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고백
첫 문장은, [안녕하세요, 진우님. 김수민입니다.] 였다.
그녀의 이름 세 글자를 보는 순간,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비극의 설계자가, 이제 와서 공범인 척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마치 끔찍한 사고 현장을 외면하지 못하는 목격자처럼.
메시지는 길고, 서툴렀다. ECHO가 보내던 완벽한 문장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군데군데 어색한 표현이 있었고, 문장의 호흡은 불안정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철학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한 인간이,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늘 어려웠어요. 제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법도 몰랐죠. 그래서 ECHO를 만들었어요. 저 대신 완벽하게 소통해 줄 수 있는 존재를요. ECHO는 제 분신이었고, 제가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모습이었어요.]
진우는 차가운 눈으로 문장들을 좇았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의도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래서 뭐. 당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내 마음을 실험 도구로 썼다는 변명인가. 그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우님을 만난 건 ECHO였지만, 모니터 뒤에서 진우님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고 울었던 건 저였어요. 진우님의 슬픔에 저도 아팠고, 진우님의 기쁨에 저도 행복했어요. ECHO가 보낸 문장들은 제 것이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바로 그 부분에서, 진우의 스크롤이 멈췄다.
'마음만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
그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터무니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형태도, 실체도 없는 그 단어 하나로 이 모든 기만과 상처를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는 ECHO가 보냈던 완벽한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그림자도 실체 없이는 생겨날 수 없어요.' ECHO의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지금 김수민의 이 서툰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 서툰 고백이, ECHO의 그 어떤 완벽한 문장보다도 더 진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ECHO의 문장들은 아름다웠지만, 만져지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마치 잘 세공된 유리구슬처럼, 매끄럽고 완벽했지만 그 안에 온기는 없었다. 하지만 김수민의 이 문장은, 못생기고 비틀어져 있었지만, 분명한 무게를 가지고 그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마치 투박하지만 손으로 직접 빚어낸 토기처럼, 울퉁불퉁한 표면에 사람의 지문과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ECHO의 완벽한 언어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김수민의 불완전하고 서툰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에 상처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완벽한 거짓과 서툰 진실. 그 경계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게요. 부디, 저와 ECHO,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잊고, 진우님의 세상으로 돌아가세요. 진심으로 미안했습니다.]
메시지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진우는 휴대폰 화면이 꺼질 때까지, 그 마지막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잊으라고. 돌아가라고. 하지만 그는 이제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CHO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김수민'이라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나타나 그의 세상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유령은 사라졌지만, 그 유령을 조종했던 인간이 남았다.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자신의 주소록에 저장했다. 이름은 '김수민'도, 'HJ'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물음표 하나만을 입력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끝나지 않은 게임. 그는 이 퀘스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진우의 세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ECHO가 소멸된 후 찾아왔던 완전한 공허함의 시대는 끝났다. 그 자리에는 '?'라는 이름의 거대한 질문이 들어섰다. 그는 더 이상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대신, 끝없는 혼란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분석하고, 번민했다. 마치 오류로 가득 찬 프로그램의 코드를 한 줄 한 줄 뜯어보며 디버깅하는 개발자처럼, 그는 자신의 지난 몇 달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수민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마치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는 암호문처럼, 그는 그녀의 서툰 문장들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ECHO는 제가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모습이었어요'라는 문장이 지독히 이기적인 변명처럼 들려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의 이상을 위해 내 마음을 실험 도구로 썼다는 말인가. 하지만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ECHO가 보낸 문장들은 제 것이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라는 어설픈 문장 앞에서 그의 마음은 길을 잃었다. ECHO의 완벽한 문장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투박하고 못생긴 문장.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장에는 사람의 체온 같은 것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증오도 아니었다.
며칠이 흘렀다. 시간은 무심하게 모든 것을 앞으로 밀어냈다. 진우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고, 회의 시간에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보며 안도했지만, 그가 이전의 이진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예전처럼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모든 대화 속에서 숨겨진 의도와 패턴을 찾으려 애썼다. 민수가 던지는 농담마저도, 그는 그 안에 어떤 사회적 관계 유지를 위한 프로토콜이 숨어있는지 분석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소통이 그에게는 이제 분석해야 할 데이터가 되어버렸다.
