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계절

(삼중음성 유방암 이야기)

by 코스모스처럼

프롤로그: 미리 써두는 유언장

나는 물음표가 생길 땐 언제든 책에서 해답을 찾길 좋아한다. 암 진단을 받고도 참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 김의신 박사님이 쓰신 <암에 지는 사람, 암을 이기는 사람>에 미국에서는 유언장을 미리 써두고 나이가 들면서 여러 번 고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흔히 드라마에서 보는 유산 분배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때 마다 혹은 뒤돌아보니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인생의 제 일 가치에 대해서 부모로서 아내로서 가족이나 친구로서 남기고 싶은 말을 적는 그런 유언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 암 진단을 받고 비록 흔하다는 유방암이지만 그중 다소 생존율이 낮은 삼중음성 유방암 그것도 3기 진단을 받고는 죽음이 내 앞에 가까이 느껴졌고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환경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퇴근마다 번갈아 가면서 멋을 내던 금반지와 귀걸이를 정리하고 전월세로 여덟 번째 집에서 살고 있는 지금, 아이들에게 더 이상 이사 다니지 않아도 될 집을 사야겠다는 조급함도 들었다. 낡고 닳은 물건이나 손이 가지 않은 채 관심 밖이 되어 쌓여있는 짐들도 정리하고 아이들을 위한 보험도 든든히 들었다. 적어도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아니 절대 큰 병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하는 심정으로 항암을 기다리는 두 달 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12회의 항암이 4개월 만에 마쳤다. 그리고 중간 검사 후 다시 3개월 4회차 항암을 더 진행하게 된다. 중간 검사와 함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주. 그 시간 동안 내가 겪은 전반부의 이야기를 한번 잘 정리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있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해 두고 싶다. 꼭 질병이 아니라도 복잡한 세상에서의 ‘오늘’은 언제나 유한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병원을 오가는 길에 자주 했었던 생각 중 하나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행복감이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다소 과장되게 들릴 수 있지만 정말 그랬다. 암밍아웃을 했을 때 참 많은 친구들이 찾아왔다. 십 년을 넘게 못 봤던 고등학교 대학교 베프들이 찾아와 나 대신 울어주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고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살아왔는지,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것을 함께 지켜보는 두 딸과 남편이 함께 행복해 했다. 그들에게도 엄마와 아내가 따뜻한 마음을 받고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는 듯 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 그리고 다시 되새겨본다. 나눈 것은 잊어버리고 받은 것은 감사히 기억하자!

그들의 기쁨을 나누어 두 배로 기뻐해 주고 슬픔은 반으로 나눠 함께 울어주자.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마지막을 마주했을 때 후회 없음에 미련 없는 눈물을 흘리자.

항암 베드에 누울 때마다 몇 번을 되뇌었던 유언장의 스토리들이 막상 글을 써 내려가려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눈물을 또르륵 흘릴 만큼 슬펐던 문장들도 말이다. 만 46세, 두 딸의 젊은 엄마이자 결혼 21년차 주부인 내가, 내 삶의 가장 희망찼던 순간에 찾아온 암을 안고서 언제일지 알 수 없는 그날을 생각하며 남기고 싶은 유언은 무엇일까. 막막하기도 하고 뚜렷하지 않지만, 그냥 지금의 나로서 내 마음의 진솔함을 천천히 표현해 보려 한다. 결국 여러 번 고쳐 쓸 것을 기약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께

