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70화

웃음소리 없는 유령의 집

by 돌부처

주말 오후의 어린이 대공원은,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찬란한 평화로 가득했다.


화창한 가을 햇살 아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비눗방울처럼 터져 나왔고, 공원 전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경쾌한 동요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솜사탕의 달콤한 냄새와 갓 튀긴 팝콘의 고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섞여 공기 중에 가득했다. 행복에 겨운 표정의 가족들은 아이의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었고, 그 모든 풍경은 마치 잘 짜인 영화 세트장처럼 완벽한 낙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낙원을 걷는 네 사람의 그림자는, 주변의 햇살마저 얼려버릴 듯 얼음처럼 차가웠다.


“모든 게… 역겹군.”


최민준이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이 뱉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은 더 이상 희망이나 미래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아이의 영혼을 쥐어짜고 있을 잔인한 고문 도구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리볼버의 차가운 손잡이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 자체가 거대한 기만이라는 사실에, 그는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느꼈다.


“기운이 너무 강해요. 모든 행복이…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서화가 창백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녀는 영적인 감각을 통해, 인파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거대한 행복과 기쁨의 에너지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깔때기처럼 한곳으로 꾸역꾸역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모든 빛과 온기를 집어삼키는 칠흑 같은 어둠이 더욱더 탐욕스럽게 몸집을 불려가는 것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에게 이곳은 낙원이 아니라, 순수한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거대한 제단이었다.


“박종윤 씨, 경로 확보됐습니까?”


장서린이 귓속의 초소형 통신 장치를 누르며 물었다. 그녀의 태블릿 화면에는 공원의 공식적인 지도 위에, 박종윤이 실시간으로 보내오는 기밀 정보들과 예상 이동 경로가 붉은색 선으로 덧씌워지고 있었다.


— “네. 5분 뒤, 놀이동산 전체 구역의 CCTV가 3분간 정기 점검을 빙자한 루프 영상으로 돌아갑니다. ‘유령의 집’으로 통하는 직원 전용 통로, 지금 열었습니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


박종윤의 긴장된 목소리를 끝으로, 네 사람은 인파 속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녹슨 채 붙어 있는 낡은 철문 뒤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화려한 놀이동산의 이면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버려진 폐허와도 같았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길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한때 화려했을 놀이기구의 녹슨 철골 구조물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 끝에, 마침내 목적지가 음산한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의 집’.


익살스러운 유령 캐릭터가 그려진 간판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려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고,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을 환상과 모험의 세계로 초대했어야 할 알록달록한 성 모양의 입구는, 이제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불길하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들어갑시다.”


한지운이, 짧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서늘하게 빛나는 사인검이 들려 있었다. 그의 다른 쪽 손은, 외투 주머니 속 뼈 나비를 강하게 쥐고 있었다. 아이의 공포가, 마치 작은 새의 심장 박동처럼 그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네 사람이 유령의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바깥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경쾌한 음악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바람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절대적인 정적과 함께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그들을 덮쳤다. 입구의 낡은 문이 닫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벽하게 다른 차원에 고립되었다.


“온도… 급속 하강 중. 영하 2도. 습도 90% 이상. 전자기장 교란 수치, 측정 불가 영역 돌파.”


장서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과학의 법칙이, 이 문지방 하나를 경계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녀의 최첨단 장비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오류’로밖에 인식하지 못했다.


내부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최민준이 전술용 손전등을 켜자, 강렬한 빛줄기가 닿는 곳마다 기괴하고 뒤틀린 풍경이 드러났다. 억지로 겁을 주려 만든 조잡한 귀신 인형들, 먼지가 솜처럼 쌓인 거미줄, 그리고 벽에 그려진 우스꽝스러운 해골 그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공간을 지배하는 짙고 순수한 공포의 기운 속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인형의 눈알이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고, 해골 그림의 입꼬리가 비웃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여긴… 단순한 저주의 공간이 아니에요.”


서화가 옥거울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공간 자체가, 민아라는 아이의 ‘악몽’ 그 자체예요. 5년 동안, 가장 무서웠던 순간에 갇혀… 벗어날 수 없는 길을 끝없이 반복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손전등 빛이 반사적으로 그곳을 비추자, 복도 저편 끝에 작은 여자아이의 형체가 보였다. 노란색 원피스, 토끼 머리핀. 실종 전단 속 민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민아야!”


최민준이 저도 모르게 외치며 다가가려 했다. 그 어떤 훈련받은 형사라도 아이의 모습 앞에서는 무력했다.


