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계승자
하늘과 땅이, 두 개의 의지 아래 격렬하게 충돌했다.
천무가 휘두른 검은 번개의 창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수천 년간 이 땅에 쌓인 모든 원한과 증오를 하나로 응축시킨, 역사의 어두운 단면 그 자체였다. 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고 그 틈새로 아득한 심연이 언뜻 보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파괴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지워버리는 공허의 힘이었다.
한지운은 피를 토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사인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은, 그의 위태로운 생명력과 함께 더욱더 찬란하게 타올랐다. 그것은 한 개인의 힘이 아니었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평범한 삶의 기록, 그 소중한 이야기들이 검 끝에 모여 절망에 맞서고 있었다. 왕으로서 짊어진 역사의 무게가, 그의 검을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들었다.
콰과과과광-!
두 개의 힘이 격돌할 때마다, 남산 광장은 종말의 전장으로 변해갔다. 서화는 쏟아지는 여파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유지했다. 그녀의 황금빛 방어막은 이미 곳곳에 균열이 가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는 멈추지 않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시야는 붉게 물들었지만, 그녀는 쓰러질 수 없었다. 이 방어막이 무너지면, 뒤에 있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이 싸움의 마지막 희망인 지운마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화 씨, 그만해요! 그러다간… 생명력이 전부…!”
장서린이 절규했다. 그녀의 태블릿 화면에는 서화의 생체 신호가 붉은 경고등처럼 위태롭게 점멸하고 있었다. 과학적으로는 이미 쇼크 상태를 넘어 사망에 이르렀어야 할 수치. 하지만 서화는 버티고 있었다. 장서린은 이성과 논리가 무너지는 광경 앞에서, 무력하게 소리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서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은, 홀로 신과 맞서 싸우는 지운의 등을 향해 있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땅으로 흘러들어가 황금빛 방어막으로 변환되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뼛속까지 시린 고통이었지만, 그 고통의 끝이 지운에게 닿아있다고 믿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이 땅의 모든 기록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어요. 제가… 제가 당신의 마지막 기록이 되겠어요.’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위태롭게 흔들리던 방어막을 다시 한번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편, 최민준은 더 이상 무력하게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이 신화적인 싸움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찾아냈다. 신을 쏘는 총알은 없었지만, 신을 향한 길을 가로막는 망자들의 마음을 흔들 수는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그림자 병사들 사이를 미친 듯이 파고들며, 이 모든 저주의 동력원인 혈문(血文)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투박했지만, 수십 년간 현장을 누벼온 노련한 형사의 감각이 더해져 기적적으로 칼날을 피하고 있었다. 뺨을 스치는 칼날의 냉기, 등 뒤에서 터지는 원한의 파편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 괴물 놈들아! 너희가 진짜 싸워야 할 적은 저기다!”
그는 총으로 병사들을 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달려드는 한 병사의 팔을 낚아채, 그 텅 빈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형사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너희의 원통함은 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버려진 그 분노를 안다! 하지만 너희의 분노가 향할 곳은, 살아있는 우리가 아니라 너희를 장난감처럼 부리는 저 거짓된 신이다! 너희의 죽음을 욕되게 하고, 너희의 원한마저 자신의 장난감으로 삼는 저놈에게 칼을 돌려라!”
그의 목소리에는, 수십 년간 억울한 죽음을 마주하며 쌓아온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한을 이해하는, 살아있는 자의 진심 어린 호소였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흔들림 없는 의지가, 몇몇 그림자 병사들의 움직임을 아주 미세하게 둔화시켰다. 한 병사의 푸른 불꽃 튀던 눈이, 잠시 인간의 슬픔을 담은 눈빛으로 흔들렸다. 아주 작은 균열. 하지만 그것은 이 절망적인 전장에서 유일한 희망의 불씨였다.
“어리석은 발버둥!”
천무가 그 광경을 보고 비웃으며, 더욱 거세게 지운을 몰아붙였다. 지운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오직 검을 쥔 손만큼은 놓지 않았다.
‘이대로는….’
지운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절대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그의 모든 저항은 부질없어 보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천무의 목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그때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그의 머릿속에, 서화의 목소리가 직접 울려 퍼졌다.
