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보험 하나만 들어주세요. 정말 좋은 상품이 새로 나왔거든요."
정희는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전단지를 내밀었다. 시장통 건어물 가게 주인은 무심하게 파리채를 휘두르며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 안 한다니까. 아침부터 재수 없게 왜 이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거 아이 학자금 마련에도 좋고..."
"됐다니까! 딴 데 가봐요."
주인이 소금을 뿌리듯 손을 휘저었다. 정희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발뒤꿈치가 욱신거렸다. 아침부터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닌 탓이었다.
보험 영업을 시작한 지 한 달. 실적은 바닥이었다. 지인 영업을 할 수 없는 그녀에게 '개척 영업'은 맨몸으로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오후 늦게, 정희는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기원을 찾았다. 소장이 "남자들 많은 곳이 공략하기 좋다"며 귀띔해 준 곳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기원 안에는 중년 사내들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잠깐 말씀 좀 드릴 수 있을까요?"
정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에,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헤친 그는 정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보험? 아가씨가 하는 거야?"
"네, 사장님. 이번에 암보험이 아주 잘 나와서요."
"아우, 머리 아파. 그런 설명 듣기 싫고. 여기 좀 앉아봐."
사내가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정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사내는 믹스커피 잔을 들이키며 끈적한 눈빛을 보냈다.
"보니까 나이도 젊고 반반하게 생겼는데, 왜 이런 험한 일을 해?"
"... 먹고살려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런 거 해봤자 돈도 안 되잖아. 발만 아프고."
사내가 슬그머니 정희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정희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뺐다.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잠재적 고객이었다.
"사장님, 이러시면..."
"아니, 내가 딱해서 그래. 내 아는 동생이 다방 하나 하는데, 거기 가면 앉아서 커피만 날라도 이거보단 배로 벌어. 밤에 술 좀 따르면 팁도 쏠쏠하고. 소개시켜 줄까?"
정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수치심이 뜨거운 물처럼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다방, 술집. 그 단어들이 그녀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아이를 키우려고 시작한 일인데, 돌아오는 건 몸을 팔라는 제안이었다.
"됐습니다. 말씀 가려하세요."
정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에서 사내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어이쿠, 비싼 척하기는. 자존심이 아직 밥 먹여주나봐!"
정희는 도망치듯 기원을 빠져나왔다. 지하 계단을 올라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바깥공기를 마시는 순간, 참았던 억울함이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단지 가난해서? 남편이 없어서?
세상은 약한 곳을 정확히 찌르는 재주가 있었다.
그 시각, 진영은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하염없이 땅바닥만 파고 있었다. 친구들은 다들 학원에 가거나 집에 갔다. 진영도 집에 가야 했지만, 텅 빈 방에 혼자 들어가기가 싫었다.
어젯밤에도 엄마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엄마를 기다리느라 억지로 눈을 뜨고 버티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엔 비몽사몽으로 학교에 왔다. 수업 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다가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진영아, 밤에 잠 안 자고 뭐 하니? 칠판 나와서 서 있어."
벌을 서면서도 졸음이 쏟아졌다. 다리가 아픈 것보다 눈꺼풀이 무거운 게 더 힘들었다. 아이들은 킥킥댔고, 진영은 부끄러움보다 피곤함에 먼저 무너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진영은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학교 앞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88번 버스가 왔다. 퇴근 시간이라 버스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했다. 진영은 사람들 틈에 껴서 간신히 뒷자리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자, 따뜻한 히터 바람과 함께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자마자 눈이 감겼다. 버스의 진동이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다섯 정거장... 세고 내려야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진영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버스는 정류장을 하나, 둘 지나쳤지만, 아이는 깨지 않았다. 사람들은 탔다가 내렸고, 버스는 점점 비어갔지만, 구석에 처박힌 작은 아이를 깨워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스는 강을 건너고, 터널을 지나, 도시의 끝자락을 향해 달렸다. 창밖의 불빛들이 화려한 네온사인에서 드문드문한 가로등으로 바뀌어 갔다.
정희가 집에 돌아온 건 저녁 8시였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현관문을 여는 손길은 급했다. 오늘따라 진영이 보고 싶었다. 낮에 겪은 수모를 아이의 얼굴을 보며 씻어내고 싶었다.
"진영아, 엄마 왔어! 떡볶이 사 왔다."
방문이 열렸다.
방 안은 캄캄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정희는 불을 켰다. 이불은 아침에 개어놓은 그대로였고,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진영아?"
부엌, 심지어 장롱 안까지 열어보았다.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 안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학교가 늦게 끝났나? 친구네 집에 갔나?
정희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골목길을 달렸다.
"진영아! 진영아!"