“안 돼요, 형사님! 함정이에요!”


서화가 다급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아이의 형상을 옥거울로 비추자, 거울 속에는 아이가 아닌, 여러 개의 비명 지르는 얼굴이 고통스럽게 뒤엉킨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형상이 비쳤다.


“저건 민아 양이 아니에요! 아이의 공포와 절망을 먹고 자라난, 악몽의 파편이자 이 공간의 감옥 간수입니다!”


그 순간, 아이의 형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소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익숙한 동요였지만, 모든 음정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고, 중간중간 기계음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어서… 어디를… 도망… 가느냐….”


노랫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아이의 형체가 검은 연기처럼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십 개의 날카로운 거미 다리를 가진, 비명 지르는 얼굴의 괴물이 솟아났다. 아이가 무서워했던 어둠, 거미, 그리고 혼자 남겨졌다는 공포가 한데 뒤섞여 만들어진 끔찍한 결합체였다.


크샤아아아아-!


괴물이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건… 벨 수조차 없어!”


최민준이 반사적으로 총을 쏘았지만, 총알은 아무런 저항 없이 괴물의 몸을 통과해 반대편 벽에 박혔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순수한 공포의 집합체였다.


바로 그때, 한 줄기 서늘한 은빛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한지운의 사인검이었다. 그의 검은 괴물을 베지 않았다. 대신, 검 끝이 괴물의 심장부, 비명 지르는 얼굴의 입에 정확히 꽂혔다. 폭발이나 파괴는 없었다. 대신, 검 끝에서부터 차가운 은빛 기운이 서리처럼 퍼져나가며, 괴물을 이루고 있던 악몽의 기록 자체를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록’을 이용한 싸움이었다. 지운은 ‘민아의 공포’라는 왜곡되고 오염된 기록 위에, ‘내가 너를 구하러 왔다’는 더 강력하고 선명한 왕의 의지, 그 구원의 기록을 강제로 덮어씌우고 있었다.


괴물은 고통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 끔찍한 형상 그대로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부서진 파편들은 검은 먼지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자.”


지운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은, 어둠이 더욱 깊어지는 복도의 끝, 악몽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에 얇은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왕의 분노는, 아이의 악몽을 모두 얼려버릴 가장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 되어, 저주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지운이 남긴 서릿길은, 이 미친 공간 속 유일한 이정표였다. 네 사람은 그 차가운 길을 따라 악몽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이 지나온 복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밟고 온 서리 내린 바닥마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스르르 녹아내려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듯했다. 퇴로는 없었다. 이 끔찍한 악몽을 끝내기 전까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전진하지 않으면, 이 어둠에 삼켜져 영원히 잊힐 것이라는 본능적인 공포가 등 뒤에서 그들을 몰아세웠다.


유령의 집 내부는 더 이상 고정된 물리 법칙을 따르는 공간이 아니었다. 민아의 갇힌 의식이 5년간 반복해 온 공포와 절망을 자양분 삼아,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뒤틀리고 변화했다. 벽에 그려진 해골 그림들은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입을 벌려 소리 없이 비웃었고, 그들의 그림자는 천장에 매달린 박쥐 모형들의 그림자와 뒤섞여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발밑의 바닥은 때로는 물컹한 늪처럼, 때로는 아득한 낭떠러지처럼 감각을 교란했다.


“이건… 미궁이에요. 완벽한 폐쇄 루프(Closed loop)입니다.”


장서린이 태블릿 화면을 보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GPS는 당연히 먹통이었고, 지자기 센서와 공간 스캐너마저 의미 없는 노이즈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시도한 모든 과학적 분석은 ‘ERROR’라는 붉은 글자로 귀결될 뿐이었다.


“10분 전에 지나왔던 복도입니다. 벽의 긁힌 자국, 바닥의 얼룩까지 구조가 완전히 똑같아요. 우리는 지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어요.”


“아니.”


한지운이, 앞을 막고 있는 낡고 뒤틀린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같은 곳이 아니다. 악몽이,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깊어지고 있을 뿐.”


그가 문을 열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이전의 조잡한 복도와는 전혀 다른, 사방이 낡고 얼룩진 거울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거울의 방’이었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네 사람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수십 개의 거울이, 수십 명의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망령이었다.


“이… 이건….”