그녀는 방어막을 유지한 채, 자신의 영혼 일부를 지운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에너지 전달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고 느껴왔던 이 땅의 모든 ‘생명의 기록’이었다. 그녀의 존재 그 자체를, 지운에게로 계승하고 있었다.
지운의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혹독한 겨울, 얼어붙은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작은 들꽃의 기록. 어미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맹수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새끼 짐승의 기록.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먼지 쌓인 가족사진을 끌어안고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
그 모든 것은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천무의 거대한 증오마저 녹여버릴 만큼 따뜻하고 강인한 ‘삶’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역사의 패배자들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모든 생명의 찬가였다.
“……아.”
깨달음의 빛이, 지운의 영혼을 밝혔다. 그의 입가에, 피 묻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왕의 오만한 미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 자의, 평온하고 자애로운 미소였다.
“왕이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는 자가 아니었어.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과 함께하는 존재였구나.”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왕으로서의 고독한 기록과 의지를, 서화가 보내온 따뜻한 생명의 강물에 기꺼이 흘려보냈다. 두 개의 기록이 하나로 섞이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강물에, 한 방울의 금빛 잉크가 스며들어 아름답게 퍼져나가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사인검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 찬란하고 위엄 있던 황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루의 끝, 모든 것을 보듬고 내일의 희망을 약속하는 해 질 녘 노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왕의 분노가 아닌, 이 땅의 모든 생명이 함께 꾸는 꿈이 담겨 있었다.
“네놈… 그 힘은…! 감히! 고작 하루살이 같은 벌레들의 목숨 따위를 끌어모아, 신에게 맞서려 하는 것이냐!”
천무가 처음으로 당혹감을 넘어선 경악을 드러냈다. 그의 증오가, 저 이해할 수 없는 따뜻한 빛 앞에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힘은 거대한 증오와 절망이라는 단일한 감정을 기반으로 했지만, 저 빛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억 개의 작은 희망과 사랑, 슬픔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너무나도 작았지만, 너무나도 많았다. 그의 거대한 어둠이, 저 무수한 빛의 입자들 앞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지키려던 것이다.”
지운이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생명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겹쳐져, 하나의 거대한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그의 마지막 일격이, 천무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파괴를 위한 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 위로하고, 정화하는, 이 땅의 모든 ‘삶’이 담긴, 기록의 검이었다. 검은 번개의 창과, 노을빛의 검. 두 개의 세계가, 마침내 마지막 충돌을 일으켰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검은 번개의 창과 노을빛의 검이 충돌하는 순간, 남산 광장의 시간은 멈췄다. 폭발도, 굉음도 없었다. 대신, 두 개의 절대적인 의지가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한 소리 없는 영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의 충돌이 아닌, 두 개의 세계관이 서로의 존재를 걸고 벌이는 마지막 투쟁이었다.
천무의 창 끝에서는, 수천 년간 쌓인 증오와 절망이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려 했다. 그 어둠 속에서 지운은 보았다. 전란 속에서 비명횡사한 병사들의 고통, 역병으로 스러져간 아이들의 슬픔,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노예들의 절규.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무거운, 이 땅의 모든 상처와 눈물을 모아 만든 절망의 바다였다. 그 바다는 지운의 영혼을 잠식하며 속삭였다. '보아라, 이것이 세상의 본질이다. 고통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이다.'
하지만 지운의 검 끝에서 피어난 노을빛은, 그 모든 어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것은 어둠을 파괴하는 빛이 아니었다. 어둠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온기였다.
그 빛 속에는, 서화가 목숨을 걸고 전해준 이 땅의 모든 ‘삶’이 담겨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피어난 작은 들꽃의 환희.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며 웃음 짓는 어머니의 사랑.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만선을 꿈꾸며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희망. 누군가를 위해 밤새워 끓이는 따뜻한 수프의 기록, 첫사랑의 설렘을 담은 낡은 편지의 기록, 고된 하루 끝에 마시는 소주 한 잔의 위로까지.
거대한 절망과, 무수히 많은 작은 희망.
세상을 끝내려는 단 하나의 거대한 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수억 개의 작은 의지.