안녕하세요 당신:) 오늘은 왠지 당신이라는 격식있지만 다정하고 로맨틱한 호칭을 쓰고 싶네요. 결혼을 하고는 여보라고 불렀고, 아이를 낳고는 –아빠라고 불렀던 건 시어머니의 요청이었고, 5년 전부터 오빠라고 불러달라는 당신의 요청에 따라 아빠의 모음 하나만 옮겨서 오빠로 부르는 용기를 내기가 참 어려웠지만(두 딸도 갑작스러운 호칭에 한 달은 족히 웃으며 어색해 했지만) 많이 늦은 나이에 입에 붙인 호칭이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서 부모님 앞에서도 오빠라고 부르는 실수(?)를 하곤 하는 우리, 이렇게 다정한 우리의 나이는 50과 46. 병원을 오가며 죽음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직은 아까운 나이라 느끼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스무 살,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당신은 다른 과 예비역 선배였죠. 어디서 샀는지 알 수 없는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낚시 조끼를 입고 구멍 난 양말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온 아빠 발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내밀고 하얀 웃음을 날리는 당신이 내 이상형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다른 공대 선배들과 다르게 좀처럼 내게 말을 걸지 못하고 가끔 귀여운 질투를 보이며 눈물을 짓기도 하는 당신이 참 순수해 보였답니다. 결혼 후 당신이 내가 상상한 순애보를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이 실망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적어도 나에 대한 마음만은 애틋하고 영원한 첫사랑일 것은 분명한 사실일 거예요. 친한 어플도 많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당신이기에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 24시간을 괴롭게 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됩니다. 예전엔 그런 당신이 참 미웠지만 내가 만약 당신보다 먼저 죽는다면, 당신의 외로움이 덜하기를 기도하기에 지금은 다행이라 여기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쩌다 문득,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장소에 가거나 추억이 있는 음악을 들을 때, 한 번씩 당신도 눈물짓겠죠. 자주는 아니더라도 내가 기억되는 그 순간만큼은 사무치게 나를 그리워해 주세요. 천국에서 당신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죽음 이후에 보내주는 당신의 눈물이 나의 상처를 조금씩 치료해 줄지도 모르니까요.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7년이 흘러 보았던 영화 코코에서 잊혀지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코코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이미 천국에 간 사람에게도 참 슬픈 일인 것 같아요. 그러니 매일 울진 못하더라도 가끔은 마음껏 울며 살아서 곁에서 해주지 못한 말들을 나에게 들려주세요. 그런 당신을 바라보면서 나도 당신을 껴안으며 당신의 남은 인생을 축복할께요. 당신에게 남기고 싶은 유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딱 두 가지네요. 간단하지만 어려운 숙제일 수도 있을 거예요.

첫 번째 부탁은, 당신의 몸과 영혼을 잘 지켜주세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을 두 딸과 함께 공유했을 때, 두 딸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젊고 건강한 아빠가 자신들 곁에 있다는 것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부디 당신을 위해서도 물론이거니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딸을 위해서 건강한 몸을 잘 지켜주세요. 특히 햄버거와 콜라, 식사마다 마시는 콜라는 한 달에 한 번만 마시면 좋겠어요. 커피도 좀 줄이구요!
영혼에 대해서는 당신이 잘 알거라 믿습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나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울며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연약함이 아니라 단번에 돌이킬 수 있는 사람, 바울과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부분은 오롯이 당신의 골방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디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정의 울타리를 잘 지켜주세요. 그래서 두 딸이 마음껏 안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아빠로 남은 오십을 살아가 주길 간절히 부탁합니다!

두 번째 부탁은, 당신이 살면서 재혼이나 동거를 원하게 된다면 꼭 두 딸과 상의해 주세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부모의 이혼과 재혼이 상처가 된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가정을 잘 지킨 이유이기도 하죠.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커도 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세상에서 자신들을 가장 사랑한 아빠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엄마의 빈자리에 눈물 짓지 않도록 가능하다면 아주 오랫동안 두 딸만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문득 좋은 반려자가 찾아온다면 두 딸과 상의해 주세요. 아빠에게 친구가 생겨도 되겠냐고.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천국에서 안돼~라고 가슴을 움켜잡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착한 두 딸은 서로 의지한 채 아빠를 이해하려 노력할 거예요. ‘모르겠지’ 하고 숨기는 마음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마음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아프고 벅차긴 해도 상처를 깊이 주진 않는 것 같아요. 숨기는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받는 상처가 너무 크니까요.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 당신은 우리 딸들의 유일한 가족이고 부모일테니 내가 지어야 할 짐까지 함께 짊어져 주세요. 자유로웠던 당신의 전반부에 내가 대신 그 짐을 지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많이 이해해주세요. 내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아팠을지 그리고 얼마나 잘 참아주었는지를. 내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픔을 대하며 가족과 지금의 내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된 것처럼 당신도 누군가를 위해 조금 더 참아내야 하는 그 시간 동안 사랑의 깊이를 더 많이 알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빠,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순수하고 착한 사람. 좀처럼 화가 없는 사람. 무심하지만 존중하고 받아줄 줄 아는 사람. 당신의 본성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기에 그런 당신의 내면을 자주 바라보려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내 이상형이었던 넓은 어깨를 나에게 자주 내어주어서 고마웠습니다. 너무 많이 울진 마세요! 당신은 콧물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두 딸에게

상상으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엄마가 세상에 와서 가장 사랑했던 두 딸. 젊은 엄마가 너무 일찍 너희들 가슴에 아픔의 눈물을 주어서 정말 미안해. 서툰 엄마로 혼자 힘으로 너희 둘을 키웠던 모든 순간들이 실수 같고 연약했던 것이 항상 사무치게 아팠지만, 너희들은 행복했던 기억으로 슬픔을 덮고 커갈수록 엄마를 사랑해주고 예쁜 말로 표현해주어서 정말 고마웠어.

