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회색빛 미로 속으로

by 돌부처

트럭이 덜컹거리며 도심의 외곽으로 들어설 때, 차창 밖 풍경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들판과 낮은 지붕들이 사라진 자리에,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들이 벽처럼 늘어선 도시가 나타났다. 그 풍경은 마치 거대한 미로처럼 보였다. 한때 도망치듯 떠나왔던 그 도시의 냄새가 차창 틈으로 스며들자, 정희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살아?"


뒷좌석 짐 더미 사이에 낀 진영이 물었다. 여덟 살, 이제 막 국민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의 눈에는 불안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게 일렁였다.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들과 높은 건물들을 구경하느라 아이는 창문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래.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


정희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졌다. 집이라니. 아직 마음 둘 곳 하나 정해지지 않았는데.


트럭은 화려한 대로를 벗어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힌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붉은 벽돌 담벼락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골목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비좁았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감나무 가지가 트럭의 지붕을 툭툭 쳤다.


"다 왔습니다. 저 집이네요."


트럭이 멈춰 선 곳은 오래된 기와지붕을 얹은 'ㅁ'자 형태의 개량 한옥이었다. 녹지근한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네모난 하늘을 이고 있는 중정(中庭)이 드러났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흙을 돋워 만든 작은 네모난 화단이 있었고,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채송화 줄기들이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화단 옆, 시멘트로 마감된 수돗가에는 녹슨 작두펌프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마중물을 넣고 힘껏 눌러야 물이 콸콸 쏟아진다는 그 펌프는, 마치 이 집의 오래된 세월을 지키는 장승처럼 보였다.


집은 주인이 사는 안채를 중심으로, 마당을 공유하는 서너 개의 문간방들이 'ㅁ'자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정희가 얻은 방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펌프 바로 옆에 붙은 작은 사랑방이었다.


"진영아, 짐 좀 들어라. 엄마랑 같이 옮겨야 해."


진영은 불평 한마디 없이 제 몸집만 한 이불 보따리를 껴안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안방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오느라 고생했네. 펌프는 마중물 한 바가지 부어야 물이 올라오니까, 옆에 받아둔 물 쓰고."


무심히 던지는 말이 도시 깍쟁이 같으면서도, 묘하게 생활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방은 좁았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인 두 명이 누우면 꽉 찰 방 한 칸이 전부였고, 부엌은 방 옆에 덧대어 만든 관 같은 공간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마당의 화단과 펌프가 보였다.


정희는 짐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장판은 곳곳이 닳아 있었고, 벽지는 누렇게 떠 있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펌프가 있는 마당, 네모난 하늘,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사는 이웃들의 숨소리. 이 낯선 풍경 속에서 정희는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맸다. 너와 나, 우리가 살기로 했으니까.




도시의 밤은 시골의 밤과 달랐다.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 골목을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멀리 큰 길가의 자동차 소음이 얇은 벽을 뚫고 들어왔다.


진영은 피곤했는지 이불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정희는 잠든 아이의 손을 잡았다. 거칠어진 손마디. 내일부터는 정말 전쟁이었다.


다음 날부터 정희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아침 일찍 진영을 깨워 학교에 보냈다. 학교는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야 했다.


"진영아, 88번 버스 타는 거야. 학교 앞에서 꼭 내려야 해. 딴 데 가면 안 돼."


정희는 진영의 손에 버스 회수권 두 장을 쥐여주며 신신당부했다.


"알았어, 엄마. 나 이제 국민학생이야."


작은 등으로 커다란 가방을 멘 아이가 골목길을 돌아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정희도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그녀가 구한 첫 번째 일은 보험 외판원이었다. "학력 무관, 주부 환영"이라는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사무실은 낡은 상가 3층에 있었다. 좁은 사무실에는 정희처럼 삶에 쫓기는 여자들이 수십 명 앉아 "할 수 있다!"를 외치고 있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도시에 다시 돌아왔지만, 정희가 할 수 있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것뿐이었다. 낯선 상가 건물을 층층이 뒤지고, 아파트 단지의 경비원 눈을 피해 초인종을 눌렀다.


"아, 안 해요! 재수 없게 아침부터..."


문전박대와 소금 세례는 일상이었다.


저녁이 되면 그녀의 가방은 학습지로 바뀌었다. 낮의 실패를 만회하려 더 필사적으로 골목을 누볐다.


"어머님, 아이 교육 중요하잖아요."


