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푸른 비늘의 저주

상편

by 돌부처

서울의 동쪽 관문, 동대문.


해가 지면 더욱 화려하게 깨어나는 패션의 메카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땀, 그리고 돈이 얽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욕망의 도가니. 하지만 그날 밤의 동대문은 평소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랐다. 거대한 쇼핑몰들을 휘감은 LED 전광판은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불안하게 깜빡거렸고,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의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과 신경질적인 불안이 짙게 서려 있었다. 공기 자체가 끈적하고 무거워,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에 찝찝한 먼지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기운이... 너무 탁해요. 숨이 막힐 정도로.”


하진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DDP의 곡선형 옥상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화려한 DDP의 야경 너머,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동쪽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거대하고 검푸른 먹구름 같은 것이 똬리를 튼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단순한 날씨 탓이 아니군. 저 구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어.”


옆에 선 윤도진이 고성능 야투경으로 하늘을 살피며 말했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구름의 움직임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었다. 구름 사이사이로 번뜩이는 것은 번개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짐승의 눈동자 같았다.


“백면이 남긴 저주의 씨앗이 발아했어요.”


하진은 목에 걸린 푸른 옥 조각을 꽉 쥐었다. 옥 조각이 불에 달군 쇠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뇌리에 보내고 있었다.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 청룡의 기운이 오염되고 있어요. 저 검은 구름은 비구름이 아니라, 청룡의 분노이자 고통이 형상화된 거예요.”


“청룡이라... 전설 속에나 나오는 용이 미쳐 날뛰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홍수라도 나나?”


이강우가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물었다. 그는 난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지만, 한 손은 언제든 무기를 꺼낼 수 있도록 재킷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청룡은 물과 바람, 그리고 번개를 다스리는 신이에요. 놈이 완전히 타락하면... 이 일대에 끔찍한 국지성 호우와 낙뢰가 쏟아질 거예요.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청룡이 관장하는 생기가 뒤틀린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감정이 폭주하게 되죠.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고, 질투하고, 혐오하는... 인간 본성의 바닥을 보게 될 거예요.”


하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래쪽 쇼핑몰 광장 거리에서 날카로운 고성이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내 신발 밟았잖아!”

“뭐? 이 자식이 죽고 싶나! 밟으면 어쩔 건데!”


평소라면 사과 한마디로 끝났을 사소한 어깨 부딪힘이 순식간에 살벌한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두 남자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뒹굴자, 주변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구경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광기 어린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마치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 관중들처럼, 그들은 누군가가 피 흘리는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벌써 시작됐군요. 사람들의 이성이 마비되고, 폭력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윤도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챙겼다.


“저기 봐. 불이야!”


이강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동대문 시장 골목 안쪽의 낡은 의류 상가 건물 2층 창문에서 시뻘건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튀어나왔다. 원인 불명의 화재였다.


“가야 해요. 청룡의 기운이 더 폭주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막아야 해요.”


하진이 서둘러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윤도진과 이강우도 지체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화재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소방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진입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구경꾼들과 불법 주차된 오토바이들 때문에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상가 건물은 이미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물! 물을 더 뿌려!”


소방대장이 악을 쓰며 지시했지만,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마치 불 자체가 지능을 가진 생물처럼, 소방관들이 뿌리는 물줄기를 요리조리 피하며 옆 건물로 옮겨 붙고 있었다.


“이건 평범한 불이 아니에요. 도깨비불... 아니, 오염된 용의 숨결이에요.”


하진은 불길 속에서 푸르스름하고 기이한 기운이 뱀처럼 감도는 것을 보았다. 오염된 청룡의 기운이 화마가 되어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물로는 끌 수 없었다.


“내가 길을 뚫을게. 소방관들이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해 줘.”


이강우가 나섰다. 그는 품에서 푸른색 액체가 든 특수 수류탄을 꺼냈다. 하진이 정화한 성수에 냉각 가스를 압축해 만든 것이었다.


“얼어붙어라, 이 뜨거운 놈아!”


그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불길이 가장 거센 상가 입구로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파아앙!


하얀 냉각 가스가 폭발하며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를 떨어뜨렸다. 맹렬하던 불길이 하얀 서리에 덮이며 일시적으로 사그라들었다.


“지금이에요! 집중 방수하세요!”


윤도진이 소방대장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소방관들이 당황하면서도 일제히 호스를 겨누어 물을 뿌리자, 기세가 꺾인 불길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고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렀다. 불길이 잡히자마자, 이번에는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폭우였다.


콰르릉! 쾅!


고막을 찢는 천둥소리와 함께 푸른 벼락이 쳤다. 벼락은 피뢰침이 아닌, 거리의 가로등과 전광판,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떨어졌다. 유리가 깨지고 전기가 끊기며 거리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청룡이... 화가 났어요. 자신의 영역이 더럽혀진 것에 분노하고 있어요.”