-사랑스러운 옌

첫째라는 이름으로 너무 서툴고 부족했던 엄마가 너에게 깊이 주었던 상처들을 용서해주렴. 용서해달라는 말이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알기에 사춘기가 지난 너에게 그 말을 내뱉기가 참 어려웠단다. 모든 것은 받은 사람의 몫이라는 걸 엄마도 알기에, 결국 내 힘으로 내 마음의 것을 걷어내야지만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엄마가 너무 미안해! 눈물 많고 여리던 네가 중고등학교 6년간 엄마에게 보였던 강함이 엄마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부모로서는 ‘우리 옌이가 잘 크고 있구나, 많이 씩씩하고 단단해지겠구나’ 하는 마음에 오히려 감사한 시간이었어. 덕분에 너는 많은 부분을 스스로 이루었고 이루어 가고 있음에 지금 너무 감사하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생을 많이 좋아하는 네 모습에 우리 가정이 온전해짐을 느끼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엄마의 아픔을 덮고도 남는 온전한 기도의 응답이 되었어.

옌아, 글씨도 엄마를 닮았고 에세이를 좋아하는 것도 나를 닮은 너. 무엇보다 눈동자와 웃음이 나와 같아서 결국 사람들이 엄마를 닮았다고 기분 좋은 말을 건네 주게 되는, 사실 나보다 훨씬 예쁘게 생긴 너로 인해 참 감사해. 내가 직접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세월 동안 점점 더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오랫동안 살았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아프거나 힘든 사람들 곁을 지켜주기도 하고, 네게 주신 달란트로 그들을 위로하면서 네 마음이 더 따뜻하게 채워지길.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그리는 네가 되면 좋겠다. 그러면 어느새 훌쩍 마음의 크기가 자라고 용기가 생기면서 모든 것에 자기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엄마는 이미 네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돼. 잘 살거야 우리 첫째 딸은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 천국에서 엄마를 만날 때도 꼭 안아줘. 웃으며 다시 만나자♡ 사랑해 축복해!

-귀여운 옐

고등학생이 된 네가 아직도 다섯 살, 여섯 살처럼 귀여워서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대하는 것이 못마땅한 우리 둘째 옐:) 그래도 엄마의 사랑과 표현을 잘 받아주어서 너무 고마워. 언니와 다르게 다른 아픔을 전해준 네게도 엄마가 항상 마음 아파한다는 것을 아니?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네게 전해진 나의 아픔을 네가 빨리 잊어주기를 항상 바란단다.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너에게 네가 간직하지 않아도 될 아픔을 함께 느끼게 했다는 것이 항상 미안했고 심장이 아팠어. 천진난만하고 애교가 넘치던 너도 중학교 사춘기를 잠깐 보내게 되면서 너와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슬펐는지, 그럼에도 받아들이려 노력했던 시간이 엄마에겐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둘째라서 금방 인정할 수 있었어. 부모에게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너답게 마음껏 세상을 누비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널 바라보았어. 샘물처럼 물이 모이고 또 물을 나눌 줄 아는 네가 진심으로 엄마가 가장 존경하는 성품의 사람이었다고 다시 기록해두고 싶어. 자녀를 존경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신기하다며 너의 선생님들은 항상 놀라워했지. 나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인 너를 항상 감사하게 안았단다. 옐아, 혹시 다른 친구들의 엄마보다 엄마가 조금 더 일찍 천국에 가더라도 씩씩하고 강인하게 네 삶을 살아가 줄 수 있겠니? 아빠를 많이 안아주고 언니와 함께 서로를 다독이면서, 네 꿈과 소망들을 예쁘게 이루어가는 멋진 삶을 오랫동안 즐겨주길 엄마는 간절히 기도할게. 네게 있는 아픔이 더 따뜻한 너를 만들어 점점 더 차가워지는 세상에서 빛 같은 네가 되어주길.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너는 이미 그런 사람임을 바라본다. 아픔도 슬픔도 많이 덜어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가 가득한 세상을 살길, 많이 웃고 행복한 너를 천국에서 바라보며 안도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며, 옐! 엄마의 딸로 안겨주어서 너무너무 고마웠고 항상 감격스러웠어. 사랑하고 축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