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음성 유방암 이야기)
가을
9월: 잘 받아들이는 마음
큰 딸의 입시를 마친 2024년 겨울, 두어 번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낀 날이 있었다. 평소의 심장 조임과는 다른 명치 통증 같은 느낌이었는데 꽤 묵직하고 오랫동안 아파서 자다가 일어나서 명치를 둥글게 문지르던 밤이 두어 번 있었다. 그 후 평소처럼 마사지를 간 날, 누워서 받던 마사지가 너무 아파서 명치를 만졌을 때 이미 작은 돌기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뭐지? 노화로 인해서 뼈가 나온 건가?.’ 참 무식하게도 나 스스로 내린 진단이 그랬고, 그즈음부터 어깨가 자주 아팠던 것이 유방암의 전조증상이었다는 것은 최근 서정희씨의 고백으로 알게 되었다. ‘나도 그랬는데.’
독박 육아로 잘 키운 큰딸이 무난하게 대학에 입학했고, 나는 전업으로 하던 수학 강사를 파트 타임으로 하면서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영어 수업과 독서 커뮤니티를 시작했고 취업이든 여행이든 마음껏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혼 20년 만에 되찾은 오롯한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름 끝 무렵 8월, 2학기 개강을 시작하고 2주차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 결절인가.’ 십 년 전에도 목소리가 한 달 정도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고 당장 매주 강의가 잡혀 있었기에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일단 처방전은 인후염약, 하지만 인후염이라고 하기엔 기침 콧물도 없고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의아하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한주 휴가를 내고 그 다음주도 인후염 치료를 이어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뭔가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긴장감을 주면서, 오랜 시간 방치(?)해 둔 가슴 쪽 돌기가 마음에 걸렸다. 감히 암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사촌에 고모까지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오간 적이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B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 선생님은 촉진과 함께 유방암의 가능성을 말씀하셨다. “뼈 아닐까요 선생님?” 나의 물음이 너무 어린아이 같았는지,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암’이라는 단어에 내 넋이 잠깐 멍을 때리는 것이 안쓰러우셨는지, 일반적이지 않게 의사 선생님께서 직접 예약 대기 사이에 내 초음파 자리를 다음날로 잡아주셨다. 다음 날 초음파 선생님께서는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뭔가 이상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혹시 암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남편과 B병원을 찾았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초음파에서 보이는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모양으로 보아 암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잡으시고 조직 검사를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의외로 담담한 마음이었다. ‘암’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삶의 버거움을 계속적으로 느끼는 지난 몇 년을 보내왔고 어쩌면 또 그만큼의 무게로 내 삶의 짐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같이 갔던 남편이 격앙된 어조로 선생님께 말했다. “암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단정하시죠?”
“아니면 아닌 거구요. 그럼 다행이겠죠” 두 남자의 주인공을 뺀 짧은 언쟁을 뒤로하고 B병원에서 의뢰서를 받아서 대치동 외과에서 조직 검사를 진행했다. 탕탕탕, 처음이라 꽤 아프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보다 차가운 돌로 10분을 지혈하고 누운 차가운 침대에서 나는 그간 내게 다가왔던 아픈 상처들을 되감아보며 쓸쓸하게 눈시울을 붉혔다. ‘인생 참 아프고 씁쓸하구나.’
