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뱃사공
일주일이 흘렀다. 세상은 평온했다.
서울 외곽 폐제지공장의 붕괴 사고는, 노후 건물의 가스 폭발로 잠정 결론 내려졌다. 현장에서 발견된 수십 구의 신원 미상 시신들은, 불법 체류자들의 비극적인 사고로 처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한지운과 신원 불명의 여성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자 유력한 용의자로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은 그렇게,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준 형사는 잊지 않았다.
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남색 빛 눈동자는, 부검대 위에 놓인 한 구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일주일 전에 실종된 사람이 맞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서류상으로는요.”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최 형사의 것보다 더 건조하고, 더 날카로웠다. 장서린. 국과수 법의인류학팀의 팀장이자, 국내 최고의 뼈 전문가. 그녀는 핀셋으로 시신의 피부 조직을 떼어내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피부 조직은 완전히 탈수됐고, 내부 장기는 흔적도 없이 소실. 근육은 전부 섬유질로 변했죠. 전형적인 미라화 현상입니다. 문제는….”
그녀는 핀셋을 내려놓고, 최 형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과 짜증이 뒤섞인, 고양이의 눈을 닮아 있었다.
“이런 완벽한 미라가 만들어지려면, 최소 수백 년은 건조한 사막이나 빙하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 만에, 그것도 축축한 저수지 바닥에서 발견된 시신이 이 꼴이 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형사님.”
“불가능한 일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박사님.”
“그래서 제가 짜증이 나는 겁니다.”
장서린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는, 시신의 뼈를 3D 스캔한 이미지가 떠 있었다.
“더 웃기는 건 이겁니다.”
그녀는 이미지를 확대했다. 피해자의 왼쪽 쇄골. 그곳에는, 무언가에 긁힌 듯한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사후 동물에 의한 손상인 줄 알았죠. 그런데 현미경으로 분석해보니….”
화면이 다시 확대되었다. 긁힌 흔적은, 기이한 형태의 문양이었다. 마치 고대의 상형문자처럼.
“이건….”
최 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 문양을 본 적이 있었다. 한상현의 책, 『금단(禁斷)의 기록』에서.
“글쎄요. 의미 불명의 낙서일려나요?”
장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중요한 건, 이 상처가 죽기 전에 생긴 게 아니라는 겁니다.
뼈가 완전히 마른 뒤에, 즉 미라가 된 후에 새겨졌어요. 누가 죽은 시체 뼈에다 이런 장난을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이 아닐 겁니다.”
최 형사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눈에는, 3D 이미지 너머의 것이 보이고 있었다. 문양이 새겨진 뼈 주위로, 희미하지만 지독하게 차가운 검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죽음의 흔적. 하지만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영혼까지 ‘수확’당한 자의 텅 빈 잔해였다.
“또 그놈의 ‘감’ 타령이신가요, 형사니임?”
장서린이 비꼬듯 물었다.
“전 데이터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형사님의 그 비과학적인 직감 말고, 증거를 가져오세요. 증거를.”
“증거는… 지금부터 찾아야죠.”
최 형사는 장서린의 책상 위에 놓인, 피해자의 유류품 봉투를 가리켰다.
“저 안에, 혹시 동전 같은 건 없었습니까?”
“동전이요? 글쎄요, 낡은 엽전 하나가 있긴 했는데….”
장서린이 봉투를 뒤져, 녹슨 엽전 하나를 꺼내 보였다.
‘상평통보(常平通寶)’.
최 형사는 엽전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지산 노인이 주었던 ‘風’ 자 나무패를 꺼내, 그 위에 엽전을 올려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하세요? 그건 또 뭐에요? 부적이라도 되나요?”
장서린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글쎄요.”
최 형사는 엽전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보았다. 엽전이 나무패에 닿는 아주 찰나의 순간. 엽전의 구멍 속에서, 붉은 안광이 희미하게 번뜩이는 것을. 그것은 잠들어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부검 결과 정리해서 보고서 올려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최 형사는 짧게 말하고, 부검실을 나섰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새로운 희생자. 기이한 문양. 그리고 엽전. 이것은 화천회의 소행이 아니었다. 그들과는 다른, 또 다른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밤. 모두가 퇴근한 국과수 부검실. 장서린은 홀로 남아, 미라의 뼛조각을 다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오기였다.
“대체… 뭐야….”
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무심코 뼛조각을 맨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악-
그녀의 머릿속으로, 차가운 이미지가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안개 낀 강. 삐걱거리는 나룻배. 삿갓을 쓴 뱃사공. 그리고, 강물 속에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수백 개의 하얀 손.
“헉!”
장서린은 비명을 지르며 뼛조각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환각.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그리고, 뱃사공이 읊조리던, 기이한 노랫소리.
“산 자는 건너지 못하리…. 이 강은… 죽은 자의 길이니….”
