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펑펑 운건 오랜만이었다.
팀장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미 마음 한구석에는 알고 있었던 체념이 현실화된 기분이라서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던 게 다행이었다. 미안하면 나중에 술 한잔 사주세요, 라는 말 한마디만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나니 분노와 슬픔, 우울함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몇 번이나 자문자답하며, 씁쓸한 커피 원두 알을 곱씹는 심정으로 계속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재택근무로 전환할 때 이미 각오했던 상황이긴 했다.
올해 고과평가를 좋게 받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매일 출근했던 직원에 비해 얼굴을 자주 비추지 않은 직원을 박하게 평가하기는 쉽고, 설사 평가를 낮게 주더라도 그 직원이 출산휴가에 들어가 버린다면 그 미안함은 잠깐 뿐일 것이다. 그러나 부서이동 이후 내가 이동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팀의 막내라서, 아니면 같은 팀원의 승진을 위해서 몇 년간 계속 양보해왔던 인사평가의 서운함이 지금 와서 화산처럼 폭발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올해 상반기까지 (심지어 임신소식을 알기 전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재택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 업무에 공백이 안 생기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 그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게 헛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계속 양보했잖아.
작년에는 죽도록 일했는데도 고과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며.
올해 챙겨주겠다며. 근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매일 출근하면서 죽도록 일했을 때도 성과를 안 챙겨주더니, 임신을 하니까 더더욱 챙길 수 없는 명분만 준 기분이었다. 이해는 간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팀이 진행하는 업무에는 자연스럽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행사나 접대가 많은 업무 특성상 임산부에게 짐을 나르거나 뛰어다니라고 시킬 수 없었으니 사실 재택근무가 아니라 상시 출근을 했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크게 변화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탓을 하려면 날 탓해야지.
하지만 한편으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계속 배려해주고 양보했는데, 정작 배려받아야 할 상황에서조차 한 번도 배려조차 못 받는 건가?
내가 근무하는 기업은 사내 복지가 잘 갖추어져 있다고 소문난 편이다. 그러다 보니 육아휴직과 출산휴가 후 잘릴 걱정 없이 자연스레 업무복귀 후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임신을 하면서 회사에 잘릴까 봐 걱정하는 내 친구들과 달리 내 형편은 감사하며 다녀야 할 판이다. 그러니 인사평가가 내 기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그저 내가 감내해야 할 작은 페널티에 불과하니까.
문득 내가 회사생활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앓는 소리를 내고, 왜 나에게 이러냐고 주변 사람들과 술이라도 마시면서 뒷담을 하고, 속 시끄럽게 주변을 쑤시고 다녀야 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 생각해서 그냥 무심히 넘겼지만,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 하나 틀린 게 하나 없다. 결국 얌전한 애한테 쥐여준 떡을 뺏어서 우는 애한테 더 주는 셈이 된 셈이다.
그렇게 떡을 빼앗겨오다가 정작 필요할 때 내 밥그릇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인간이 되어버린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