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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아레테 Nov 08. 2021

입동, 겨울비, 그리고.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펑펑 운건 오랜만이었다.


팀장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미 마음 한구석에는 알고 있었던 체념이 현실화된 기분이라서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던 게 다행이었다. 미안하면 나중에 술 한잔 사주세요, 라는 말 한마디만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나니 분노와 슬픔, 우울함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몇 번이나 자문자답하며, 씁쓸한 커피 원두 알을 곱씹는 심정으로 계속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재택근무로 전환할 때 이미 각오했던 상황이긴 했다. 

올해 고과평가를 좋게 받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매일 출근했던 직원에 비해 얼굴을 자주 비추지 않은 직원을 박하게 평가하기는 쉽고, 설사 평가를 낮게 주더라도 그 직원이 출산휴가에 들어가 버린다면 그 미안함은 잠깐 뿐일 것이다. 그러나 부서이동 이후 내가 이동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팀의 막내라서, 아니면 같은 팀원의 승진을 위해서 몇 년간 계속 양보해왔던 인사평가의 서운함이 지금 와서 화산처럼 폭발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올해 상반기까지 (심지어 임신소식을 알기 전까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재택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 업무에 공백이 안 생기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 그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게 헛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계속 양보했잖아. 

작년에는 죽도록 일했는데도 고과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며.

올해 챙겨주겠다며. 근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매일 출근하면서 죽도록 일했을 때도 성과를 안 챙겨주더니, 임신을 하니까 더더욱 챙길 수 없는 명분만 준 기분이었다. 이해는 간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팀이 진행하는 업무에는 자연스럽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행사나 접대가 많은 업무 특성상 임산부에게 짐을 나르거나 뛰어다니라고 시킬 수 없었으니 사실 재택근무가 아니라 상시 출근을 했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크게 변화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탓을 하려면 날 탓해야지.

하지만 한편으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계속 배려해주고 양보했는데, 정작 배려받아야 할 상황에서조차 한 번도 배려조차 못 받는 건가? 



내가 근무하는 기업은 사내 복지가 잘 갖추어져 있다고 소문난 편이다. 그러다 보니 육아휴직과 출산휴가 후 잘릴 걱정 없이 자연스레 업무복귀 후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임신을 하면서 회사에 잘릴까 봐 걱정하는 내 친구들과 달리 내 형편은 감사하며 다녀야 할 판이다. 그러니 인사평가가 내 기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그저 내가 감내해야 할 작은 페널티에 불과하니까.


문득 내가 회사생활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앓는 소리를 내고, 왜 나에게 이러냐고 주변 사람들과 술이라도 마시면서 뒷담을 하고, 속 시끄럽게 주변을 쑤시고 다녀야 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 생각해서 그냥 무심히 넘겼지만,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 하나 틀린 게 하나 없다. 결국 얌전한 애한테 쥐여준 떡을 뺏어서 우는 애한테 더 주는 셈이 된 셈이다. 


그렇게 떡을 빼앗겨오다가 정작 필요할 때 내 밥그릇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인간이 되어버린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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