하진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먹구름 속에서 거대한 용의 형상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용은 찬란하고 신성한 푸른색이 아니었다. 썩은 시궁창 물처럼 검고 탁한 녹색 비늘을 번뜩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저 용을 잡아서 회라도 떠야 하나?”


이강우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아니요. 잡는 게 아니라, 정화해야 해요. 놈을 죽이면 동쪽의 지맥이 끊어져 서울의 균형이 무너져요. 청룡의 본체는... 동대문의 상징, 흥인지문의 현판 뒤에 깃들어 있어요. 그곳으로 가야 해요.”


세 사람은 빗줄기를 뚫고 흥인지문으로 달렸다. 도로 위에는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첨벙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흥인지문 앞은 이미 물바다였다. 하수구가 역류해 검은 오물이 섞인 물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흙탕물 속에서... 기괴한 형상의 물고기들이 팔닥거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물고기? 무슨 물고기가 다리가 달려 있어?”


이강우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룡(魚龍)... 청룡을 모시는 권속들이에요. 하지만 백면의 탁한 기운에 오염되었군요...”


어룡들은 팔뚝만 한 크기에, 날카로운 이빨과 뿔이 달려 있었고, 지느러미 대신 작은 다리가 돋아나 있었다. 놈들은 물 밖으로 튀어 올라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수십, 수백 마리의 어룡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젠장, 숫자가 너무 많아. 이걸 다 뚫고 갈 수 있을까?”


이강우가 단검을 뽑아 들며 난감해했다.


“비켜! 저리 가!”


윤도진이 삼단봉을 휘둘러 달려드는 어룡을 쳐냈다. 놈의 몸은 미끄럽고 단단했다. 깡 하는 쇳소리가 났다.


“하진 씨, 당신은 흥인지문으로 가요! 여기는 우리가 맡을게요! 저 괴물들이 문으로 가는 걸 막겠습니다!”

윤도진이 소리쳤다.


“하지만... 너무 많아요!”

하진이 망설였다.


“걱정 마! 이 정도는 횟감 손질하는 수준이라고! 빨리 가!”

이강우가 어룡의 머리를 밟고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하진은 옥 조각을 쥐고 거센 물살을 헤치며 흥인지문의 옹성 안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윤도진과 이강우의 처절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흥인지문은 거대한 결계에 휩싸여 있었다. 검은 안개가 문 전체를 휘감고 있었고, 그 안에서 청룡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굳게 닫힌 성문 앞에 서서 주문을 외웠다.


“동방의 위대한 수호신이여, 부정한 기운을 떨치고 깨어나소서! 당신의 눈을 가린 어둠을 걷어내소서!”


그녀는 옥 조각을 성문의 쇠장식에 갖다 댔다.


파지지직!


옥 조각의 신성한 기운과 결계의 사악한 기운이 충돌하며 스파크가 튀었다. 하진은 튕겨 나갈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때, 검은 안개가 갈라지며 누군가 성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키가 훤칠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 반쪽은 썩어 문드러져 뼈가 드러나 있었고, 눈은 핏발이 선 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염된 청룡의 현신(現身)이었다.


[누구냐... 감히 내 잠을 방해하고, 내 고통을 구경하러 온 자가....]


남자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긁혔고, 입을 열 때마다 검은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는 서 씨 가문의 7대 장녀, 서하진입니다. 당신을 괴롭히는 백면의 저주를 풀고, 정화하러 왔습니다.”


하진은 사인검을 뽑아 들고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정화...? 크크크... 나는 이미 더러워졌다. 뼛속까지 썩어버렸어.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너희가 나를 버렸는데, 이제 와서 정화라니!]


청룡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이었다.


남자가 분노하며 손을 휘두르자, 쏟아지던 빗줄기가 날카로운 얼음 화살로 변해 하진을 덮쳤다.


“안돼!”

하진은 사인검을 춤추듯 휘둘러 빗물 화살을 쳐냈다. 챙챙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 조각이 튀었다.


[가소롭구나! 벌레 같은 것이!]

남자가 입을 벌리자, 푸른 번개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하진은 옥 조각으로 급히 방어막을 쳤지만, 충격으로 뒤로 밀려나 성벽에 부딪혔다. 방어막에 금이 가고, 팔이 저려왔다.


“이대로는... 안돼.”


하진은 절망감을 느꼈다. 신의 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청룡은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고 폭주하고 있었다.


그때, 성벽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지 마, 아가씨!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이강우였다. 그는 어룡 떼를 뚫고 성벽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내가 놈의 시선을 끌게! 틈을 봐서 놈의 심장을 노려!”

이강우가 성벽에서 뛰어내리며 청룡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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