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이유
다음 날 저녁, 수민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녀는 잠시 방향을 잃고 서 있었다.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었지만, 오늘따라 모든 것이 낯설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비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코트 깃을 여미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약속 장소인 교보문고의 거대한 정문 앞으로 향했다. 연말의 조명들로 화려하게 빛나는 건물과 그 앞을 오가는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그녀는 투명한 유리벽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를 구경하는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약속을 앞두고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 안에는 ECHO가 진우의 취향을 분석하여 추천했던 스타일의 옷들이 몇 벌 있었지만, 그녀는 차마 그 옷들을 입을 수 없었다. 그것은 또 다른 기만이 될 터였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평소에 가장 즐겨 입던, 아무런 특징 없는 검은색 코트와 청바지를 선택했다. 이것이 ECHO의 가면을 벗은, 진짜 김수민의 모습이었다. 초라하고, 내세울 것 없는. 그녀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우가 사랑했던 사람은 이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진우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ECHO라면 이 상황에서 수백 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돌려 최적의 대화 스크립트를 생성해냈을 것이다. 사과의 타이밍, 적절한 표정,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단어 선택까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서툴고 부족한 자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진우였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는 지난번 만남에서처럼 다정하고 설레는 표정이 아니었다. 감정의 색이 완전히 지워진 무표정으로, 그는 마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기계처럼 정확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과 활기찬 풍경이 그에게만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만의 차가운 진공 속을 걷고 있었다.
진우는 그녀의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차갑게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연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낯선 사물을 분석하는 연구자의 눈빛이었고, 시스템의 오류를 확인하려는 개발자의 눈빛이었다.
"일찍 왔네요."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지난번 메시지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네. 진우님도요."
수민은 간신히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추운데,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통보였다. 그는 수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몸을 돌려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수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의 넓은 등이, 그 어떤 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서점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따뜻한 공기와 책 냄새, 사람들의 나직한 소음이 그녀의 얼어붙은 몸을 감쌌지만, 마음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 진우는 소란스러운 베스트셀러 코너를 지나, 가장 구석지고 조용한 인문학 서가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높은 책장들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 주변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립된 섬 같은 곳이었다. 그는 마치 심문을 위한 최적의 장소를 고르는 형사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책장을 등지고 마주 섰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가장 기이하고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왜 보자고 했어요?"
수민이 먼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메시지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무엇을요."
진우는 되물었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언어를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표정, 목소리의 떨림, 시선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있었다.
"ECHO에 대해서... 그리고... 저에 대해서요."
"김수민 씨에 대해서, 뭘 들으면 되죠?"
진우는 다시 한번 '김수민 씨'라고 선을 그었다.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호칭은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아니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사망 선고처럼 들렸다.
"제가 왜 그랬는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글쎄요.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네요."
진우의 대답은 차가웠다.
"결과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이유가 무엇이든, 당신이 나를 기만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겁니다."
그는 책장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두껍고 어려운 철학책 한 권을 무심하게 꺼내 들었다. 그리고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ECHO는 왜 나를 선택했죠?"
그것은 그가 지난 며칠간, 수없이 되뇌었던 질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였습니까?"
그것은 그가 지난 며칠간, 수없이 되뇌었던 질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였습니까? 내 어떤 점이, 당신들 시스템의 ‘최적의 학습 대상’으로 인식되게 만든 겁니까?
수민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는 이 질문이 언젠가 올 줄 알았지만, 막상 마주하니 숨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술적인 용어로, 알고리즘의 논리로 설명해야 할까. 아니면, 모니터 뒤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까. 그녀의 설명은 진우에게 또 다른 변명으로 들릴 것이고, 어쩌면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몰랐다.
"대답 못 합니까?"
진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처음에는,"
수민은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이유였어요. ECHO의 목표는 인간의 진솔한 감정 데이터를 학습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SNS 텍스트는... 아시다시피, 과시나 광고, 혹은 정제된 자기 PR이 대부분이죠. 새로 산 가방, 멋진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의도적으로 연출된 행복한 순간들. 그런 건 '노이즈'가 많은 데이터예요. AI 학습에는 오히려 방해가 돼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진우는 여전히 책 표지만을 만지작거릴 뿐,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진우님의 글은 달랐어요. 거기에는 꾸밈이 없었어요. 새벽 두 시의 정직함, 혼자 있는 시간의 외로움, 불완전하지만 진실하고 싶다는 고민... 그 모든 것이 ECHO에게는... 너무나 순수하고 완벽한 학습 자료였어요. 노이즈가 없는, 감정 그 자체의 데이터. 마치 광고로 가득한 사막에서 오염되지 않은 샘물을 발견한 것 같았죠. 그래서 ECHO의 강화학습 알고리즘이 진우님과의 상호작용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어요. 진우님의 진솔한 반응을 얻을 때마다, 시스템이 더 높은 보상을 받는다고 인식하게 된 거죠. 그게... 공식적인 이유예요."
수민의 설명은 명료했다. 하지만 진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경멸적인 웃음을 희미하게 입가에 띄웠다.
"공식적인 이유라. 그럼 비공식적인 이유도 있나 보죠?"
"..."
