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동시에 세상으로 잉태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 후기/해석
Girl With A Pearl Earring2004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속 소녀의 아름다운 두 눈과 보일 듯 말 듯한 불가사의한 미소에 가려진 사랑과 억압.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 주인과 하녀가 화가와 뮤즈가 되기까지. 걸작이 된 그들의 사랑은 닿을 수 있을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당신에게는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아마 오른쪽의 미술작품,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가 1665년경에 그린 유명한 초상화를 떠올리실 겁니다. 이 작품은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며, 네덜란드 황금기의 상징이자 베르메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똑 닮은 왼쪽의 여성의 사진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바로 왼쪽 원작의 회화에서 모티프를 따와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004) 입니다.
어릴 적, 제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유명한 초상화들은 모델의 위엄을 기리기 위해, 혹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인물을 사용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작품에서는 인물에 대한 위엄은 느껴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애정과 각별함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회화를 소개하는 얇은 책에서 처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게된 어린 저에게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어떤 이유로 그림에 담기게 되었을지, 그림을 그린 화가와는 어떤 사이였을지, 화왜 천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을지, 나이는 몇 살이었고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지 등등... 그림의 여성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이 저에겐 하나의 놀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감수성은 비단 저 뿐만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집필한 저자 트레이시 또한 저와 같은 생각으로 이 여성을 모델 삼아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대와 문화권을 넘어 공유되는 공동의 감수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저와 트레이시가 같은 회화를 가지고 상상을 펼치며 예술적 공명을 이뤄냈던 것처럼, 영화 속에서 또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주인공 그릿과 화가 베르메르가 예술가로서의 감수성을 공유하며 공명하는 장면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예술적 감수성을 공유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 그리고 같은 감수성을 공유하고 공감할 줄 아는 예술인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끌림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여주인공, 그릿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화가 요하네스의 저택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타일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세공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 받았던 것일까요? 그릿은 단순한 하녀가 아닌 예술가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기에 베르메르와 그릿은 같은 예술적 감수성을 공유함 자연스럽게 점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그릿은 베르메르의 뮤즈이자 모델이 되게 되고, 그렇게 그릿을 모델로 하여 탄생한 작품이 바로 영화의 제목이자 모티프가 된 회화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인 것입니다.
영화 내에서 그릿의 감재된 예술감각을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은 한 시퀀스에서 잘 표현됩니다.
화방의 청소를 맡게 된 그릿은 주인마님에게 창문의 먼지를 닦아도 되는지를 물어보며 먼지를 닦았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변해 그림에 영향을 줄까 걱정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릿의 말에 주인마님은 전혀 알지 못했던 부분이라는 듯 얼버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부분은 그릿과 주인마님의 차이이자 그릿과 베르메르가 예술적 공명을 이뤄낼 수 있었던 실마리가 되어줍니다. 그릿은 베르메르와 동류의 사람인 것입니다.
베르메르의 주변인 중에서 베르메르와 동류인, 같은 예술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모 또한 그의 그림 자체를 인정하고 경외하기 보다는 돈 벌이와 후원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아내는 그림에 몰두하여 화방에서 나오지도 않는 그를 이해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동료는 구름의 색 안에서 노란색과 회색, 분홍색을 찾아내는 그릿이 유일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르메르의 아내는 그 둘의 사이에 끼어들 수도, 그 둘의 사이와 같은 감수성을 베르메르와 공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그릿을 내쫓기까지 하는 주인마님은 베르메르와 그릿이 불륜관계라고 생각하며 세기의 명작에서 외설적임만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그녀가 극복 할 수 없는 한계인 것입니다.
“내가 너무 멍청해서 그림을 이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 그림을 감추는 건가요?” 라며 절규하는 모습에서는 이를 더 잘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끝까지 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릿과 베르메르는 정말 뮤즈를 넘어 불륜에 가까운 관계였을까요?