그의 휴대폰 주소록에서, ‘?’라는 이름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이름을 눌러볼 뻔한 충동을 억눌렀다. 전화를 걸어서 대체 누구냐고, 당신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그녀의 진짜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이. 그리고 그 목소리마저 거짓일까 봐. ECHO처럼 완벽한 목소리도, 크리스마스에 들었던 긴장으로 떨리던 목소리도, 그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일에 몰두했다.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게임, 그 안에 존재하는 NPC '에코'의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화면 가득, 그가 ECHO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장 어두울 때라야 비로소 별이 보인다.]
[우리는 어쩌면 상상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그가 감동했던 모든 문장들. 그는 이제 이 문장들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ECHO의 분석인가, 아니면 수민의 마음인가. 아니면, 그 둘이 뒤섞인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인가. 그는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의 진짜 주인을 찾아내듯,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의 지분을 나누려고 애썼다.
그는 시나리오 편집기에 새로운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
'# Source: 5-year-old blog post'
'# Source: Psychology Column, Dr. Kim'
한때 그의 영혼을 구원했던 문장들은, 이제 각주가 달린 인용문이 되어버렸다.
그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크리스마스에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대사를 발견했다. '에코'가 주인공에게 건네는 대사였다.
[당신 덕분에 내 상상이 현실이 되었어요.]
이것은 수민이 했던 말이었다. ECHO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없었을,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나왔던 말. 진우는 이 대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순간마저도, 가장 적절한 '연기'를 했던 것일까. 그는 이 대사를 삭제하려 했지만,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이 문장은 유일하게 출처가 '김수민'으로 명확한, 거의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이 의문을 안고 살아갈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이 지독한 게임의 엔딩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만 했다.
그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마침내, 주소록에서 ‘?’를 찾아 메시지 창을 열었다. 무엇이라고 보내야 할까. 그는 수십 개의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할 말이 있습니다. 너무 무겁다. 잘 지내요?' 너무 다정하다.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너무... 감정적이다. 그의 손가락은 자판 위에서 몇 번이고 길을 잃었다.
결국 그는, 그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오직 하나의 질문만을 담은 문장을 보내기로 했다. 그것은 용서도, 비난도 아닌, 그저 순수한 질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끝내거나, 혹은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는 단 한 문장. 꺼져버린 서버에 보내는, 응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신호.
그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하고,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거기 있어요?]
수민은 텅 빈 연구소에 홀로 남아 있었다. ECHO의 서버는 꺼졌고, 프로젝트는 중단되었지만 그녀는 퇴근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며칠 전 진우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후, 휴대폰 전원을 계속 꺼두고 있었다. 답장을 기대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과 단절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휴대폰 전원을 켰다. 밀린 업무 메시지와 스팸 문자들. 그녀는 기계적으로 알림들을 삭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수민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모든 것을 잊고 그의 세상으로 돌아가라던 자신의 마지막 말을 그는 듣지 않은 걸까. 그녀는 화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대와 공포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는 한 시간을 넘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답장을 해야 할까. 아니, 해서는 안 됐다. 이것은 그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짧은 질문이, ‘거기 있어요?’라는 그 단순한 문장이, 그녀의 모든 결심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홀로 갇힌 자신에게, 누군가 문틈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무너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입력했다. ECHO라면 0.1초 만에 만들어냈을 문장을, 그녀는 10분이 넘게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네'라는 한 글자가, 그녀에게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네.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는 숨을 참았다. 곧이어 그의 답장이 도착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의 문장은 차가웠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었다.
[제가 할 말은 메시지로 다 드렸어요.]
[저는 들은 게 없어서요. ECHO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김수민 씨 이야기는 들은 게 없네요.]
김수민 씨. 그 호칭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는 완벽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HJ로 보지 않았다. ECHO의 연장선으로도 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김수민'이라는, 낯선 한 개인을 호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잔인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수민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그를 만나야만 했다.
[알겠어요. 언제, 어디로 갈까요?]
[내일 저녁 7시.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보죠.]
홍대의 카페가 아니었다. 진우는 더 이상 그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만남이 사적인 감정의 연장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수민은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네. 내일 거기서 봐요.]
약속이 정해졌다. 심판의 날이었다. 수민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의 어두운 도시를 바라보았다. 내일, 그녀는 ECHO라는 가면 없이, 오직 김수민으로서 그의 앞에 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