나갈 만큼 일에 매달렸다. 워낙 반듯하고 친절해 장거리 개인 고객들도 많이 생길 만큼 수입도 좋았다. 하루 일을 마치기 전에는 외곽에서 못 빠져나온 대리기사들을 밴드를 통해 수소문해 데리고 나오고 콜도 밀어줄 만큼 동료애도 넘쳤다.


그러다 너무 무리한 탓에 허리 디스크를 앓게 되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 초에는 중학생 아들이 갈비뼈가 함몰돼서 폐를 압박하는 질환으로 대수술을 받았다. 코로나까지 맞물려 그의 삶은 점점 암담해져 갔다. 일을 할 수 없는 허리 상태였지만 악착같이 운전대를 잡았다. 너무 통증이 심해 운행종료 후 고객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내리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는 오늘도 어떻게든 운전대를 잡으려 한다.  


영상제작을 업으로 삼아오다가 우여곡절 끝에 정리하고 8년째 대리운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부산의 한 60대 대리기사. 그는 젊은 시절 최루탄 파편을 맞은 후 안질환이 생겼다. 한두 해 전부터 증세가 심해졌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치료에 돈을 쓸 여력이 없었다. 운전에 방해가 될 만큼 상태가 악화된 다음에야 병원을 찾았다.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돈이 없었다.


사정이 알려지자 코로나 와중에도 동료기사들이 모금 운동으로 수술비를 모아줬다. 하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후였다. 수술은 받았지만 실명이 되지 않게 막는 수준이어서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하는 것조차 이제는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경남 김해의 한 대리기사는 훤칠한 외모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언변의 소유자였다. 대리운전을 해달라는 개인 고객들이 넘쳐나 업체등록을 했고 그로 인한 부수입도 상당했다. 다른 사업을 벌여도 성공할 것 같던 그는 그러나 대리기사로 충실히 살며 전체 대리기사의 사회적 처우개선을 위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시청, 도청의 문을 두들겼다.


그의 삶이 비극적으로 바뀐 것은 코로나 이후였다. 초토화된 대리 산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렸을 것이라 했다. 지병이 악화하였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혼자라는 고독감이 그를 압박했을 수도 있다. 새벽녘 그는 집으로 올라가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굴러떨어졌다. 크게 다친 그는 졸지에 입원실에서 사투를 벌여야 하는 신세가 돼버렸다. 소장절제 수술을 받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갑자기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경련과 의식불명, 발작 증세가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발을 다쳤고 또 어떤 비상상황이 벌어질 줄 몰라 동료기사들이 돌아가며 곁을 지켰다. 그는 결국 그를 통제해줄 수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몇 개월 동안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며칠 전 그는 퇴원을 했지만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상태가 되지는 않을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시도를 했던 대리기사도 있었다. 그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일절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결심을 실행했지만 실패했다. 한두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라 여기서도 그저 언급만 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작년 11월경 불의의 사고로 삶이 무너질 위기에 놓인 한 대리기사를 돕기 위해 200여 명의 동료 대리기사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던 소식을 기사화한 적이 있는데 (아래 관련 기사 http://omn.kr/1qte8) 그 부산·울산·경남 대리기사 밴드에서는 줄을 잇는 동료기사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그 이후로도 모금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코로나로 수입이 반의반 토막 났다는 대리기사들이 십시일반 하여 의지할 데 없는 다른 동료기사들을 돕고 있는 형국이었다. 말 그대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텨오던 그들은 택시, 버스 등 운수업종에 대한 정부의 5차 긴급재난지원대상에 대리기사들이 올라가지 못하자 9월 7일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부산·김해·양산시청앞에서 릴레이 1위시위에 돌입한 것이다.


부산·김해·양산시청 앞에서 대리기사들이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청 앞에서 릴레이 1위시위 중인 대리기사들


긴급재난지원 대상 누락 이후 수도권, 노조 중심으로 시작된 대리기사 1인 시위가 일반 기사를 중심으로 지방으로도 번지는 양상인 것이다.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진 대리기사에게 모금운동과 후원으로 모인 1300만 원이 전달됐다

서두 인터뷰에 언급됐던 안타까운 사연의 대리기사에게는 1300만 원이 모금되어 지난 7월 26일 전달되었다. 노조원들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 대리기사 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과 단체들까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었던 것이다.


지난 8월 19일 울산시는 정부 코로나 지원의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 대리기사들에게도 1인당 50만 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앞서 언급했듯 수도권에서 시작된 대리기사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지금은 지방으로도 번져가고 있다. 부산·경남 권역만 보더라도 현재 부산·김해·양산시청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며 창원시청 앞에서도 계획되고 있다.


부산·경남 지자체들도 울산시처럼 대리기사들에 대한 자체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해야 할 시점으로 보인다.




이 포스팅은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채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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