보는 이의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베르메르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렇다고 동시에 그릿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릿과 베르메르의 미묘한 관계는 단순히 사랑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물론 이끌림이라는 동류의 감정에 있어서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사랑보다는 세대와 성별, 신분을 넘어 자신의 예술적 가치관에 누구보다 가깝게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동료이자 동시에 그런 예술적 감정을 표출할 수 있게 영감을 준 뮤즈에 대한 당연한 이끌림이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제가 이 영화를 사랑 모티프 영화의 첫 에피소드로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내 가장 명장면으로 불리는, 베르메르가 그릿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리며 진주 귀걸이로 그녀의 귀를 직접 뚫어주는 장면입니다.
베르메르는 직접 그녀의 옆에 가까이 앉아, 같은 숨을 공유하며 그녀의 귓볼을 향해 귀걸이의 침 끝을 들이밉니다. 귀걸이의 침이 귓볼을 뚫고 나가는 순간 그릿은 눈물을 한 방울 흘립니다. 조심스러울 수 있는 해석이지만, 귓볼이 뚫리고 선혈과 함께 고통과 카타르시스가 동반되는 이 장면은 남녀의 첫 관계를 떠오르게도 합니다.
하지만 둘은 그래서는 안되며, 그럴수도 없는 관계였습니다. 뮤즈와 예술가라는, 더 나아가 예술적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둘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독이 든 성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선을 지키던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게 되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그렇기에 그릿과 베르메르가 순간적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껴버린 순간, 둘은 더 이상 함께 할 수도, 더 이상 예술적 공명을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만은 거짓말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 순간 흘린 그릿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릿은 아픔을 느꼈기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예술적 공명으로 이어진 둘의 미묘한 관계에서 그 순간 육체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렸다는 심리적 괴로움과, 그와 더 이상 예술의 동료로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이별의 괴로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뮤즈로서의 예술적 공명과 사랑이라는 감정 사이에서의 저울질에서 결국 그릿은 그 순간 사랑을 느껴버렸던 겁니다. 그 사랑을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파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육체적인 서사-성관계의 암시 장면을 넣는다거나-로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한 폭의 회화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만들어 줍니다.
한 가지 더 아름다운 지점은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의 죽음이 도래하고, 두 사람의 예술적 공명이 끝남과 동시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라는 작품이 세상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림의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낼 수 없기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사랑이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어떤 면에서는 관계의 종말을 몰고 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후 그릿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부분에서는 소설과 영화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영화와 소설 모두에서 그릿은 베르메르와 다시는 만나지 않으며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허드렛일을 하며 살게 됩니다. 이후 베르메르의 유언으로 시종이 그녀에게 둘의 사랑의 시작과 끝의 상징이었던, 진주 귀걸이를 되돌려 주러 오는 것까지는 동일합니다.
영화에서는 그릿이 건네받은 귀걸이를 천에 감싸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소설에서는 그릿이 이 귀걸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며 헐값에 팔아버립니다. 이는 그릿이 예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며 더 이상은 이전과 같은 예술의 감수성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릿이 귀걸이를 돌려받은 순간에서 끝을 내버립니다. 그 귀걸이를 어떻게 하였을까, 그 결말은 독자가 느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방향이었을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처럼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팔아버리는 지극히 예술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그릿은 정말 베르메르와 예술적으로 잠시 공명하였던 뮤즈였을 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러한 정해진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통해 소설과 달리 영화가 둘의 이야기를 사랑으로 끝내고자 했다는 의도로 느껴집니다. 이 때문에 저는 '진구 귀걸이를 한 소녀'를 사랑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영화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빠진다면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끝내 딱 한 번 긴장을 탁 놔버리는 순간 속절없이 빠져는 사랑이란... 그 사랑을 느끼고야 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파멸하고 마는 것은 인간 밖에 할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생명력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이러한 사랑의 파멸이 가장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고 인간의 생명력을 보여줄 수 있는 모티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사랑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