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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Jan 09. 2019

수많은 클레오에게 희망을

 영화 <로마> 리뷰 

 

영화 <로마>를 추천하는 이유  

언제부터인가 나의 영화 선택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은 SNS이다. SNS 친구들이 영화 <로마>를 추천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흑백의 유려한 영상이란 점, 두 번째는 70년대 멕시코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개인 역사를 잘 조합하고 있다는 점, 세 번째는 여성들간의  자매애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이다. 영화를 본 후 나는 앞의 두 가지 추천 이유에는 동의되었으나, 마지막 이유는 수긍하기 힘들었다.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오늘 리뷰를 쓴다. 클레오와 소피아 가족의 관계를 자매애로 읽는 순수하고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없어서 안타깝다.      


마지막 이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영화를 비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앞의 두 가지 이유에 조금 말을 보태어서 좋은 영화로 로마를 추천하고 싶다. 우선, 흑백필름이 전달하는 신선함이다. 흑백이 보여주는 단순함과 무거움의 이미지가 회상, 기억이란 테마와 잘 어울렸다. 또 다른 이유는 독특한 정치영화라는 점이다. 영화가 71년에 있었던 ‘성제축일 대학살’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정부 클레오와 집주인 소피아 가족의 사적 관계가 주요 스토리라인이지만 그 배경으로 전개되는 시대적 상황과 인종· 신분 차이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정치영화로 손색이 없다. 백화점과 시위현장, 백인들 중심의 파티와 하인들의 파티 그리고 도시와 지방의 거리 모습 등의 이질적 장면들을 배치함으로써 리얼리티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감독은 자신을 키워준 보모에 대한 사랑, 존경을 영화에서 전달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가 보여주는 이미지도 클레오와 소피아의 모성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이다. 그럼에도 의문이 들었다. 영화 로마는 수많은 클레오에게 따뜻한 이야기일까? 주인 가족을 위해서 노동한 사람들은 그 가족과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백인 아이들의 기억과 같은 기억을 할까? 영화 속에서 클레오와 소피아는 무책임하고 비도덕적 남성에 대한 희생자로서 동병상련적 감정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자매애라고 부를 수 있을까? 평형추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자매애가 지속적일 수 있을까.      


수많은 클레오가 만드는 가정

클레오는 말이 적고, 성실하고, 순종적인 가정부이다. 클레오는 주인집 아이들에게 생모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런 클레오가 임신을 했을 때, 임신했음에도 해고하지 않고, 출산의 도움을 주는 것은 집주인 소피아다. 가난한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고, 아기의 아빠도 도망간 상황에서 그녀에게 소피아의 집은 마지막 보루이며 희망이다. 임신한 이후, 클레오의 말수는 더욱 줄어든다. 그녀의 입은 거의 열리지 않는다. 임신 후에도 그녀는 예전처럼 성실하고 순종적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클레오는 죽은 아기를 출산한다. 아이를 잃은 죄책감에 빠져 있는 클레오와 주인집 가족과의 관계는 전보다 더욱 굳건해진다.


만약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외할머니 집에 보내지고, 클레오의 가정부 생활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또는 가정부들이 사는 별채 이층에서 클레오는 딸과 살면서 여전히 가정부로 살았을 것이다. 클레오의 딸도 자연적으로 엄마를 도울 것이다. 클레오는 더욱 말이 없는 생활을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보다 주인집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할 것이며, 소피아 가족에 대하여 더욱 헌신할 것이다.       


이것이 영화적 상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도 영화 로마와 같이 70년대 초에는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는 시골에서 올라온 입주 가정부가 있었다. 시골에서 온 어린 애들은 수양딸로 받아들여 집안일을 시키기도 했다. 나는 비슷한 환경을 2000년대 초에 다른 나라에서도 목격한 적이 있다. 필리핀에서 내가 단기간 동안 입주했던 집에서 만난 보모와 주인여자는 또 다른 클레오와 소피아였다.  자신의 주인과 아이들에 대한 보모의 헌신이 놀라웠다. 주인집 여자가 아이들을 야단치고 짜증을 내면, 이럴 때마다 아이들이 달려가는 곳은 보모 옆이었다. 지금 그들의 이름은 모두 잊었지만 얼굴 표정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소파에 앉아서 편안한 얼굴로 TV를 시청하던 여자, 그 여자의 뒤편에서 세 아이를 돌보느라 항상 쉴 새가 없지만 아이들의 살 같은 애교에 이보다 더 행복하랴 하는 웃음을 짓던 또 다른 여자. 이들 사이의 자매애는 성립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


보모가정부 대신 가사노동자 

70년대 초가 아닌 2019년에도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중상류 가정을 가정부, 보모들이 지키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글로벌한 노동의 이주가 증가하여 가난한 나라의 여성이 부자 나라의 아이와 가사를 돌보는 현상이 늘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가사노동자들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힘들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화 속 주요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배경, 장식품보다 더 낮은 지위에 있을 때도 있다. 이들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않는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들은 중산층의 신분을 드러내는 소품의 하나로 취급된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여야 하고, 침묵하는 자여야 한다. 우리의 실제 삶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영화이다.        


그럼에도 2019년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한 발짝 더 나아가길 원한다. 클레오가 소피아의 배려에 감동하는 것보다는 소피아의 짜증과 화풀이에 감당하기보다는 사소하게라도 저항을 했으면 좋겠다. 집 주인과의 우정을 기대하는 것보다 영화 <헬프> 속 주인공들처럼 클레오와 또 다른 동료가 친구로 의기투합하면 어떨까? 그리고 보모, 가정부들이 가사노동자로서 권리를 갖기를 희망한다. 만약 클레오가 가사노동자 노동조합에 가입한다고 하면 그들의 친절한 주인은 무엇이라고 할까? 클레오는 따뜻한 환영을 소피아로부터 받을 수 있을까? 임신했을 때 클레오를 해고하지 않은 것처럼 클레오의 권리가 인정되길 바란다. 자매애는 이런 기초 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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