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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로 딸에게 전화를?

AI 보이스피싱의 공포

by 돌부처

어느 평화로운 오후,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옵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누릅니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빠! 나 사고 쳤어... 친구 오토바이 타다가 사람을 쳤는데 합의금 당장 안 보내면 경찰서 간대. 무서워 죽겠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분명 유학 가 있는, 혹은 대학에 간 내 아들 목소리가 맞습니다. 특유의 말투, 겁먹었을 때 떨리는 호흡까지 똑같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됩니다. 당장 돈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가짜였습니다.

아들은 그 시각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당신이 들은 목소리는 AI가 만들어낸 '합성음'이었습니다. 심지어 범인들은 당신 아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온 15초짜리 짧은 동영상에서 목소리를 추출해, 단 몇 분 만에 완벽한 복제 음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공포 영화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AI 피싱'의 실제 사례입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내 눈과 귀를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은 이제 틀렸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속는 것일 수도 있는 세상. AI가 가져온 편리함의 이면에 도사린 이 시커먼 그림자 앞에서, 우리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나와 내 가족을 지켜야 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단순히 "조심하세요"라는 뻔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술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는지 그 교묘한 메커니즘을 파헤치고, 마치 현관문에 디지털 도어락을 달듯 우리 가족의 뇌와 스마트폰에 강력한 '심리적 방화벽'을 설치하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드리려 합니다.


먼저, 우리가 직면한 위협의 실체부터 똑바로 마주해 봅시다. 과거의 보이스피싱을 기억하시나요? 어눌한 말투로 "김미영 팀장입니다"라고 하거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습니다"라며 기계적인 멘트를 날리는 수준이었죠.

우리는 이전에는 이런 전화를 받으면 피식 웃으며 끊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저런 거에 속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AI 피싱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를 '딥보이스'라고 부르는데, 범죄자들은 AI에게 당신 가족의 목소리 샘플을 학습시킵니다.


놀랍게도, 목소리를 복제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는 단 '3초'면 충분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발리(VALL-E) 같은 모델은 3초 분량의 오디오만 있으면 그 사람의 음색과 감정까지 흉내 냅니다. SNS에 올린 브이로그 영상, 틱톡 챌린지, 심지어 유튜브에 올린 돌잔치 영상 속에 담긴 우리 아이, 내 배우자의 목소리가 범죄의 재료가 됩니다.


범죄자들은 이 목소리에 대본을 입력합니다.


"엄마, 나 납치당했어"

"여보, 나 지금 교통사고 났는데 보험 처리가 안 돼."


텍스트를 입력하면 AI가 그 목소리로 읽어주는 TTS(Text-to-Speech) 기술이 악용되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건 '딥페이크' 영상입니다. 목소리만 들리면 의심이라도 해볼 텐데, 영상 통화로 얼굴을 보여준다면요? 홍콩의 한 다국적 기업에서는 재무 담당 직원이 화상 회의에 참석했다가 340억 원을 송금하는 사기를 당했습니다. 회의 화면에 뜬 최고재무책임자와 동료 직원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모두 진짜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AI로 만든 가짜였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진짜 인간은 사기당한 직원 단 한 명뿐이었죠.


기업의 임원도 속는데, 하물며 은퇴하신 부모님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 영상 통화 속 내 얼굴을 보고 "비밀번호 좀 알려달라"는 말에 안 속고 배길 수 있을까요?




이 기술의 발전 속도는 소름 끼칠 정도입니다. 예전에는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려면 고성능 컴퓨터와 전문가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앱 하나면 초등학생도 친구 얼굴을 유명 배우 몸에 합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지인 능욕방'이나 딥페이크 성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처럼 기술의 문턱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내 사진 한 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에 악용되고, 나의 명예와 인격을 살해하는 흉기가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선을 '가짜 뉴스(Fake News)'로 돌려봅시다. 보이스피싱이 개인의 지갑을 털어간다면, AI가 만든 가짜 뉴스는 사회의 신뢰를 털어갑니다. 생성형 AI는 1초에 수백 개의 기사를 쏟아낼 수 있습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이고 클릭을 유도할 수만 있다면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지난 2023년, 미 국방부 청사 옆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사진 한 장이 트위터를 강타했습니다. 주식 시장은 출렁거렸고 S&P 500 지수가 순간적으로 급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AI가 그린 가짜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품 패딩을 입고 힙한 포즈를 취한 사진을 기억하시나요? 많은 사람이 "교황님 멋쟁이네"라며 웃고 넘겼지만, 이는 AI가 얼마나 감쪽같이 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준 서늘한 경고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뉴스 기사나 사진을 볼 때조차 "이거 진짜 맞아?"라고 의심해야 하는 피곤한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는 비용, 즉 '신뢰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투자 정보를 찾을 때도, 선거에서 투표할 때도, 심지어 맛집 리뷰를 볼 때도 AI가 조작한 정보가 아닌지 필터링해야 합니다.




