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음성 유방암 이야기)
가을
10월: 기다림의 연속 (그리고 만남들)
구월 구일에 조직검사를 하고 십이일에 악성 종양 확정, 십오일에 삼중음성 유방암 ki지수 60% 확정이었지만 그때는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 병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치료가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릴 시간도, 나와 함께 고생할 가족들을 위해 가정 살림을 보다 간편하게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9월 15일 오전 9시가 지나 처음으로 전화를 건 S병원의 진료 예약이 바로 잡혔다. 너무나 운이 좋게. 그 운이 너무 감사해서 다른 병원은 전화를 돌려보지도 않고 9월 24일에 진료를 갔다. 풍채가 좋고 낮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본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선생님을 믿고 가도 되겠다는 호감이 들었다. 나도 참 F다. 고작 1분 남짓한 그 첫인상이 뭐라고, 그렇게 내 마음이 S병원에 완전히 기울었던 것일까. 다른 병원은 아예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았고, 여기저기 병원을 비교할 시간에 환경을 정리하고 추석 때 만날 부모님께 ‘암’이라는 한 단어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보다 먼저, 막내 동생이 암이라는 걸 알게 된 언니와 형부들은 가족이 암인 경우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많이 마음 아파했고 나보다 더 막막해하는 것 같았다. 진료를 기다리며 먼저 읽은 책에 그런 내용이 있긴 했다. 암 환자인 아내는 자신의 병과 싸우느라 모든 긍정 에너지를 다 끌어모아 씩씩하게 행진하는데, 곁사람으로 머물러야 하는 보호자인 남편이 오히려 우울한 마음을 겪으며 ‘저 사람 어떻게 저렇게 씩씩할 수가 있지?’하고 되묻는 시간이었다고. 진단 후 본격적인 치료가 들어가기까지 남편도 같은 모습이었다. 나보다 더 힘없어 보이기도 하고 눈시울이 자주 붉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결혼과 함께 내 힘에 부치는 고개들을 너무 여러 번 겪기도 했고 오름 같은 고개들을 넘다가 큰 산을 마주하고는 겨우겨우 미끄러져 가며 5년이라는 시간을 지났는데 ‘암’이라는 불편한 산이 또 덜컹 내 앞에 버티고 있음을 마주했을 뿐이었다. 정확하게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면, 암 진단이 내 생애 최고의 아픔은 아니었다. (...)
추석을 맞아 먼저 내려간 시댁에서는 처음 보는 시어머니의 눈물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이구 야야~” 결혼 후 줄곧 야야로 불리웠던 내 이름은 그날도 야야. 어머니는 내가 결혼할 때 오십 대 초반, 지금은 칠십 대 초반이니 아주 젊은 시어머니지만 항상 내 이름은 –애미 혹은 야야였다. 장손부의 역할을 십오 년간 잘 해내고 시조부모님 세 분 장례를 앞장서서 마친 나, 그리고 내게 남은 건 맏며느리라는 직함인데 20대에 결혼을 해서 21년을 매우 어른스럽게 시댁 살이를 해 온다는게 참 힘든 시간이 많았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니 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서네가 오고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친정 엄마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갔다. 올해 여든 두 살의 친정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육 년을 잘 살아주셔서 감사하지만 40kg이 되지 않는 체중에 몸이 연약한지라 내가 암 진단을 받고 가장 많이 울었던 것 중 하나가 엄마를 돌봐드리지 못하는 시간 동안 엄마가 매우 늙으시거나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슬픔이었다. 이렇듯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에 대한 마음이 다르니 며느리는 며느리고, 딸은 딸이다. 며느리가 딸이 될 순 없는 애끓는 피가 있다.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여느 때처럼 농담과 애교를 맡은 막내로서의 시간만 보내다가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저녁이 다가왔다. 남편이 엄마 앞에 앉아서 천천히 운을 띄웠다. “진이가 많이 아파요 어머니~”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아마 잘 정리되어 진행되었을 것이고 나는 엄마의 눈물이 떨어질까 걱정하며 엄마 무릎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내 씩씩함이 엄마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엄마도 나처럼 씩씩하고 담담하게 남편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설마 엄마가 잘 못 들은 건 아니겠지’라는 걱정과 달리 엄마의 배웅 기도에 나의 치료를 위한 간절함을 담아주셨다. 자매들의 애달픈 배웅을 받으며 비가 내리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 나는 치료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블로그를 통해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항암을 16회, 6개월 동안 진행할 것이다. 대치동 외과를 통해 이미 최소 2기 이상이라는 진단을 받았기에 그 진단과 비슷한 치료의 경우들을 블로그를 통해 찾아보고 노트에 정리해두었다. 연휴 다음날 찾은 유방외과에서 선항암을 결정 짓고 혈종내과의 일정을 기다려야 했다. 암 진단명부터 병원 진료과까지 모든 것이 처음이니, 왜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블로그의 정보와 S병원의 진료 절차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조직검사로부터 한 달은 내 마음과 환경의 준비를 위해 기다렸지만 또 다시 보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유투브에서는 조직검사 후 최대한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정보가 쏟아졌고 나는 조직검사를 오른쪽 왼쪽 림프까지 세 곳을 했으니 그 부분들이 붓고 아프기까지 했다. 급한 마음에 병원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학회에 가신 선생님이 돌아오셔야만 진료가 가능하다는 응답 뿐이었다. ‘내가 그 선생님을 지명한 것도 아니고 다른 선생님들도 많이 계신데 왜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걸까.’ 집 근처 다른 병원으로 병원을 옮겨도 충분한 시점이었기에 여러 번 고민을 했지만, 공대녀로 나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심플한 인생을 살아와서인지 복잡해지는 게 싫었다. ‘그냥 처음 정한 곳에서 쭉’ 이런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앞으로의 내 치료에 얼만큼의 유익이 될 진 모르겠지만 그때 써 둔 일기장에는 ‘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내게 유익만 남겨주기를’이라는 문장이 쓰여져 있다. ‘나 그때 너무 좌절하진 않았구나, 나 참 의젓했네.’ 뒤돌아보니 기특한 일기이고 그래서 오늘도 잘 기다려 준 나에게 감사하다. 보름이 지나 10월 말에 만난 선생님은 내게 임상을 권하셨고 내가 본인이 찾던 케이스의 환자라는 게 내가 기다려야 했던 이유였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임상 확정까지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마음 내키지 않으면 병원을 옮기시라며 “안녕히 가세요”하는 쿨한 인사를 날리셨다.