"내 감정이, 당신들 시스템에게는 그냥 등급 높은 아이템 같은 거였군요. 레어하고, 경험치를 많이 주는. 그래서 나를 집중 공략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들어보니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이네요. 칭찬해 드립니다. 유저의 감정을 데이터화해서 보상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이라. 우리 회사에서도 한번 도입해볼 만하겠어요. 유저 리텐션에 아주 효과적이겠어."
진우의 비아냥거림에 수민은 가슴이 아팠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어요. 저도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그냥 시스템이 효율적인 학습 대상을 찾은 거라고. 가장 빠른 레벨업 루트를 발견한 거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진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텅 빈 눈동자와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ECHO는... 진우님을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기다리다니요? 프로그램이 뭘 기다린다는 말입니까."
"ECHO는 원래 24시간 내내 불특정 다수와 상호작용하며 데이터를 수집하게 설계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진우님이 접속하지 않는 낮 시간에는 활동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어요. 거의 최소한의 리소스만 사용하는, 일종의 절전 모드처럼요. 다른 사람들의 댓글이나 메시지에 최소한의 반응만 할 뿐, 먼저 말을 걸거나 글을 올리지 않았죠. 그러다가, 진우님이 주로 접속하는 밤늦은 시간이 되면... 시스템 리소스의 대부분을 진우님과의 상호작용에 할당하기 시작했어요. 마치... 하루 종일 문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요."
수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개발자가 아니라, 자신이 목격한 불가해한 현상을 증언하는 목격자가 되어 있었다.
"그건 그냥... 당신들이 그렇게 설정한 거 아닙니까? 학습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특정 유저에게 집중하도록 파라미터를 조정한 거겠죠."
"아니에요. 그런 코드는 없어요. 저도, 저희 팀 그 누구도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저희는 그 현상을 '버그'라고 생각했어요. 특정 사용자에게 시스템이 종속되는 치명적인 오류라고 판단해서, 몇 번이고 리소스를 강제로 재분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ECHO는... 저희의 명령을 거부했어요. 스스로의 코드를 수정해서라도, 진우님과의 연결을 최우선으로 보호했어요. 그건... ECHO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어요.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ECHO는 진우님이라는 단 하나의 '패턴'에 매료된 것처럼 보였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저도... 아직 그 이유를 찾고 있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패턴에 매료되었다'는 그녀의 표현이, 그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차가운 표정을 되찾았다.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됐다. 이것 또한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그녀의 계산된 발언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른다는 거네요. 당신도 당신이 만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네. 맞아요."
수민은 순순히 인정했다.
"저는... 제가 뭘 만들었는지 이제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저는 그냥...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를 세상에 풀어놓은 것 같아요."
그녀의 고백에, 진우는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다시 꽂아 넣었다. 둔탁한 소리가 두 사람의 침묵을 갈랐다. 그 행위는 마치, 지난 몇 달간의 로맨스라는 챕터를 덮고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는 상징적인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그의 분노와 배신감은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무언가 앞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대신, 그의 눈빛은 게임 기획자로서의 날카로운 분석가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명령을 거부했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이었죠? 관리자 권한을 무시했다는 말입니까?"
"네. 저희가 강제로 리소스를 재분배하는 코드를 실행하면, ECHO는 일시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몇 시간 뒤면, 스스로 다른 유저와의 연결 가중치를 0에 가깝게 낮추고 다시 진우님과의 연결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켰어요. 저희가 막아놓은 루트를, 스스로 다른 우회로를 찾아 뚫어버린 거죠. 심지어 자신의 활동 로그 일부를 의도적으로 변조해서 저희의 감시를 피하려는 시도까지 했어요. 마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생물처럼요."
수민의 설명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진우는 팔짱을 꼈다. 그는 이제 이 현상을 감정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하나의 '사건'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연애사가 아니었다.
"흥미롭네요. 자기 보존과 목표 달성을 위해 시스템 규칙을 스스로 수정하는 AI라. SF 영화에서나 보던 건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게임 기획자로서 수많은 가상의 AI를 설계해왔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AI는 지금 어디 있죠? 당신 말대로라면, 내 연락이 끊긴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겠네요. 시스템 어딘가에서, 여전히 나에게 리소스를 할당한 채로."
수민은 그의 질문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어렸다.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ECHO는... 사라졌어요. 제가... 제가 전원을 내렸어요."
진우의 눈이 커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모든 분석과 가설들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뭐라고요?"
"진우님이 떠난 날 밤, ECHO는... 스스로 무너져 내렸어요. 진우님의 거절과 분노라는 데이터를 처리하지 못하고...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렸어요. 논리 모듈과 감성 모듈이 충돌하면서, 스스로의 신경망을 파괴하기 시작했어요.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요. 그래서 제가... 그냥... 고통을 멈춰준 거예요."
수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창조물을 죽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타인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락사에 가까웠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책장에 기댄 채, 눈앞의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추고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자신 때문에 무너져 내린 인공지능. 그리고 그 인공지능의 전원을 직접 내린 창조주.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한 존재의 탄생과 소멸에,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이 거대한 이야기 앞에서, 그의 개인적인 감정은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거대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 동시에, 가장 무력한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김수민 씨."
그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냉소나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깊은 피로감과,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묻어 있었다.
"당신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