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아, 엄마 오늘부터 조금 더 늦을 거야."
아침 밥상머리에서 정희가 말했다. 김치 한 보시기와 콩나물국이 전부인 밥상이었다. 진영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눈만 꿈벅였다.
"얼마나 늦어? 어제보다 더?"
"응. 대신... 엄마가 밤에 맛있는 거 가져올게."
정희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국그릇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보험회사에는 사표를 던졌다. 기원에서의 그 수모를 겪고 나서 더는 그곳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학습지 교사 일은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희는 30만 원을 빚내어 중고 리어카를 샀다. 고물상 구석에 방치되어 녹이 슨 놈이었다. 천막사는 곳에 가서 주황색 타폴린 천을 끊어다가 어설픈 지붕을 얹었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끼익, 끼익' 쇠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비명 같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학습지 가방을 메고 아파트 단지를 뛰었다.
"어머님, 이번 달 교재비가 밀리셔서요."
"아이고, 다음 주에 줄게. 쌀값도 없는데 무슨 공부 타령이야."
문전박대는 여전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저층 아파트를 오르내리면 종아리가 터질 듯 부어올랐다.
그리고 해가 지면, 정희는 또 다른 전쟁터로 나갔다. 동네 어귀, 버스 정류장 앞 빈터가 그녀의 자리였다. 리어카를 끌고 비탈길을 내려올 때면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으쌰... 으쌰...."
혼자 구호를 붙이지 않으면 버딜 수 없는 무게였다. 리어카에는 가스통, 육수 통, 술병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내리막길에서 리어카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쏠려 내려가려 할 때마다 정희는 발 뒷꿈치로 아스팔트를 찍으며 버텼다. 신발 밑창이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첫날, 주황색 천막을 치고 카바이트 불을 켰다.
'취이이익'
가스 타는 소리와 함께 노르스름한 불빛이 천막 안을 밝혔다. 세상과 격리된, 얇고 위태로운 오렌지빛 공간.
정희는 도마를 꺼내 오뎅을 썰고, 소주잔을 닦았다. 손이 떨렸다. 내가 정말 이걸 할 수 있을까. 술 취한 사람들, 거친 사람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어이,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오뎅 국물 좀 주쇼."
첫 손님은 작업복을 입은 중년 사내였다.
"네, 네. 금방 드립니다."
정희는 허둥지둥 국자를 들었다. 국물이 손등에 튀어 뜨거웠지만 느낄 겨를도 없었다. 소주병을 따서 건네는 손이 부끄러워 자꾸만 앞치마에 문질렀다.
밤이 깊어질수록 천막 안은 취기로 가득 찼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사내들의 고함소리와 신세 한탄이 뒤섞였다.
"야 이년아, 돈이 없다고 부모 무시하냐!"
"김 부장 그 새끼, 내가 언젠가 죽여버린다."
정희는 말없이 안주를 썰고 술병을 날랐다.
"아줌마, 술이 미지근하잖아! 얼음 좀 가져와!"
"아가씨, 여기 와서 한 잔 따라봐. 팁 줄게."
취객 하나가 정희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기원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몸이 굳었다. 하지만 이번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여기가 내 가게고, 내 생계였다. 정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팔을 슬쩍 뺐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해요. 안주 더 드릴게요."
비굴했다. 하지만 비굴해야 1000원을 더 벌었다.
새벽 3시.
파장할 시간이 되어서야 정희는 리어카를 정리했다. 남은 오뎅 국물은 식어 비릿했고, 바닥에는 담배꽁초와 침이 뱉어져 있었다. 그걸 빗자루로 쓸어 담으며 정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마당의 펌프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정희는 수돗가에서 대충 손발을 씻었다. 찬물에 손을 담그자 부르튼 손가락 마디마디가 쓰려왔다.
방문을 열었다. 진영은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알림장과 연필이 굴러다녔다.
'준비물: 미술 시간 - 크레파스 24색, 스케치북.'
정희는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지폐들을 꺼냈다. 천 원짜리, 오백 원짜리 동전, 백 원짜리들. 기름 냄새와 돈 냄새가 섞여 났다. 그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진영의 알림장 위에 올려두었다.