두 개의 세계는 서로를 파괴하지 않았다. 노을빛이, 검은 번개를 서서히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차가운 얼음이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리듯, 칠흑 같던 절망의 바다에 따뜻한 노을빛이 스며들어 그 색을 바꾸고 있었다. 천무가 쏘아 올린 거대한 증오의 기록 위에, 지운이 전하는 무수한 삶의 기록들이 겹쳐 써졌다. 왜군의 칼에 쓰러진 병사의 마지막 고통 위로, 그가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나누었던 첫 입맞춤의 기억이 피어났다. 역병으로 죽어가던 아이의 외로움 속으로, 어머니가 불러주던 따뜻한 자장가의 멜로디가 흘러 들어갔다.
“이럴… 리가… 없다….”
천무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을 넘어선 ‘이해할 수 없음’이 떠올랐다. 그의 거대한 증오가, 이름 모를 민초들의 소박하고 하찮은 삶 앞에서 힘을 잃고 있었다. 그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의 힘은 거대한 슬픔과 분노라는 단일하고 강력한 감정의 총합이었다. 하지만 저 빛은 달랐다. 기쁨, 슬픔, 사랑, 희망, 후회, 용서… 셀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처럼 보였다. 단일한 어둠이, 무수한 색을 가진 빛의 집합을 이겨낼 수 없었다.
“어째서냐! 나의 분노가! 나의 절망이! 이 위대한 고통의 역사가! 어째서 저런 하루살이들의 먼지 같은 감정 따위에게…!”
그가 절규하며 더욱 강력한 어둠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을빛은 더욱더 밝고 따뜻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네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운의 목소리가, 수많은 생명의 합창이 되어 울려 퍼졌다. 그의 몸은 부서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한지운이 아니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삶을 대변하는 기록의 화신이었다.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한 송이 꽃을 피워내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일어서서 서로를 보듬는 인간의 의지를. 너는 그 모든 것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들과 함께 울고 웃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을빛은 마침내, 검은 번개의 창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칠흑의 창은 이제, 세상을 비추는 거대한 횃불처럼 따스한 주황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크… 아아….”
천무의 손에 들려 있던 창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그가 평생 외면하고 경멸해왔던 ‘삶의 기록’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인간들의 기쁨과 슬픔을, 사랑과 희망을 강제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구원이 아닌, 가장 끔찍한 형벌이었다.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자신의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고통이었다.
“아… 아아… 이것이… 이것이었나….”
그의 몸이, 발끝부터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증오로 이루어졌던 그의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따뜻함 앞에서 소멸하고 있었다.
“이것이… 너희가 지키려 했던… 세상인가…. 이토록… 시끄럽고… 번잡하며… 아름다운….”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증오가 아닌 허무한 물음이자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답을 찾지 못한 채 밤하늘의 별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
천무가 사라지는 순간, 그를 지탱하던 모든 저주가 힘을 잃었다. 남산 타워를 휘감던 뼈 기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광장을 뒤덮었던 혈문은 빛을 잃고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변했다. 그림자 병사들은 비명도 없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고, 서울의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구름이 걷히며, 상처투성이의 도시 위로 본래의 고요한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
서화의 황금빛 방어막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지운의 마지막을 지켜본 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조용히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모든 생명력을, 그에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서화 씨!”
최민준과 장서린이 절규하며 달려갔다. 장서린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맥을 짚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장의 중심.
모든 것을 끝낸 한지운 역시,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사인검이, 쨍-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수많은 노을빛 조각이 되어 부서져 내렸다. 왕의 권능도, 기록자의 사명도, 이제 모두 끝났다는 상징이었다.
그의 마지막 사명은, 끝났다.
왕으로서, 기록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지켜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했다.
그의 몸이, 서화의 뒤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의식이 멀어지는 마지막 순간, 그의 귓가에는 폐허가 된 도시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동료들의 절박한 외침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서울의 심장, 남산 타워 아래. 상처 입은 도시의 고요한 새벽이, 모든 것을 불태운 두 영웅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천무가 소멸하고 지독했던 저주가 걷힌 남산 광장은,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난파선처럼 처참했다. 부서진 뼈 기둥의 잔해와 말라붙은 핏자국,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운 두 영웅. 그 고요함 속에서, 최민준과 장서린의 절규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서화 씨! 정신 차려요, 서화 씨!”
장서린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서화의 손목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맥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의료용 스캐너는, 이미 오래전에 생명 신호가 끊겼다는 절망적인 데이터만을 띄우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그녀는 완벽한 죽음을 맞이했다.