화요일에 진행한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금요일에 다시 방문했을 때 앞에 먼저 오신 모녀분들이 암 진단에 눈물 짓는 모습을 보는 것이 복선처럼 느껴졌다. 설마의 1%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의사 선생님의 머뭇거림 뒤에 전달받은 내용은 최소 2기 이상의 유방암이었다. 그리고 유방암은 타입이 중요하기에 어떤 유방암인지를 며칠 더 기다려서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이럴 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눈물을 흘리던데, 나는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예약자 성함을 미리 받아두었던 것처럼 덤덤했고 마음도 전혀 울적하지 않았다. 같이 간 남편이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에 나는 갑상선과 유방, 림프 초음파를 몇 군데 더 진행하고 왼쪽 가슴과 겨드랑이에 의심되는 멍울에 대한 조직검사까지 30여분 동안 차분하게 받았다. 오늘부터 산정특례 적용이라는 간호사들의 말에 따라 산정특례 5%의 혜택을 지불하고는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5시에 병원 결과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두 딸은 밤 9시 이후에 돌아온 엄마를 최대한 담담하게 맞이해주었다. 남편은 딸들과 나를 둥글게 앉히고는 두 딸을 번갈아보면서 떨어지지 않는 말을 시작했다. “얘들아 엄마가 암이래. 최소 2기인데 그건 좀 있어봐야 알 것 같고 어쨌든 이제부터는 우리가 엄마를 잘 돌봐줘야 해~.” 그 뒷말이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첫 마디에 두 딸은 눈물을 터트렸고 “엄마 미안해요”라는 말을 번갈아 가며 건네었다. 왜 미안해, 너네가 왜. 입 밖으로 뱉어버리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두 딸의 손을 잡고 “엄마는 괜찮아”라는 말만 여러 번 반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 그만 자자고 아이들을 다독이고는 내일 마지막으로 출근해야 할 토요일 강의를 다시 한번 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잠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마지막 출근, 2주 전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7년 만에 처음으로 결강을 해야 했던 나를 이해해 주시면서 나의 갑작스러운 휴직도 잘 받아주신 사무실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정든 아이들, 강의실, 매주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나의 수업계획안 그리고 내가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했던 교정과 선생님들도 잠시 안녕, 곧 돌아 올께요! 내 마음의 인사와 함께 미소를 지으며 한분 한분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살짝 일렁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런 저런 정보를 찾아보던 나는 블로그 한편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때 내가 보았던 블로그는 엄마의 도시락과 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병원을 오가는 이야기였는데, 한 번도 친정엄마와 언니들의 도움을 받은 적 없이 서울살이와 결혼과 육아를 독립적으로 해왔던 나였기에 그 장면이 너무나 부러웠고 지금 나의 상황이, 내가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악착 같이 잘해왔니, 막내인데 친정식구들에 기대지도 않고 그렇게 언제나 씩씩하기만 했니. 나도 그런 보호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같은 동경의 외로움이었다. ‘어쩔수 없잖아, 이미 내게 찾아온 손님도 오롯이 내 몫인 것을. 차근차근 하나씩 잘 풀어나가자. 나의 가족 사랑스러운 두 딸을 위해서 잘 치료받고 건강한 엄마가 되자.’ 그렇게 마음을 되뇌이면서 천천히 내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한 단어, 겨우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진 그 단어를 꼭 품고 받아들였다. 누구의 탓도 아닌, 왜 하필 나에게 왔냐는 분노도 아닌, 좀 쓸쓸하고 아픈 마음으로만 잘 받아들였다. 며칠 후 걸려 온 전화에서 나의 유방암 타입이 유방암 중 가장 예후가 좋지 못한 삼중음성 유방암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그날 원 없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웠던 건 왼쪽과 겨드랑이에 추가로 검사한 조직검사에서 악성이 발견되지 않았고 브라카 유전 검사는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래 우리 엄마랑 외할머니도 건강하셨다고. 위로 줄줄이 있는 언니들도 폐경도 없이 십 년은 젊은 외모를 간직하며 자신들의 직업을 즐기는 젊은 유전으로만 가득했던 우리 집에 그렇게 막내인 내가 유일하게 암을 끌어안은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적어도 지금 내 딸들에게 유전이 있다고 말하는 엄마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자신 없지만 막막하지만 받아들이자 나의 인생 한편을. 이 한편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기약할 수 없지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신이 끌어가시는 이야기.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려고 아픔 속에서 지혜와 감사를 발견하게 하시려고 시작하신 높낮이가 분명히 들릴 선명한 연주가 시작된 셈이다. 때론 구슬프고 연주하고 싶지 않은 도돌이표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 내일에 미리 겁먹지 말고 딱 오늘만큼만 행복하게 살자. 소중하게 살자. 정성스럽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