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계절

(삼중음성 유방암 이야기)

by 코스모스처럼

가을

11월: 순항, 모든 것 감사

항암을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주로 머물러야 하는 곳은 암병원이 되었다. 버스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암병원이 목적지가 되고, 수납처에서 수납을 완료하고 항암 병동이 열리길 기다린다.

조직검사로부터 9주를 훌쩍 넘기고 11월 12일에 시작한 1차 항암은 세 가지 항암제와 여러 가지 부작용 약을 먹거나 투여하는 첫 경험이었다. ‘이 많은 약을 내 몸이 버텨낼 수 있을까.’

5인실이나 7인실 중 무작위로 당첨된 내 이름 푯말이 있는 침대에 간단하게 가져온 이불을 펼치고 내 차례가 되어 커튼을 젖히고 들어올 간호사님을 기다리는 것이 항암의 첫 번째 순서였다. “처음이시네요?” 연차가 꽤 있어 보이는 간호사님이 들어오셔서 주사를 맞으며 경험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고 그런 증상이 보이면 뒤에 있는 비상 버튼을 누르라고 말씀하셨다. 블로그를 통해서 미리 읽고 시뮬레이션 해보았던 병실이지만 모든 것이 낯설다. 옆에 분은 오늘이 항암 마지막인가 보다. 간호사님이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건네신다.

‘너무 부럽다,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괜스레 내가 눈물이 고인다. 무슨 암인지, 몇 차례에 걸쳐서 고생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첫발을 내딛는 나의 오늘부터 같은 경험으로 견뎌오셨을 시간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 나는 과연 16회차라는 긴 항암의 회차 동안 얼마나 많은 부작용과 싸우며 또 얼마나 슬프고 아픈 외로움을 겪게 될까, 막막하고 두려웠다. 1차는 케모포트를 하지 않고 혈관으로 항암을 진행했다. 세 가지 항암제를 다 맞는 시간은 4시간. 낮 병동 입원 시간은 6시간인데 왜인지 그랬다. 약이 올라오길 기다리는데 한 시간, 간호사님들이 병동을 정리하는데 1시간을 쓰는 것 같았다. 혈관이 약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평소 아미노산 링거라도 빨리 맞을 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기에, 항암제를 천천히 맞고 싶었던 나는 계속 “천천히 놔주세요”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원래 이렇게 맞는 거예요”였다. ‘그러니까요 그렇겠지만 그런 줄 알지만 죄송하지만, 예외 환자도 있으니 천천히 좀 놔 주시라구요 무섭다구요.’ 환자인 나는 마음에 있는 말을 밖으로 내뱉을 용기는 없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속도로 주르륵 내려오는 물방울 줄기를 보면서 내내 불안했다. 역시나! 세 번째 항암제인 카보플라틴을 조금 남겨 두고는 피가 역류 되었다. 긴급 벨을 눌러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고 테이블까지 가지고 와서 1인 회사를 차리고 앉은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내 맘같이 빠르지 않았다. 흑, 나 너무 아픈데. 이게 혈관통이구나! 혈관통이 항암 환자가 겪는 3대 통증 중 하나라는 블로그를 본 적이 있었다. 혈관이 터지기 직전인 것 같은 순간에 간호사님이 들어오셨다. 남편은 그 타이밍에 진지하게 물었다. “이런 통증이 왜 생기는 거죠?” 마음의 소리, 여보, 지금 당신의 궁금증을 느릿느릿 물어볼 타이밍이 아니라고. 역시나 내 남편. 나는 그냥 또박또박 정확하게 소리를 냈다. “간호사님, 지금 이거 빨 리 빼 주 세 요.”