최민준의 숨이 멎었다. 그의 정면에 있는 거울 속, 그는 10년 전 차가운 폐창고 바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던 파트너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거울 속 파트너의 입이, 소리 없이 그에게 말했다. ‘왜… 나를 구하지 못했어, 선배. 왜 나만 죽어야 했어.’ 그의 다른 쪽 거울에서는, 그가 놓쳤던 수많은 흉악범들이 섬뜩하게 웃으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죽었어, 이 무능한 형사놈.’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과 실패의 기억이, 거울이 되어 그를 사방에서 포위했다.


장서린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거울 속에서는, 싸늘한 시체 해부대 위에 누운 그녀 자신을, 흰 가운을 입은 또 다른 그녀가 냉소적인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너도 한낱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유기물 덩어리일 뿐이야. 네가 평생을 바쳐 믿는 과학? 죽음이라는 절대 법칙 앞에선 아무 소용없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과학자로서의 신념과 이성이, 거울 속에서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서화의 손에 들린 영험한 옥거울마저, 이 공간의 저주 앞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그녀를 비추는 거울들 속에는, 그녀가 구하지 못했던 수많은 영혼들이 슬픔과 원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고통을 본다면서, 왜 외면했는가. 왜 구원하지 못했는가.’ 그녀의 영적인 힘은 축복이 아닌, 그녀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저주가 되어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이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민아의 순수한 절망이 그들의 내면의 어둠을 증폭시켜 만들어낸, 정신을 직접 공격하는 저주였다. 각자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그들 스스로 절망의 늪에 빠지게 만들어, 이 악몽의 일부로 흡수하려는 끔찍한 함정.


하지만, 단 한 사람. 한지운의 거울만은 달랐다.


그의 앞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그저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칠흑 같은 심연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거울 속에는, 서늘한 은빛으로 빛나는 사인검을 든 채, 차갑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거울 너머의 ‘진짜 적’을 노려보는 왕의 모습만이 비치고 있었다. 이 악몽은, 아이를 구하러 온 왕의 분노 앞에서 감히 그의 과거를 비출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 차려!”


지운의 차가운 목소리가, 세 사람의 혼란스러운 정신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그깟 과거의 망령 따위에 발목 잡히지 마라!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이미 스러져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고통받는 아이다!”


그가 사인검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콰앙-!


은빛 서리가, 검이 꽂힌 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거울들을 덮쳤다. 거울 속에 비치던 끔찍한 환영들이, 차가운 얼음 결정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길을 열어라!”


지운이 왕의 목소리로 명하자, 그를 비추던 모든 거울들이 일제히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있던, 심연과도 같던 거울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새로운 길을 드러냈다.


“갑시다!”


최민준과 장서린, 서화는 지운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피를 흘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거울의 방을 통과하자, 주변의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기괴한 인형과 장식들은 사라지고, 마치 오래된 인형 극장 내부와 같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먼지 쌓인 무대처럼 보이는 단상, 붉은 벨벳 천이 찢어진 낡은 의자들, 그리고…


“…흑… 흐윽… 엄마….”


그때,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환청이나 저주가 아닌, 진짜 아이의 희미한 울음소리.

악몽의 가장 깊은 곳, 저주의 근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애처로운 소리였다.


“민아…!”


네 사람이 소리가 들려오는 단상을 향해 달려가려던 그 순간.


끼익, 끼이익-


천장에 매달려 있던 낡은 그네 하나가,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네 위에, 한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전체를 두껍게 하얗게 칠하고, 눈 밑에는 검은 눈물 자국을 그린 피에로(Pierrot). 입은 과장되게 찢어져 영원히 웃고 있었지만, 그 눈은 모든 감정이 거세된 채 텅 비어 있었다. 알록달록한 옷은 색이 바래고 더러웠으며, 손에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반주 삼아 연주하는 듯한 작은 오르골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민아의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다. 이전의 괴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독하고 사악하며 명백한 지성을 가진 기운. 화천회가 이 저주의 핵을 지키기 위해 심어놓은, 악의 그 자체인 ‘파수꾼’이었다.


피에로가, 관절이 꺾이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으로 목을 꺾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목소리는 오르골 소리와 뒤섞여, 끔찍하게 변조되어 있었다.


“쉿. 조용히 해.”


그의 텅 빈 눈이 그들을 하나씩 훑었다.


“우리의 작은 주인공이, 클라이맥스를 준비하고 있잖아. 공연 중에는, 떠들면 안 되지.”