“이 강은… 죽은 자의 길이니….”
노랫소리가, 텅 빈 부검실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장서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맥박을 짚었다. 분당 120회. 비정상적인 빈맥. 그녀는 즉시 부검실의 공기 성분 분석기를 가동하고, 자신의 혈액을 채취해 독극물 반응 검사를 시작했다. 환각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가능성을, 그녀는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말도 안 돼….”
몇 시간 뒤, 그녀는 모니터 앞에 망연히 서 있었다. 공기 성분, 정상. 혈액 반응, 정상. 그녀의 몸과 이 공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녀가 본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젠장.’
그녀는 욕설을 씹어 뱉었다. 그녀가 평생을 부정하고 도망쳐왔던 세상. 할머니의 낡은 경대 앞에서, 굿을 하고 점을 치던 그 혐오스러운 세상이, 그녀의 발목을 다시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과학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피는, 무당의 피였다.
“데이터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
그녀는 결심했다. 그녀는 피해자의 신원 조회 파일을 다시 열었다. 평범한 회사원.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고독한 삶. 하지만 단 하나,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사후 세계’와 관련된 인터넷 동호회에 심취해 있었다.
장서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국과수의 방화벽을 우회해, 동호회의 비공개 서버로 침투했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글들이 있었다. 죽음을 동경하고, 현세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하는 자들의 절망적인 아우성.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뱃사공’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자가 있었다.
‘모든 고통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해 드립니다.’
‘뱃삯으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만 받겠습니다.’
장서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단순한 동호회가 아니었다. 죽음의 상인. 영혼의 사냥꾼이, 먹잇감을 물색하는 거대한 어장이었다. 그녀는 ‘뱃사공’의 IP 주소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거미줄처럼 얽힌 수백 개의 가상 서버 뒤에 숨어, 결코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듯이.
“저승의 뱃사공, ‘바리’로군요.”
경기도 외곽의 한옥.최민준 형사는 지산 노인이 내어준 차가운 엽전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는 방금, 국과수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렇지.”
지산은 끄떡였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가장 오래된 전설 중 하나일세. 이승과 저승의 경계, 황천(黃泉)의 강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존재. 하지만 그놈은 진짜 ‘바리’가 아닐세. 그 이름을 참칭(僭稱)하는, 더 사악하고 뒤틀린 무언가이지.”
“화천회와는 다른 세력입니까?”
“다르다마다.”
지산의 목소리에, 깊은 혐오감이 서렸다.
“화천회는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만, 저놈들은 세상을 ‘수확’하려 하네. 인간의 영혼을, 마치 잘 익은 곡식처럼 거두어들이는 자들이지. 그들에게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무의미해. 그저 자신들의 곳간을 채울 ‘재료’일 뿐이야.”
“엽전은….”
“뱃삯일세.”
지산이 말했다.
“저승길 노잣돈. 저 엽전을 가진 자는, ‘바리’의 표적이 되네. 그는 영혼을 거두는 대가로, 이 땅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바로 그 뼈에 새겨진 문양처럼.”
“그렇다면, 이 사건은 계속해서….”
“그렇지. ‘바리’는 멈추지 않을 걸세. 이 땅에 절망하고 고통받는 영혼이 있는 한.”
지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왔다. 한상현의 책과는 다른, 표지조차 없는 고서였다. 그는 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 최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안개 낀 강을 건너는 삿갓 쓴 뱃사공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장서린이 보았던 환각,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에는, 붉은 먹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강을 건너는 자, 돌아오지 못하리.』 『오직, 길을 잃은 영혼만이 그를 부를 수 있으니.』
“길을 잃은 영혼….”
최 형사는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왕의 저주에 잠식당한 채, 자신의 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남자. 한지운.
“젠장….”
박종윤의 연구소.
서화는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왕이 남기고 간 독기는, 그녀의 상처를 아물게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세상이 이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의 연구소 풍경 위로, 안개 낀 강과 나룻배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오너라….’
귓가에, 뱃사공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너 또한… 길을 잃은 자로구나….’
“서화 씨!”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박종윤이, 다급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그 순간이었다. 연구소의 모든 모니터가, 치직- 소리를 내며 일제히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진 화면에는 화면 가득, 텅 빈 눈의 원혼들이 강물 속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로. 삿갓을 쓴 뱃사공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면 너머의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손님은…너희들이로구나.”
뱃사공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 자체를 울리며, 세 사람의 뼛속까지 직접 파고들었다. 연구소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최첨단 항온항습 장치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렸지만, 소용없었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고,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안개 낀 강가의 새벽처럼,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젠장, 네트워크 강제 차단!”
