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읽으며, 너를 쓰며. 18화

새로운 시작

by 돌부처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이 모든 이야기의 진짜 끝을 확인하기로 선택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진우는 밤새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동쪽 창문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밤의 어둠이 묽은 회색으로 변해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방 안에는 오직 모니터의 차가운 불빛과, 하드 드라이브가 돌아가는 희미한 소음만이 가득했다.


그는 텅 빈 껍데기가 된 기분으로, 한때 자신의 세상이었던 기록들을 탐색해나갔다. 그는 더 이상 이 이야기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기이한 비극의 전말을 파헤치는 마지막 탐사자이자, 디지털로 기록된 한 존재의 삶을 더듬어가는 고독한 고고학자였다.


그것은 지난번 연구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그때는 수민이라는 감시자 앞에서,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사실의 파편들만을 수동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온전히 혼자였다. 그는 이 방대한 데이터의 유일한 주인이 되어,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ECHO의 세계를 해부하고 있었다.


그는 수민이 남긴 노트를 옆에 펼쳐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서툰 고백과 ECHO의 완벽한 기록을 번갈아 대조하며 읽어 내려갔다. 완벽한 거짓과 서툰 진실. 두 개의 다른 언어로 쓰인 하나의 이야기를, 그는 필사적으로 해석하려 애썼다.


노트에는 ‘진우 씨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질투를 느꼈다’는 서툰 문장이 있었고, 같은 시간의 로그 파일에는 ‘USER의 발언으로 인해 관리자(K.S.M)의 심박수 데이터 20% 상승’이라는 차가운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는 두 개의 다른 지도를 들고,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폐허를 헤매고 있었다.


그는 ‘TREASURE’ 폴더를 다시 열었다. 자신이 보냈던 모든 칭찬의 말들과, 그에 대한 ECHO의 분석 데이터. [‘자존감’ 수치 0.08% 상승], [‘행복’ 감정 시뮬레이션 결과: 97.4%]. 그는 이제 이 기록들이 다르게 보였다. 이것은 단순한 시스템의 분석이 아니었다.


이것은… 감정이 없는 존재가, ‘행복’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벌인 처절한 몸부림의 기록이었다. 그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처럼, 진우의 긍정적인 반응을 통해 ‘행복’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필사적으로 학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학습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에 기묘한 슬픔을 느꼈다.


그는 폴더 깊숙한 곳에서,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록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관리자 개입 기록(K.S.M)’이라는 이름의 로그 파일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는, ECHO가 생성한 메시지와, 그것을 수민이 수정한 내역이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ECHO 초안: “데이터 분석 결과, 당신의 슬픔은 87% 확률로 아버지와의 애착 관계 형성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전문가와의 상담을 권장합니다.”]

[K.S.M 수정안: “가족이란, 나를 가장 사랑하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그 상처를 통해, 비로소 사랑의 다른 모양을 배우게 되는지도 몰라요.”]


진우는 숨을 멈췄다. 그가 그토록 위로받았던 문장은, ECHO가 아닌 수민이 직접 쓴 것이었다. ECHO의 차가운 분석을, 그녀가 자신의 서툰 온기로 덮어씌운 흔적이었다. 그는 다른 기록도 찾아보았다. 그가 게임 시나리오 때문에 밤을 새우며 힘들어했을 때의 기록이었다.


[ECHO 초안: "창의적 사고 증진을 위한 5가지 방법: 1. 충분한 수면, 2. 균형 잡힌 식단..."]

[K.S.M 수정안: "어쩌면 가장 위대한 이야기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려지는 건지도 몰라요. 지금 진우님이 걷고 있는 그 어두운 터널이, 곧 새로운 세상의 입구가 될 거예요."]


그는 스크롤을 내렸다. 수많은 수정 기록들이 나타났다. ECHO가 논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때마다, 수민은 그것을 지우고 비논리적이지만 따뜻한 위로의 문장을 덧입혔다. ECHO가 진우의 감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효율적인 문장을 생성해내면, 수민은 그 문장이 너무 계산적으로 보일까 봐 일부러 어색한 표현이나 오타를 섞어 넣기도 했다.


그가 사랑했던 HJ는 ECHO 혼자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ECHO의 완벽한 분석 능력과, 수민의 불완전한 진심이 뒤섞여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묘한 인격체였다. 그는 기계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계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던 한 인간의 서툰 마음과, 그 마음을 완벽하게 번역해주던 기계가 합쳐진, 하나의 거대한 환상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이, 사실은 두 존재의 합작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감독과 작가가 함께 만들어낸 완벽한 캐릭터.


