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음성 유방암 이야기)
겨울
12월: Believe you can!
성격상 와이프로 인해 전전긍긍하진 않지만, 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12월의 첫날 우이동 북한산 자락의 ANTO로 1박 여행을 갔다. 미세먼지가 나쁨인 날도 왠지 큰 산자락 아래에서는 마스크를 벗게 된다. 친한 지인이 추천한 오리 장작구이 집에서 늦은 아점으로 먹은 오리고기는 생애 가장 맛있게 많이 먹은 점심이었다. 엄마가 유독 좋아하셔서 자랄 때 여러 번 오리고기 맛집을 다녔지만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리고기와 함께 나온 한 양재기 녹두죽도 싹싹 긁어 다 먹었으니 그날 우리 둘이 족히 4인 이상의 양을 먹었다. 항암을 하며 나 스스로 자주 말했다. 암 환자가 이렇게 많이 먹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러면 가족과 남편은 항상 웃으며 끄덕였다. 우이동 자락에는 맛고을 답게 참 맛있는 집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한식도 많지만 MZ들이 갈 카페도 많아서, 훼손되지 않음을 살린 그 예쁜 고을을 혈당 스파이크를 막으며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즐길 수 있는 호텔과 달리 아담하지만 브랜드만의 멋을 살린 리조트를 돌아보고 체크인을 했다. 우리가 예약한 방은 1 bed-room type 이었는데 남편이 좋아하는 소금욕을 즐기며 하룻밤 쉬어가기 참 좋은 자리였다. 체크아웃을 한 다음날 S병원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가는 김에 두피 클리닉도 예약해서 오랜만에 반짝반짝 몽돌 같은 내 두상도 잘 닦아주고 대학 선배 가족을 만나서 맛있는 추어탕도 먹었다. 역시 여럿이 함께 먹는 맛이란!
선배는 쌓여가는 업무들을 말없이 감당하다가 업무 과중으로 번아웃을 몇 년 견뎌내야 했고, 약에 의존하며 버티던 시간을 넘어 결국 퇴직을 했다. 학생 때부터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보아왔기에 다 쏟아내지 못한 말 안에 갇힌 그의 아픔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많은 동기들이 근처에 살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던 그는, 아픔을 겪는 나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었다. (슬픔이 주는 기쁨 중 하나가 누구든지 자신의 약함을 나에게 쉽게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고도 감사한 경험이다)
일주일 후 예약된 4차 항암이 진행되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스테로이드제가 들어갈 때 밑이 뜨거워지는 걸 느낀 날이었다. 블로그에서 많이 본 부작용이었지만 나는 처음 겪는 통증이었기에 낯설고 불편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날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주에는 큰 딸의 공연이 삼일 연속 있었기에 포토월 시간에 맞춰서 날마다 예쁜 꽃을 전달해주고 마지막 날엔 남편과 함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로서 해준 것이 겨우 꽃다발 하나였음에도 공연이 끝남과 함께 긴장했던 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역시나 독한 항암을 버텨내기엔 에너지 소비가 많은 12월이었을까, 결국 5차 항암 후부터 오르기 시작한 간 수치가 320이 되고 S병원에서는 항암을 중단하자고 말씀하셨다. 몸에 이상을 느끼면 바로 응급실로 와야 한다는 주의 사항을 들으며 간호사님께 물었더니 본원 응급실로 오되 아마 하루 이상 대기해야 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응급인데 24시간을 대기 하라구요?’
이미 같은 병원 환자들의 블로그에서 충분히 보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평소 다니던 B병원이 있었고 여차하면 그 병원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오는 차를 타고는 뻗어버렸다. 집 앞에 도착하고 깨우는 남편의 소리를 듣고도 좀처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오늘 밤이 힘들 것만 같아서 응급실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면서 문득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미용실 원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암 진단을 받은 후 소식을 알리자 메마른 내 눈 대신 울어주시며 위로금을 주시고 또 평소 자신이 다니는 D병원을 소개해줄테니 언제든 위급하면 연락해달라고 말씀하셨다. 타병원 항암 환자를 받아주는 것이 쉽지 않음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기에 “괜찮아요”하고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그날 밤의 위급한 내 몸의 상태는 그때의 거절을 떠올리게 했다. 원장님께 부랴부랴 보낸 카톡에 금방 답장 전화를 주셨다. D병원 부장님께 연락해두었으니 지금 바로 가면 된다는 반가운 연락이었다. ‘아, 적어도 이 병원에서는 나를 받아주겠구나’ 안심을 하고 바로 응급실에 도착해서 접수를 했다. 다행히 원장님 말씀대로 병원에서는 친절하게 응급상황의 나를 받아주었고 혈종내과 담당의까지 붙여주셨다. 그날의 간 수치는 550. 더 지체하지 않았어야 할 마지노선에 가까웠다. “간 수치 550은 간세포가 깨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응급실을 거쳐 1인실로 입원한 나에게 회진오신 선생님께서 내 몸의 상태를 상세히 알려주셨다. 