자, 현상 진단은 이쯤에서 멈추고 이제 '생존 매뉴얼'을 펼쳐보겠습니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창이 날카로워지면 방패도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수칙들은 의외로 아주 단순하고 아날로그적입니다. 기술로 공격해 오는 적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적인 약속들입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방어책은 바로 '우리 가족만의 암호'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첩보 영화 찍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장 오늘 저녁 식탁에서 가족들과 정해야 할 필수 생존 수칙입니다. AI는 내 목소리, 내 얼굴, 내 말투, 심지어 내가 자주 쓰는 단어까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가족끼리만 공유하는 '비밀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가족의 암호는 '빨간 내복'이야."라고 정해두는 겁니다. 만약 딸에게서 "아빠, 나 핸드폰 잃어버려서 친구 폰으로 전화했는데 급하게 돈 좀 보내줘"라는 전화가 왔다고 칩시다. 목소리는 딸과 똑같습니다. 이때 당황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어, 그래? 많이 놀랐겠네. 근데 우리 암호가 뭐지?"


진짜 딸이라면 "아빠 지금 장난해? '빨간 내복'이잖아! 빨리 보내줘!"라고 짜증을 낼 겁니다. 하지만 AI나 사기꾼은 당황하며 횡설수설하거나 전화를 끊을 것입니다. 이 유치하고 단순한 단어 하나가 수천만 원, 아니 내 전 재산을 지키는 최후의 자물쇠가 됩니다. 부모님께도 꼭 알려드리세요. "엄마, 내가 아무리 급하다고 전화해도 '암호' 안 대면 절대 돈 보내지 마. 내가 납치됐다고 해도 암호부터 물어봐."라고 신신당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영상 통화의 허점 찌르기'입니다.

혹시 영상 통화로 지인이 돈을 요구한다면, 100% 믿지 말고 이렇게 시켜보세요.


"옆으로 고개 좀 돌려봐."

"손을 얼굴 앞으로 흔들어봐."


현재의 실시간 딥페이크 기술은 정면 얼굴은 완벽하게 구현하지만, 고개를 급격하게 돌리거나 얼굴 위로 물체가 지나갈 때 합성이 풀리며 일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특히 안경을 쓴 사람이라면 안경 테두리가 얼굴에 녹아들거나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화질이 좋지 않거나 끊긴다는 핑계를 대며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적신호입니다.


세 번째는 '제로 트러스트', 즉 아무것도 믿지 않는 태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번호는 물론이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가 와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발신 번호 조작' 기술 때문입니다. 경찰청, 검찰청, 금융감독원 번호가 찍혀 있어도 일단 의심해야 합니다. 관공서나 금융기관은 절대 전화로 돈을 요구하거나 앱 설치를 유도하지 않습니다. 문자로 온 링크는 내 손가락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누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세요.


"택배 주소지가 잘못되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혼식 청첩장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누르는 이 버튼들이 해킹 앱을 설치하는 통로가 됩니다.

만약 가족이 납치되었다거나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면, 당황해서 범인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일단 '끊고 다시 걸기'를 하세요. 범인은 "지금 끊으면 큰일 난다"고 협박하겠지만, 과감하게 끊고 가족의 원래 번호로 다시 걸어봐야 합니다. 99%는 통화 중일 것입니다.


네 번째는 'SNS 다이어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범죄의 재료는 우리가 스스로 공개한 데이터입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에 전체 공개로 올려둔 우리 아이의 얼굴, 목소리, 학교 정보, 여행 일정은 사기꾼들에게 "나를 속여주세요"라고 떠먹여 주는 꼴입니다.


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친구 맺은 사람만 볼 수 있게 설정하세요. 특히 아이들의 얼굴이 정면으로 나온 고화질 사진이나 목소리가 선명하게 담긴 동영상은 업로드를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애 너무 예쁘죠?"라는 자랑이 "우리 애 목소리 좀 복제해 가세요"라는 초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모르는 사람이 볼 수 없게 '멀티 프로필'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문해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가짜 뉴스에 속지 않기 위한 백신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충격적인 기사나 사진을 봤을 때, 흥분해서 단톡방에 퍼 나르기 전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세요. 그리고 출처를 확인하세요. 듣도 보도 못한 언론사 거나, 작성자가 불분명하다면 가짜일 확률이 높습니다. 구글의 '이미지 검색' 기능을 활용해 해당 사진의 원본이 어디인지 찾아보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보를 소비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는 '감독관'이 되어야 합니다. "뉴스에 났다더라"가 아니라 "팩트 체크 된 거야?"라고 묻는 까칠함이 여러분의 지갑과 멘탈을 지켜줍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가장 귀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AI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목소리도 흉내 내는 세상에서, 결코 위조할 수 없는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오프라인에서의 관계'와 '실재하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딥페이크가 정교해도, 지금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는 가족의 온기는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AI 챗봇이 말을 잘해도, 힘들 때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친구의 위로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 가상의 세계가 화려하고 교묘해질수록, 우리는 현실의 관계를 더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우리 집 암호'를 정해 보세요. "에이, 무슨 그런 걸 해"라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 자체가 서로를 지키겠다는 사랑의 확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려보세요. AI 목소리가 아닌, 당신의 진짜 육성으로 안부를 묻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세요.


"엄마, 요즘 세상이 이렇대. 내 목소리라도 돈 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마. 우리 암호는 '삼겹살'이야. 알았지?"


이 사소한 대화가 최첨단 보안 시스템보다 더 강력한 방화벽이 되어줄 것입니다. AI 시대의 안전은 기술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관심과 의심, 그리고 확인에서 시작됩니다. 두려워만 하지 말고, 똑똑하게 의심하고 현명하게 확인합시다. 그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 혼란한 시대를 건너는 생존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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