휴, 남은 항암제를 다 맞지 못하고 버려야 했지만 내 혈관은 지켰다. 4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꽂은 혈관 자리에 검은 점 같은 자리 표시가 남아 있으니, 그날 얼마나 아팠는지 가늠할 수 있는 요량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엔 인공 혈관인 케모포트 시술은 선택이 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케모포트 하실 거죠?”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고 2차 항암을 하는 날, 케모포트 시술을 준비했다. 아침 8시에 하기로 예약되어 있었지만 대기 시간만 3시간 30분이 걸렸다. 다른 환자들은 다 항암에 들어갔지만 나는 무한 대기 그리고 마침내 베드가 올라와서 이제 시술실로 이동을 하는지 했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귀로 들리는 말들로 보아 CT나 검사를 앞두고 부작용이나 특이 케이스의 환자들만 모아 놓은 공간으로 옮겨져 놓은 것 같았다.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눈을 감고 꽤 오랫동안 그 장소에 머물러야 했다. 제발 제발 좀 빨리 해주세요, 마음으로만 되뇌이는 말만 여러번 삼키면서 말이다. 이상하게 S병원이 너무 커서인지 혹은 내가 너무 불쌍한 을인 암환자가 되었다고 느껴져서인지, S병원 환자가 된 이후부터는 두 입술을 떼고 말을 내뱉는 것이 힘들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눈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네” 정도의 답변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친절한 여자 선생님이 오셔서 시술방으로 들어가서 수술 침대로 옮겨 눕는 과정까지 진행해 주셨고 시술을 담당하시는 분은 남자 선생님 한 분이신 것 같았다. 나는 무서우면 눈을 감아버리는 버릇이 있어서 침대를 옮길 때 말고는 계속 눈을 감고 있는 바람에 정확하게 본 것은 없지만 아마도 바퀴 달린 침대를 이리저리 옮기시는 것이 영상이 보이는 기계가 있는 것도 같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파란색 두꺼운 PVC처럼 느껴지는 포대가 씌워지고 얼굴도 덮여진 채로 케모포트를 해야 하는 자리만 열어서 시술이 진행되었다. 필요가 있어서겠지만 목부터 가슴 어깨까지 정말 넓은 부위에 소독약을 바르셨다. 평소 그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역한 냄새로 느껴졌다. 생각보다 마취와 통증은 참을만했다. 약간 독특했던 것은 선생님이 계속 콧노래를 부르면서 시술을 하셨다는 것이다. 본인의 루틴인지 혹시 긴장을 푸는 틱의 한 종류인지, 어쨌든 알 수 없는 콧노래가 이어졌다. 시술을 마치고 다시 이동 침대로 옮겨져 어딘지 모를 복도 한 켠에 침대가 정차했다. MR처럼 들리는 똑같은 말, “기다리세요.” 그리고 다시 기다림이 이어졌다. 눈물이 또르륵 흘러나왔다. 사실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흐느낌을 느끼는 순간 인공 혈관을 단 목 부분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내 마음껏 울지도 못하겠구나.’ 케모포트를 하고 나서 목이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는지, 근육이 얼마나 당기는 부위인지 알게 되었다. 일주일은 참 불편한 시간이 이어졌다. 시술한 자리를 하루 한 번 소독도 해야 했고, 샤워 전 방수 테이프를 한번 더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아야 했다. 무엇보다 묵직한 플라스틱 하나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불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기는 느낌이 들어서 왼쪽 오른쪽으로 눕지도 못한 채 바로 누운 자세로 잠을 자려니 또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눈물도 마음도 흘려보내자, 조금씩 조금씩.’

다행히 2차 항암 후부터는 두 달을 기다리며 꽤 크게 부었던 원발암 부위가 흔적도 없이 가라앉고 손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케모포트만 없다면 여기서 치료를 멈추고 잠수를 타고 싶은 망망함이었다. 농담으로 같은 내용을 내뱉으면 언제나 T인 첫 딸이 엄마 마음대로 치료를 결정하면 안된다며 경고를 날려주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멈출 자신도 없다고 얘야.’ 내가 받아야 할 항암은 매주 12회차를 먼저 진행하는 것이어서 1차는 혈관통의 고개를 2차는 케모포트의 고개를 넘겼다. 항암 다음날에는 식은땀이 나서 줄곧 누워서 쉬어주었고 2차 때는 발등과 손등부터 시작된 빨간 작은 점이 어깨와 허벅지까지 번지며 발진이 나서 동네 의원을 일주일 동안 두 번 가서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주었다. 부작용을 빨리 알아차리고 치료를 받는 것이 항암 환자의 몫이라는 걸 처음 경험했다. 밤새 가려워서 참지 못하고 긁은 후부터는 손도 발도 벗겨지기 시작했는데 그건 내가 먼저 받는 TC항암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내 손은 계속해서 벗겨지고 따갑고 다시 새살이 덮이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지문 인식이 되지 않는 불편함은 있지만 이정도는 거뜬히 참을 수 있잖아!