대형 병원인 S병원에서는 차트 기록 하나도 물어보기가 어려웠는데 작은 D병원의 친절함은 그 자체로 환자의 마음부터 치료해 주는 것 같았다. 행여 간 수치가 올라갈 수 있으니 가장 최소한의 치료로 수액을 달고 천천히 수치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일주일을 그 병원에 머물렀다. 가사 일을 하지 않고 하루도 보내보지 않았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을 땐 가장 먼저 가족들의 일상이 걱정되었다. 밥은 무얼 먹는지부터, 매일매일 벗어대는 두 딸의 빨래며 한 번도 시키지 않았던 설거지며 누가 언제 무엇을 하고 사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흰죽으로 항암으로 벗겨진 속을 달래며 긴 하루를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공간에서 쉬어간 그 일주일이 없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지체하면서 응급실을 늦게 갔더라면, 아마 이 글을 쓸 지금의 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간 수치와 함께 올랐던 미열과 70/50까지 떨어졌던 저혈압이 모두 회복되고 크리스마스 전날 200의 수치를 확인하고 퇴원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집에서 처방된 우루사와 레가논으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수치였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2025년, 아픔이 가득했지만 서로를 위로했던 우리 가족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예배를 함께 드리고 미리 예약해두었던 레스토랑에서 산타할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빨간 자루에 두 딸과 우리 부부의 선물을 담아 맛있는 식사와 함께 나누었다. 자주자주 표현하고 슬픔이 드리워진 가족을 위로하고 싶은 엄마와 아내의 마음. 그 마음을 표현하는 애틋한 밥상이었다. 간 수치가 회복되기까지는 한 달을 기다려야 했지만 다행히 큰 쇠붙이 판을 가슴에 안은 듯 혀끝으로 느껴지는 쇠맛과 가슴이 답답한 통증을 견뎌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내가 겪는 간 수치가 오르는 자각 증상은 쇠맛과 큰 쇠붙이를 안은 느낌이었다) 암세포들은 마구잡이로 나를 공격하는 것에 휴전을 선언한 듯 잠잠히 기다려주었다. 2025년의 마지막 날들을 나는 어떻게 지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이 기억 나질 않는다. 40대 이후부터 천천히 뇌세포의 저장고가 작아짐을 느꼈지만 암진단을 받고 항암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점심 뭐 먹었어?”라는 친구의 물음에 “음..뭐 먹었더라..”가 일상일 만큼 내 머릿속은 치료를 위한 에너지 비축을 위해서인지 저장 용량을 바로바로 비워 댔다. 기억에서는 퇴색되었지만 다이어리를 보며 되짚어보니, 다이어트 중인 예술인의 두 딸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그릭요거트 케이크를 빠바에서 구입했고 한 살 더 먹는 딸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후 6일 만에 또 애틋한 편지와 숙녀향의 플로럴 코치 향수를 건넸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해를 맞는 밤은 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니, 내 삶의 동아줄인 천국 소망을 잘 부여잡으며 새해를 맞았었나보다.
일 년을 되돌아본다면 생애 소원인 영어 공부를 참 열심히 했었고 다니던 직장에서 더 많은 대기를 걸게 할 만큼 학부모와 아이들의 사랑을 덧입었다. 사무실에서는 항상 “선생님 팬들이 줄 서 있잖아요”라고 할 만큼 즐거운 출근이었다. 그리고 2학기 개강과 함께 잠겨버렸던 목 상태, 원인을 알 수 없어서 후두염 약을 2주간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고 그 덕분에 9개월간 미뤄왔던 가슴 돌기를 예사롭게 만지며 방문한 유방외과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었다. 아이들과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지만 나에게는 막연히 그럴 것만 같은 미래였었는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연습 된 사람에게는 슬픔도 기쁨과 비슷한 흡수력을 갖는가 보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했던 것은, 바쁜 일상에서 딱 하루였던 휴가를 맞아 보고 싶은 뮤지컬을 관람하시던 미용실 원장님은 내가 보낸 응급실 문의 톡 하나에 공연장을 빠져나와 D병원 부장님께 늦은 밤 연락을 보냈고 내가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실을 갈 수 있게 해주셨다. 가족도 절친도 아닌 동네 어른이었던 원장님의 그 따뜻한 마음은 평생 잊지 못할 감사와 부채가 되었다. 적당한 부채는 갚는 재미가 있다. 감사의 장문의 톡과 함께 다음날 미용실로 맛있는 차와 케잌을 보내드리며 혀끝으로 느낄 그들의 달달함에 (+)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내 따뜻한 온기를 실어보냈다.
그들의 일상에 힘을 주길 간절히 응원하면서. 아픈 만큼 강해질 나를 응원하면서, Believe you can! 그날 온종일 마야의 <나를 외치다>를 들었다.
절대로 약해지면 안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