하지만 철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정희는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대문을 열면 어두운 마당 한가운데 펌프만이 그녀를 맞았다. 방문을 열면 캄캄한 방 안에서 웅크리고 잠든 진영이 보였다. 차갑게 식은 밥상 위에는 아이가 먹다 남긴 밥풀이 말라붙어 있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그날은 유난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마당의 화단 흙이 빗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고, 처마 밑으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정희는 아침부터 몸살 기운이 있었지만, 중요한 계약 건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진영아, 냄비에 밥 해놨으니까 점심때 챙겨 먹어. 엄마 오늘 좀 늦을 수도 있어."


이불속에 누워 있는 진영에게 말하고, 정희는 빗속으로 나갔다.


진영은 정오가 지나서야 배가 고파 깼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마당 건너 주인집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웅웅거렸다.


"엄마?"


아무도 없었다. 진영은 부엌 한구석을 뒤적거렸다.


양은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엄마가 밥을 해놓고 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거나 이미 다 먹어버린 뒤였다.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 조각 몇 개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찬장에는 김치통 하나와 물병뿐. 냉장고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진영은 부엌 한구석의 쌀통을 보았다. 엄마가 밥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냄비를 올리고 밥을 지었다. 하지만 진영은 가스버너를 켤 줄 몰랐다. "어린애는 만지면 안 돼, 불나." 엄마가 신신당부했었다.


그때 진영의 눈에 들어온 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네모난 전기 쿠커였다.


얼마 전 옆집 아줌마가 "우린 안 써서 버리려는데, 쓸래?" 하며 준 것이었다. 넓어 보이고 전기로 하는 거라 쉬워 보였다. 원래 전 부칠 때 쓰는 거지만, 아이는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여기다 하면 되겠지?'


진영은 쌀을 퍼서 전기 쿠커의 넓은 판 위에 부었다. 수돗가로 나가라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지만 비가 왔다. 아이는 방 안에 있는 물병의 물을 쿠커에 부었다. 쌀이 잠길 만큼 자박하게 물이 찼다.


쿠커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온도 조절 다이얼이 있었지만, 아이는 코드를 꽂으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다이얼은 '꺼짐'에 맞춰져 있었다. 불이 들어왔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진영은 유리 뚜껑을 덮었다.


진영은 방으로 돌아와 만화책을 보며 기다렸다. 빗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마당의 펌프 위로 빗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다. 구수한 밥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쿠커 뚜껑을 열었을 때, 아이의 눈에 보인 건 차가운 물에 잠긴 생쌀뿐이었다. 넓은 팬 위에서 쌀알들이 물에 불어 하얗게 퍼져 있었다.


"어... 왜 이러지?"


숟가락으로 휘저어봤지만, 쌀알은 딱딱했다. 다이얼을 돌리지 않은 탓이었다. 아이는 쿠커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배고픔은 통증으로 변해 위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 올까.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빗소리는 무섭게 커졌다.


진영은 숟가락으로 물에 불은 생쌀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우드득. 우드득.


설익은 것도 아니고, 미지근한 물에 불기만 한 생쌀이 이빨 사이에서 부서졌다. 비릿한 쌀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씹어야 했다. 배가 너무 고팠으니까.


오독오독.


빈 방 안에 생쌀 씹는 소리가 처량하게 울렸다. 목구멍으로 까끌까끌한 쌀가루가 넘어갈 때마다 눈물도 같이 넘어갔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윽...."


비린내에 헛구역질이 났다. 진영은 입안의 쌀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아... 배고파... 엄마아...."


마당 한가운데 화단엔 봄비가 내리고, 주인집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데, 구석진 문간방에서는 여덟 살 아이가 생쌀을 씹으며 홀로 흐느끼고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정희가 돌아왔다. 비에 젖은 옷에서 쉰내가 났다. 계약은 실패였다.


"진영아, 엄마 왔어."


불 꺼진 방. 스위치를 켜자, 이불도 덮지 않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진영이 보였다. 입가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정희의 시선이 구석의 전기 쿠커로 향했다.

넓은 판 위에 물과 함께 퉁퉁 불어 터진 생쌀. 그 쌀알들이 파헤쳐진 흔적.


정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밥을 해 놓는다는 걸 깜빡했다. 그걸 깜빡하다니.


이 어린 것이,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밥을 할 줄도 모르면서....


비릿한 생쌀을 씹으며 울었을 아이.

차가운 방구석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아이.


정희는 잠든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의 몸은 차가웠다.


"진영아... 엄마가...."


창밖 마당의 펌프 위로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희가 진영의 귓가에 읊조렸던 그 말들을,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

도시의 밤비는 차갑고, 가난은 소리 없이 그들 곁에 웅크리고 있었다.


정희의 눈물이 아이의 젖은 볼 위로 떨어졌다.

오늘, 또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