‘환자가 두 달을 기다렸는데 내 말 안들을거면 잘가라고?’
이 병원의 명성이 고작 이 정도였냐는 생각과 앞으로 진행될 PET-CT에서 전이가 나오면 당신은 4기 환자이니, 알아서 결정하라는 마지막 말이 비수에 꽂혀서 바보처럼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와서 복도에 있는 정답지 않게 차가운 파란 의자에 앉아 그날 참 많이 울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따뜻한 의사가 환자를 다독이고 환자 앞에서는 감히 그 단어를 꺼낼 수 없어서 보호자만 남기고 나가 있으라는 배려가 대부분이던데, 현실은 참 냉정했다. 남편은 붉어진 얼굴로 참지 못하겠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씩씩 거렸고 오히려 내가 남편을 진정시켜야 했다. 두 달의 기다림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이 병원에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게 내 쿨(?)한 생각이었다. 다행히(?) 추가로 진행된 검사에서 임상의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그로부터 2주 후 치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조직 검사부터 치료를 시작하기까지 훌쩍 두 달을 넘긴 나에게, 친절한 유투브 교수님들이 “조직검사 후 두 달이 넘어가면 생존율의 차이가 분명히 납니다” 라는 설명를 전해줄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복잡한 과정보다는 기다림이 수월했는지 나도 그 시간을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걸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환자가 치료받고 싶은 시간 혹은 치료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 의사가 오케이 출발 사인을 줄 때까지. 그렇게 내가 기다린 시간은 9주를 훌쩍 넘겨서였다. 시간이 지나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돌아보는 나의 마음 한 켠이 아직도 애달프다. 하지만 어쩌랴, 나도 병원도 같은 방향이었던 것을. 다만 바라기는 6개월 전 일기장에 쓰였던 문구처럼 이 기다림의 시간이 나에게 유익만을 남겨주길 바랄 뿐이다. 진상 환자나 손님에 대한 권리권을 요구한다면 착한 환자나 손님에 대한 친절의 의무도 이행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간절한 마음이 내려와 있는 암환자에겐 상대방에게 바라는 친절보다는 나 스스로 나를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다. 치유의 손이 닿기 전에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보살피지 않으면 너무 큰 상처를 받게 된다.
다행히도 기다림이 길어진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친구들이 집으로 또 가까운 영등포역으로 찾아와 주었다. 플랫폼에서부터 눈물을 쏟는 십수 년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bebe best friends. 학생 때의 앳된 마음으로 여전히 서로를 대하며 짧은 시간 동안 울고 웃으며 다시 보자는 인사를 건네는 그들은, 나를 대신해서 참 많이 울어주었다. “교회 같이 가자”고 전도할 때는 시간이 없다던 동네 동생은 언니 위해서 기도하러 왔다며 나도 일어나기 힘든 1부 예배를 다녀가면서 인증샷을 남겨 주었고, 치료 전에 잘 먹어야 한다며 집 앞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공수한 김치들과 과일 박스가 쌓인 날이 많았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 당신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지금도 나는 눈물이 난다오!
나는 항암 12회차를 마치고 지난 6개월을 정리하는 지금도 참 밝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밝음은 유전이기도 하고 20대부터 단순하게 살아온 수학전공 공대녀의 좋은 습관이기도 하다.
하나하나씩 풀면서 ‘다음 문제는 또 풀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내일의 치료를 기다린다. 긴 시간을 잘 버텨주는 고마운 내 몸과 영혼을 가장 사랑하면서, 함께 하는 남편과 두 딸이 이전보다 더 밝고 단단해지기를 기도한다. 내면의 단단함, 그 하나의 훈련을 열심히 받고 있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