그 말을 끝으로, 피에로는 손에 든 작은 오르골의 태엽을 다시 감았다. 그러자 아이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삼았던 오르골의 멜로디가, 한순간에 빠르고 광적인 서커스 음악으로 바뀌었다.


땡- 땡- 땡- 띠로리리링-!


음악이 바뀌는 순간, 극장 전체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던 낡은 벨벳 의자들이 일제히 삐걱거리며, 먼지 쌓인 어둠 속에서 반투명한 ‘관객’들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눈코입이 없었고, 그저 박수를 치는 손의 형상과 고개를 끄덕이는 실루엣만이 존재했다. 그들은 일제히 무대 반대편, 네 사람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백 개의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그들을 새로운 구경거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건…!”


장서린이 경악하며 태블릿을 확인했다. 에너지 반응이 아니었다. 이 공간의 ‘법칙’ 자체가, 피에로의 오르골 소리에 맞춰 실시간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저놈은 이 공간의 ‘기록’을 마음대로 연주하고 있어!”


한지운이 외쳤다. 그의 눈에는, 피에로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공간 전체의 인과율이 실처럼 엮였다가 풀리는 것이 보였다. 저것은 단순한 파수꾼이 아니었다. 이 악몽이라는 무대의 지휘자이자 연출가였다.


“자, 쇼는 시작됐어! 첫 번째 막은, ‘과거의 인형극’!”


피에로가 손가락을 까딱 튕겼다.


그러자 무대 뒤편 어둠 속에서, 나무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마리오네트 인형들이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 인형들의 얼굴은, 최민준이 과거 놓쳤던 범인들, 장서린이 해부했던 시체들, 그리고 서화가 구원하지 못했던 원혼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트라우마가, 피에로의 손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감히…!”


최민준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총알은 정확히 인형들을 향해 날아갔지만, 인형에 닿기 직전 보이지 않는 실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소용없어, 형사 양반.”


피에로가 그네 위에서 몸을 흔들며 낄낄거렸다.


“이 무대 위에서, 총 같은 야만적인 소품은 허용되지 않거든. 모든 건 내 각본대로 움직여야지.”


인형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나무 인형이 아니었다. 피에로가 불어넣은 악의에 의해, 강철보다 단단하고 짐승보다 날랬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서화가 앞으로 나서며 붉은 실을 풀어헤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실은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인형들의 움직임을 속박하는 결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인형들은 멈추지 않았다. 결계에 닿는 순간 몸이 불타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재가 될 때까지 달려들었다.


“이건… 끝이 없어요!”


장서린이 소리쳤다. 그녀의 분석대로, 인형들은 파괴되어도 무대 뒤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형체로 재구성되어 나오고 있었다. 이 악몽이 존재하는 한, 재료는 무한했다.


이대로는 소모전 끝에 모두가 지쳐 쓰러질 뿐이었다. 한지운은 깨달았다. 배우(인형)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이 미친 연극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대 뒤에서 실을 당기는 연출가를 끌어내려야만 했다.


“내가 저놈을 맡는다.”


지운이, 다른 세 사람에게 말했다.


“그동안, 버텨라.”


그는 더 이상 인형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한 점, 그네 위에서 이 모든 광경을 즐기고 있는 피에로를 향해 곧장 달려나갔다.


“호오? 조연이 감히 주연을 넘보는 건가?”


피에로가 흥미롭다는 듯 오르골의 연주를 바꿨다. 그러자 바닥이 거대한 늪처럼 변하며 지운의 발목을 잡았다. 벽에서는 날카로운 창들이 튀어나왔고, 천장에서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지운을 막아서는 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지운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사인검이, 눈부신 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베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이 거짓된 연극의 악보를 찢어버릴, 왕의 지휘봉이었다.


“네놈의 연주회는, 여기까지다.”


지운이 늪처럼 변한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몸이, 피에로가 앉은 그네를 향해 유성처럼 날아갔다.


피에로의 텅 빈 눈에, 처음으로 ‘경악’이라는 감정이 스쳤다. 자신의 절대적인 무대 장악 능력이, 저 미친 왕의 순수한 분노와 의지 앞에서 처음으로 균열을 보인 것이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네놈이 아니야!”


지운의 외침과 함께, 그의 사인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서리가 피에로의 광적인 서커스 음악을 덮어버리기 시작했다.


땡- 땡- 땡-


오르골 소리가,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느려지고 뒤틀렸다.

왕의 진혼곡이, 마침내 거짓된 연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전 19화[금제록 (禁祭錄)] - 6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