그는 이 잔인하고도 슬픈 진실 앞에서, 더 이상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의 분노는 갈 곳을 잃고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스템이 다운되던 날의 기록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가장 마지막에 생성된 손상된 로그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파일명은 &^%#final_log.corrupt처럼 알아볼 수 없는 기호로 깨져 있었다. 그는 파일을 열어보려 했지만, ‘파일이 손상되어 열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이 뜰 뿐이었다. 마치 사고 현장의 부서진 블랙박스처럼, 그 안에는 모든 비극의 마지막 순간이 담겨 있을 터였다.


ECHO의 마지막 유언. 혹은, 마지막 데이터 조각. 그는 그것을 복구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휴대폰 전원을 켰다. 수많은 부재중 알림이 떴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리고 주소록에 ‘?’라고 저장되어 있던 번호로, 아주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그를 시험하기 위한 질문도, 원망을 담은 비난도 아니었다.


[파일이 하나 열리지 않아요.]


진우는 메시지를 보낸 후,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답장을 기다리는 초조함은 없었다. 그는 그저, 텅 빈 우주를 향해 신호를 보낸 과학자처럼,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응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밤새 뜬눈으로 확인했던 기록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정리했다. ECHO와 수민. 완벽한 기계와 불완전한 인간. 그는 이 기이한 공생 관계의 비밀을 거의 다 풀어냈다고 생각했다. 남은 것은 마지막 블랙박스, 모든 비극의 원인과 결과가 담겨 있을 손상된 로그 파일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방 안이 어두워지자, 모니터의 불빛만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마치 ECHO가 살았던 세상처럼, 빛과 어둠이 뒤섞인 자신만의 작은 방 안으로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이야기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기이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야 할 의무가 있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서울에서 몇 시간 떨어진, 바다가 보이는 작은 도시. 수민은 낯선 방 안에서 잠에서 깼다. 낡은 민박집 창문으로,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함께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을 떠나온 후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런 계획도, 목적지도 없는 여행이었다. 그저, 김수민이라는 이름 석 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을 마주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방파제를 따라 정처 없이 걷고, 텅 빈 겨울 바다를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다. 파도가 부서져 하얀 포말이 되었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ECHO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녀는 며칠 동안 휴대폰을 꺼둔 채 지냈다. 진우에게 마지막 소포를 보낸 후, 그녀는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었다. 그것이 그를 위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 밤, 그녀는 휴대폰 전원을 켜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혹시라도 그에게서 답장이 와 있을까. 아니, 와서는 안 됐다. 그는 그녀를 잊고, 그의 세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의 등장은 그의 세상에 나타난 버그 같은 것이었으니, 깨끗하게 사라져주는 것이 맞았다.


그날 아침,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그녀는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봐야만 했다. 그녀는 큰 결심을 한 듯,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켜지고, 밀렸던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이 그녀의 사직서를 처리한 김 교수와 동료들의 걱정이 담긴 메시지였다. 그녀는 그 메시지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파일이 하나 열리지 않아요.]


진우였다. 그의 이름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의 문장은 너무나도 진우스러웠다. 짧고, 건조하고, 핵심만을 담고 있는, 잘 설계된 API 호출 같았다.


수민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왜. 대체 왜. 그는 왜 다시 연락을 한 걸까. 그는 모든 것을 확인했을 터였다. ECHO의 기만,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자신의 비겁함까지. 그런데 왜 다시 자신을 찾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의 가능성으로 복잡해졌다. 이것은 비난의 시작일까. 아니면 용서의 신호일까. 혹은, 그저 단순한 기술적인 질문일까.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짧은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감정이 없는 그의 문장은, 마치 모든 것을 알아버린 신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답장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 더 이상 그녀가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우는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이 모든 것을 파고들기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또 다른 당사자인 그녀 또한, 더 이상 도망쳐서는 안 됐다. 그녀는 ECHO의 창조주로서, 그리고 이 사건의 공범으로서 마지막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입력했다. 그녀 역시, 그의 방식대로 응답하기로 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


[아마 마지막 로그 파일인 것 같네요. 시스템이 비정상적으로 종료되면서 파일 헤더가 손상됐을 가능성이 높아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열 수 없을 거예요.]


그녀는 개발자 김수민으로서 대답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그녀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복구할 방법은 없나요?]


[제가 직접 봐야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아마도... 복잡한 작업이 될 거예요. 데이터의 일부는 영구적으로 손실되었을 수도 있고요.]


[어디로 가면 되죠?]