동네 어귀에도, 놀이터에도 아이는 없었다. 슈퍼 주인에게 물어봤다.
"아줌마, 우리 진영이 못 보셨어요?"
"못 봤는데? 오늘 학교 갔다 오는 것도 못 봤어."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공중전화로 학교에 걸어 봤지만, 숙직실 경비원은 "다 집에 갔지, 지금 학교에 누가 있냐"며 전화를 끊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도대체 어디로?
불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유괴? 사고? 아니면 길을 잃었나?
정희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88번 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었다.
"저기요, 조그만 남자애 못 보셨어요? 책가방 메고 파란 점퍼 입은..."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바쁘게 지나갔다. 도시의 밤은 냉정했다.
아무도 타인의 불행에 멈춰 서 주지 않았다.
정희는 정류장 벤치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 넓은 도시에서, 연락할 방법도 없이 사라진 아이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80년대의 밤거리는 엄마에게 너무나 거대하고 막막한 미로였다.
"야, 야! 꼬마야, 일어나!"
누군가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진영은 눈을 번쩍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버스 안이었다. 하지만 불이 다 꺼져 어두컴컴했다.
눈앞에는 험상궂게 생긴 버스 기사 아저씨가 서 있었다.
"너 어디 가는데 여태 자고 있어?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네. 여기 종점이야, 종점!"
종점?
진영은 화들짝 놀라 창밖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버스들만 짐승처럼 웅크리고 늘어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우리 동네가 아닌데.
"아저씨... 우리 집은... 시장 앞인데요..."
진영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겁이 덜컥 났다.
"시장? 무슨 시장? 아이고, 이를 어쩐다. 막차도 다 끊겼는데."
기사 아저씨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너네 집 전화번호 알아?"
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집에 전화가 없었다. 주인집 전화번호를 외우라고 엄마가 적어줬던 종이는 책상 서랍에 있었다.
"엄마나 아빠 전화번호는?"
"... 없어요."
기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네. 일단 내려봐라. 사무실 가서 몸이나 녹이자. 밖은 춥다."
진영은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낡은 소파와 난로가 있는 기사 대기실이었다. 담배 냄새가 났다.
무서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지금쯤 엄마가 집에 왔을까? 내가 없어서 울고 있지 않을까?
"자, 이거라도 마셔라."
한 기사가 자판기 율무차를 뽑아주었다. 따뜻한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낯선 곳에서,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희는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저기요, 제 아이가 없어졌어요. 학교 갔다가 안 돌아왔어요."
경찰은 무덤덤하게 서류를 꺼냈다.
"가출 아닙니까? 요새 애들 오락실 갔다가 늦고 그래요."
"아니에요! 우리 애는 그런 애 아니에요. 88번 버스 타고 오는데... 아직도 안 왔어요."
경찰은 여기저기 무전을 쳤다.
"88번 버스 종점에서 미아 발생 신고 들어온 거 있나?"
시간이 영원처럼 흘렀다. 정희는 파출소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라.
하느님,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진영이만 돌려주세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경찰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네. 파란 점퍼? 국민학생? 아, 네."
경찰이 정희를 보았다.
"어머니, 찾은 것 같습니다. 차고지 종점에 아이 하나가 와 있다네요."
정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
"어디예요? 거기가 어디예요?"
순찰차를 타고 종점에 도착했을 때, 진영은 기사 휴게실 소파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정희가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진영아!"
그 소리에 진영이 눈을 떴다. 엄마를 보자마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울음이 터졌다.
"엄마아!"
정희는 아이를 부서져라 껴안았다. 율무차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인 아이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정희는 아이의 등을 때리며 울었다.
"왜 잠을 자, 왜! 버스에서 왜 잠을 자서 이 고생을 해!"
반가움과 속상함이 뒤섞여 통곡이 되어 나왔다.
버스 기사들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애가 얼마나 피곤했으면 세상모르고 잡디다."
그 말에 정희는 가슴이 미어졌다.
피곤해서 잠든 아이. 엄마가 늦게 와서, 밤마다 잠 못 자고 기다리느라 지친 아이.
내가 돈 번다고 밖으로 도는 동안, 아이는 버스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종점까지 흘러왔구나.
돌아오는 순찰차 안에서 진영은 엄마 품에 파고들어 다시 잠들었다.
정희는 창밖을 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불빛 속에 자신들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웃음을 팔며 일하면 편할 거라던 남자의 말이 비수처럼 떠올랐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이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면서, 자존심이 다 무슨 소용인가.
검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정희는 잠든 아이의 손을, 그 잃어버릴 뻔했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이 손을 놓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는 더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그곳이 어디라도.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정희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그것은 눈물이었지만, 동시에 독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