박종윤이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연구소와 외부 세계를 잇는 모든 물리적, 가상적 연결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모니터 속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디지털 신호가 아니었다. 뱃사공은, 이 연구소의 모든 ‘창(모니터)’을 자신의 ‘눈’으로 삼아, 저승의 풍경을 현실에 투영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강물이 넘실거리는 소리. 수백 명의 원혼들이 울부짖는 소리. 모든 소음이 연구소 안을 가득 채웠다. 박종윤은 귀를 막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데이터가 아닌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화면 속 원혼들의, 죽기 직전의 절망적인 기억들. 그의 이성이, 이 거대한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크… 아….”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서화였다. 그녀의 몸이,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뱃사공의 부름에, 그녀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저 강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화면 속 강물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녀의 팔뚝, 검게 변한 용의 문신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왕의 독이, 뱃사공의 힘에 반응하고 있었다.
‘길을 잃은 자.’
‘상처 입은 자.’
‘주인을 잃은 자.’
뱃사공의 목소리가, 오직 그녀에게만 속삭였다.
‘이리 오너라. 내가 너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마.’
그녀의 발이, 저도 모르게 모니터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뎌졌다. 그녀의 영혼이, 거의 강물에 닿으려던 순간.
“감히!!”
모든 소음을 찢어발기는, 얼음 같은 목소리. 왕이었다. 그는 유리창 앞에 서서 미동도 없었지만, 그의 분노는 연구소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는 뱃사공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에 손을 대는 하찮은 도둑놈을 보고 있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짐의 것에 손을 대는가!”
그의 말이 끝나자, 서화의 옷깃에 숨겨져 있던 작은 통신 장치에서, 검푸른 빛이 폭발했다.
화악-!
빛은 쇠사슬처럼 뻗어 나와, 강물로 끌려가던 서화의 영혼을 휘감아, 현실의 육체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커헉!”
서화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더 강력한 주인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뿐이었다.
“네놈….”
화면 속, 삿갓 아래의 어둠 속에서. 뱃사공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는 서화의 영혼에 묶인, 더 거대하고 오래된 존재의 ‘낙인’을 본 것이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모니터 속 뱃사공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네놈이냐.”
왕이 물었다.
“짐의 백성을 훔쳐, 너의 곳간을 채우는 쥐새끼가.”
그 순간, 연구소의 모든 모니터 화면이 일제히 바뀌었다. 안개 낀 강과 원혼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텅 빈 옥좌가 놓인 거대한 대전(大殿).
한지운의 정신세계, 기록자의 도서관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옥좌에, 왕이 앉아 있었다. 그는 턱을 괸 채, 화면 너머의 뱃사공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의 강은, 곧 마를 것이다.”
왕이 선언했다.
“그리고 네놈의 배는, 짐의 정원을 꾸미는 장작이 될 게다.”
“……!”
뱃사공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수천 년간 죽은 자들의 강을 지배해왔지만, 살아있는 ‘왕’의 분노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영혼을 수확하는 자이지, 왕과 싸우는 자가 아니었다.
스르륵.
모든 모니터가, 약속이나 한 듯 꺼졌다. 뱃사공은 스스로 물러났다. 더 강한 포식자 앞에서, 꼬리를 내린 것이다. 연구소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의 고요함이 아니었다. 차가운 강물의 냉기 대신,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왕의 분노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박종윤은 멍하니,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친구 몸을 차지한 저 왕이라는 존재는, 화천회뿐만이 아니라, 저승의 존재에게까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 단순히 세상을 구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고대의 왕이, 자신의 왕국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그때였다.
삐빅- 삐빅- 삐빅-
박종윤의 메인 컴퓨터에 연결된 수십 개의 보조 모니터 중 하나가,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가 서울시의 모든 긴급 통신망을 감시하도록 설정해 둔 프로그램이었다.
“뭐야…?”
그는 홀린 듯 자리로 다가가, 경고가 울리는 창을 띄웠다. 그것은 경찰 내부망에서 공유되고 있는, 최우선 긴급 보고였다.
[사건 개요: 한강 마포대교 인근 변사체 발견]
[상태: 신원 미상 남성. 전신이 미라처럼 마르고 뒤틀려 있음. 국과수 부검 예정.]
“미라…?”
박종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에 첨부된 현장 사진 파일을 열었다.
‘설마….’
그는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경찰의 신원 조회 시스템 방화벽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갔다. 그는 현장에서 수습된 지문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조회 결과: 일치]
[성명: 한정호 (韓正皓)]
모니터에 떠오른 이름. 박종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한지운의, 아버지였다. 뱃사공. 그놈이, 왕에게 보복한 것이다. 너의 ‘소유물’을 건드렸으니, 나 또한 너의 ‘근원’을 베었다는,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방식으로. 박종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창가에 서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왕의 뒷모습을 향했다. 어떻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자신의 친구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소식을. 그의 고뇌를 비웃듯,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나의 신하. 그렇게 소란을 피울 만한,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시작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