여성으로서 항암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민머리가 되는 것에 대한 절망감일 것이다. 나도 그것이 두려워서 긴 중단발을 짧은 숏단발로 바꾼지 딱 열흘 째 되는 날, 머리를 감는데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응 뭐지?’ 첫 날은 평소 같지 않게 모발이 좀 거친 느낌이 들었는데, 둘째 날은 샴푸를 하는데 뭉쳐졌던 머리가 쑤욱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제 빠지는 날이 되었구나.’ 타올에도 드라이 할때도 꽤 많은 양이 뭉치로 쑥쑥 빠졌다. 결국 3차 항암을 하는 11월 26일, S병원 지하에 있는 미용실에 들러서 쉐이빙을 했다. 환자를 배려하기 위해 작은 블라인드를 설치해주셨지만 병원이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편이 곁으로 다가왔다. “오빠 저기 가 있어요, 있다 부를께요. 나 안봤으면 좋겠어. 나도 내 모습 안보고 싶어 지금.” 알콩달콩한 것인지 휘둥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틈을 타서, 의자에 앉자마자 능숙한 미용실 선생님이 면도기로 뒷머리부터 공사(?)를 시작하셨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뒷머리부터 밀릴 줄은 몰랐던 나는, 항상 그렇듯 겁을 먹으면 눈이 감겼다. 정말 순식간에, 조금도 다치지 않도록 아주 잘 밀어주셨다. “눈 떠보세요. 두상이 참 예뻐요.” 누구에게나 하실 멘트를 날리셨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생각보다 낯설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남편이 그제야 옆으로 다가오더니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오늘도 참 눈물 없는 아내, 너무 슬플 때는 오히려 눈물이 않난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을 때는 빨리 포기하는 것이 이미 연습 되어 있어서일까. 아무튼 1센티미터도 남지 않은 까까머리를 선생님이 정성껏 씻고 말려주셨다. 내 두상이 이렇게 생겼구나, 참 동그랗다. 그날부터 나는 내 미모는 두상에 다 몰빵 되었다며, 비니를 쓰고 친구들을 만날 때 마다 넋두리를 먼저 시작했다. 그러면 내 마음이 걱정되던 친구들도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쉐이빙을 빨리해서인지 항암 3대 고통 중 하나라는 모근통을 나는 겪지 않았다. 머리를 잡고 뽑는 느낌이라고 해서 무서웠는데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미리 준비한 부드러운 오가닉 회색 면비니를 쓰고 집에 돌아오자 두 딸들이 엄마 진짜 동글이라며 자신들은 아빠를 닮아 길쭉한데 엄마 동그래서 너무 좋겠다고 너스레를 먼저 시작한다. 고맙다.

둘째가 다가와 비니를 벗어보라고 해서 훌러덩 웃으며 벗었는데 그만, 둘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가 슬플까봐 크게 울진 못하고 “그게 뭐야~”하면서 하얀 뿌리만 남은 내 초라한 모습에 세상 쓸쓸한 눈물을 흘리는 둘째에게 “엄마가 미안해, 너무 미안해”라고 말하며 나도 눈물이 날뻔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둘째가 초등학교 1학년을 입학했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갑상선 항진증 약을 먹으며 부었는지 쪘는지 모를 만큼 날씬했던 몸이 뚱뚱해졌고, 머리카락은 흰머리로 덮여버린 젊지만 늙어 보이는 30대 엄마의 모습이었다. 몸매를 숨기기 위해 와이드 팬츠에 코트를 입고 공개수업을 갔던 날, 둘째는 엄마만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었다며 예쁘지 않은 엄마 때문에 울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보들보들한 민머리를 상상했는데 갑상선으로 인해 하얀 뿌리만 남아 까끌까끌한 엄마 머리를 보는 둘째의 표정이 그때와 교차 되는 것 같았다. “우리 아기한테 엄마 계속 미안하네, 엄마 얼른 치료받고 나을께,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뱉어내는 엄마한테 미안했는지 그날 이후로 둘째는 다시 울지 않았다. 그리고 곧 눈썹까지 다 빠지고 매끌매끌 민둥산이 되어 반짝임만 남은 엄마 머리를 마주칠 때마다 자주 문질러주면서 “엄마 두상 진~짜 이쁘다” 계속 같은 말을 남겼다. 이쁘긴 니가 이쁘지. 백일까지 내 팔에서 바닥으로 내려놓지 못하게 매달린 탓에 누구보다 묶음 머리가 예쁜 두상은 둘째가 가지고 있었다.

이제 큰 산은 다 넘었다. 내가 항암을 하고 싶지 않았던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는 구토였고 다른 하나는 민머리였는데, 다행히 구토는 내가 잘 다스릴 수 있었고 민머리는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삶이었다. 11월, 늦가을을 즐기기엔 너무 빨리 다가온 겨울이 내 가슴을 서늘하게 했지만, 궂은 날씨에도 나의 항암은 순항을 알렸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나는 파도를 탔고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배를 타야 한다. 모든 것은 이제 신의 영역이다. 고치시든 살리시든 견디게 하시든, 나는 당신께 매달릴 것이다. 날 좀 먼저 봐달라고, 너무 무섭다고 우는 밤도 있을 것이다. 테토녀에게도 밤의 눈물은 허용되지 않겠는가. 아이들이 자고 남편이 잠들면, 그때라도 많이 울자. 애써 삼킨 눈물은 병이 된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삼키지 말고 울고 또 울어보자. 파도가 낮은 날은 낮은 날대로, 바람이 부는 날은 돛대를 잡은 채 내 감정이 자주 일렁일 테지만 감정을 주신 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감사하는 것, 그것이 순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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