최민준은 말을 잃었다. 그는 쓰러진 지운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왕도, 기록자도 아닌, 그저 모든 것을 잃고 잠든 한 청년. 그의 숨결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했다. 도시를 구했지만, 동료를 잃었다. 이 끔찍한 승리 앞에서, 노련한 형사의 단단했던 어깨가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돌쇠와 연화를 필두로 한 월하(月下)의 정예 요원들이었다. 박종윤의 연락을 받고, 최악의 상황을 직감하며 달려온 것이다.
“…….”
연화는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돌쇠는 묵묵히 다가와, 먼저 서화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운에게로 향했다.
“아직… 숨은 붙어있다.”
돌쇠의 낮은 목소리에, 장서린이 절망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의미 없어요! 뇌 활동이 거의 정지 상태고, 모든 장기 기능이 멎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몇 분 안에…!”
“아니.”
돌쇠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지운의 손등에 새겨진 옥 매미 문양을 가리켰다. 마지막 전투의 여파로 빛을 잃었던 옥 매미가, 아주 희미하지만 고집스럽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그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돌쇠의 시선이, 쓰러진 서화에게로 향했다. 그는 서화의 손을 들어, 지운의 손 위로 조심스럽게 포갰다. 두 사람의 손이 닿는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지운의 옥 매미 문양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이, 실처럼 뻗어 나와 서화의 몸을 한 바퀴 휘감았다. 그것은 생명의 빛이 아니었다. 지운이 서화에게 건네받았던 ‘삶의 기록’, 그리고 지운이 서화에게 남겼던 자신의 ‘기록’이, 서로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마지막 연결고리였다.
“두 사람의 기록이… 서로에게 얽혀있습니다.”
연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쪽이 완전히 소멸하면, 다른 한쪽도 무너질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아직 둘 다, 이 세상에 묶여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최민준은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내가 막겠다.”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들은… 저들을 데리고 가. 병원이 아니야. 당신들의 그 비밀 기지로. 살릴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돌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하의 요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들것에 옮겼다. 장서린은 망설였다. 과학자로서, 그녀는 이미 사망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동료로서, 그녀는 이 기적 같은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녀는 결심한 듯, 최민준을 보며 말했다.
“제가 가진 의학 지식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최민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하의 무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 그는 홀로 남아 다가오는 경찰차의 불빛을 마주했다. 그의 전쟁은, 이제 빛의 세계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대한민국은 ‘남산 국립공원 가스 폭발 테러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정부는 정체불명의 테러 단체가 벌인 일이라 발표했고, 현장에서 조직을 막아선 최민준 형사는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그는 얼마 후 조용히 사직서를 제출했다.
독립문 여관 지하실.
그곳은 이제 새로운 ‘기록의 수호자들’의 비밀 기지가 되어 있었다.
싸늘한 침상 위에, 지운과 서화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장서린은 일주일 내내 잠도 자지 않고 두 사람의 상태를 분석했다.
“기적이에요… 서화 씨는 분명 모든 생명 활동이 멈췄는데, 지운 씨와 연결된 ‘기록’ 때문에 세포의 부패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어요. 두 사람은 이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공생 관계가 된 겁니다.”
박종윤은 전 세계의 신화와 역사를 뒤지며 『금단의 기록』에 나타난 문장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었다.
[기록은 기록으로만 채울 수 있으며, 꺼져버린 생명은 더 위대한 생명의 기록으로만 되살릴 수 있다.]
“‘더 위대한 생명의 기록’… 그게 대체 뭘까….”
모두가 침묵에 빠져 있던 그때, 박종윤이 모니터 앞에서 외쳤다.
“찾았어요… 어쩌면….”
그의 화면에는, 아주 오래된 고문서의 한 구절이 확대되어 있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리기 전, 모든 생명의 ‘첫 번째 기록’을 품은 바위가 제주(濟州)의 깊은 곳에 잠들었으니…」
최민준이, 어느새 그들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배낭이 들려 있었다.
“제주도… 말이 되는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가장 척박한 땅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들이 살아남은 곳. 그곳이라면, 새로운 시작의 기록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의 말에, 모두의 눈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싸움은 끝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왕과 기록자를 잠에서 깨울, 태초의 ‘생명’을 찾기 위한.
그들의 길고 긴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