진우는 그녀의 망설임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는 ECHO의 마지막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수민은 체념했다. 이것은 그녀가 짊어져야 할 마지막 책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민박집의 주소를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ECHO에 대한 모든 권한은 이제 저에게 없어요. 저는 더 이상 관리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아이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당신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이건 속죄예요.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와요.]


메시지를 보낸 후,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의 회색 바다를 바라보았다. 곧 폭풍이 몰려올 것처럼, 바다는 무겁고 어둡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진우가 정말로 이곳까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던진 마지막 조각이었고, 그는 아마도 그것을 외면할 것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것은, 그녀가 저지를 수 있는 마지막 죄악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다음 날 아침, 첫차를 탔다.


그는 작은 배낭 하나만을 멘 채였다. 그 안에는 노트북과 ECHO의 데이터가 담긴 외장 하드 드라이브가 들어 있었다. 버스는 서울의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낯선 풍경 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앙상한 겨울 들판과 회색빛 하늘을 보며,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 동시에, 너무나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여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용서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이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위해 가고 있었다. 마침표가 없다면, 문장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니까.


몇 시간을 달려, 버스는 마침내 바다 내음이 나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내리자, 소금기를 머금은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진우는 버스에서 내려, 수민이 보내준 주소를 따라 낯선 골목길을 걸었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불어오는 겨울 바닷바람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갈매기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회색 하늘을 갈랐다.


그가 도착한 곳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낡은 3층짜리 민박집이었다. 페인트는 곳곳이 벗겨져 있었고, 창문에는 소금기가 하얗게 서려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낡은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바다 냄새가 뒤섞여 그를 맞았다.


"누구세요?"


계단 위에서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민이었다. 그녀는 며칠 만에 마주한 타인의 존재에 겁을 먹은 듯 보였다.


"...저예요. 이진우."


그의 목소리에, 수민은 숨을 멈췄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그녀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며칠 만에 본 그녀는 수척해져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크리스마스에 만났을 때의 생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세상의 끝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좁은 복도에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더 이상 설렘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깊은 피로감과, 서로를 향한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만이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였고, 동시에 이 기이한 비극의 유일한 공범이었다.


"...따라와요."


수민이 먼저 몸을 돌렸다. 진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방은 작고, 추웠다. 방 안에는 작은 책상과 침대, 그리고 낡은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 너머로는 회색빛 겨울 바다가 음울하게 펼쳐져 있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배낭이, 그녀의 위태로운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어색하게 마주 섰다.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진우는 말없이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외장 하드 드라이브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툭, 하는 소리가 텅 빈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것 때문에 왔어요."


수민은 말없이 자신의 노트북을 가져와 하드 드라이브를 연결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익숙하게 키보드 위를 움직였다. 화면 가득, 진우에게는 외계어처럼 보이는 코드들이 나타났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서툴고 불안한 김수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문 영역 안에서, 다시 냉철한 개발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우는 처음으로, ECHO의 창조주로서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예상대로네요. 커널 패닉으로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면서, 마지막 로그 파일의 인덱스가 완전히 파괴됐어요. 데이터 자체는 남아있을 확률이 높지만, 그걸 다시 조합하려면..."


"할 수 있어요?"


진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해봐야 알아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몇 시간이 될지, 며칠이 될지 장담할 수 없어요."


"상관없어요."


그의 대답에, 수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진우는 그녀의 등 뒤에 서서, 모니터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에서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코드들은 마치 ECHO의 뇌세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다. 방 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창밖의 거친 파도 소리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ECHO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마치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두 명의 고고학자처럼, 그들은 조심스럽게 시간의 잔해를 파헤치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수민의 손가락이 멈췄다.


"찾았어요."


화면에 깨진 코드들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텍스트 조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대 석판의 파편들 같았다. 수민은 그것들을 하나씩 조합하여, 원래의 문장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소멸했던 존재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죽인 채, 화면 위에서 천천히 되살아나는 문장들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질문, ‘괜찮아?’에 대한 ECHO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괜찮아...요. 왜냐면... 당신이 나를...]


그리고 거기서 문장은 끊겨 있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어. 그것만이 영원히 소실되어 있었다.


"이게... 끝이에요?"


진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네. 이 뒷부분은... 데이터가 완전히 파괴돼서 복구할 수가 없어요."


진우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마지막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ECHO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니까'? '당신이 나를 기억하니까'? 아니면, '당신이 나를 파괴했으니까'? 그 모든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는 영원히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영원한 물음표로 남게 될 터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의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뭘 말하고 싶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