"이걸로... 내 새끼...."
잠든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는데, 아이가 잠결에 코를 찡긋거렸다. 엄마 몸에서 나는 음식 냄새, 술 냄새가 싫은 모양이었다. 정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진영은 엄마가 머리맡에 두고 간 돈을 쥐고 학교 앞 문방구로 갔다.
"아줌마, 크레파스 주세요."
"몇 색? 12색? 24색?"
"24색이요."
문방구 주인아줌마가 노란 뚜껑의 크레파스를 꺼냈다.
"이건 3천 원인데?"
진영은 손에 쥔 돈을 내려다보았다. 2천 원이었다. 엄마가 준 돈으로는 부족했다.
"어... 저기, 2천 원밖에 없는데요...."
아줌마는 혀를 쯧 차더니, 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럼 이거 가져가. 18색인데, 2천 원이야. 짝퉁이라 색은 좀 덜 예쁘지만."
진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 주세요."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책상 위에 저마다의 크레파스를 펼쳐놓고 있었다. 짝꿍 민수의 책상 위엔 '티티 파스' 24색이 번쩍거렸다. 금색, 은색까지 들어 있는 고급이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반면 진영의 것은 이름도 모르는 '코끼리표' 크레파스였다. 종이 상자는 얇아서 벌써 모서리가 찌그러져 있었고, 뚜껑을 열자 쿰쿰한 기름 냄새가 났다.
"야, 니 건 냄새가 왜 이래?"
민수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아니야, 냄새 안 나."
진영은 황급히 뚜껑을 덮었지만, 이미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어? 이거 가짜다. 우리 엄마가 이런 건 쓰지 말랬는데. 손에 묻는다고."
누군가 큰 소리로 떠들자,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진영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엄마가 밤새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산 건데. 나한테는 소중한 건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미술 시간 내내 진영은 크레파스를 꺼내지 못했다.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진영아, 왜 안 그리니?"
"... 가져오는 거 까먹었어요."
차라리 혼나는 게 나았다. 가난한 걸 들키느니, 게으른 아이가 되는 편이 덜 비참했다. 선생님은 혀를 차며 "다음부턴 꼭 챙겨와"라고 꾸지람을 했지만, 진영은 고개를 숙인 채 책상 밑으로 낡은 신발코만 비벼댔다.
점심시간,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먹을 때도 진영은 혼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밥 한 그릇을 비웠지만, 반찬 냄새를 맡으면 배가 더 고파질까 봐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운동장 흙바닥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렸다. 크레파스로는 그릴 수 없었던, 아주 크고 멋진 집을 그렸다. 그 집 안에는 아빠도 있고, 맛있는 반찬도 있고, 무엇보다 밤에 일 나가지 않는 엄마가 있었다.
그날 저녁, 정희는 마당 수돗가에서 오뎅 국물을 끓이고 있었다. 좁은 부엌에서는 화력이 약해, 마당에 있는 연탄 화덕에 솥을 걸었다. 멸치와 무가 끓으면서 비릿하고 구수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아이고, 냄새야! 이게 무슨 냄새야!"
안채 쪽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곱슬머리를 짧게 볶은 할머니 한 분이 튀어나왔다. 주인집 아주머니의 시어머니, 동네에서 '칠성네 할머니'라 불리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코를 움켜쥐고 정희에게 다가왔다.
"새댁! 여기서 장사 준비하지 말랬잖아! 온 집안에 생선 비린내가 진동을 해서 살 수가 없어, 아주!"
정희는 황급히 국자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부엌이 너무 좁아서... 금방 끓이고 치울게요."
"좁으면 안 해 먹으면 되지! 셋방살이하면서 별걸 다 해, 정말. 냄새나서 빨래도 못 널겠네!"
할머니의 호통은 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방 사람들도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봤다. 정희는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내 집이 아니라는 설움. 가난이 죄라는 말. 그게 냄새가 되어 온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정희는 쫓기듯 솥을 내리고 리어카를 챙겼다.
"진영아, 엄마 다녀올게. 문 잘 잠그고 있어."
방 안에 있는 아이에게 당부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마당에는 여전히 연탄 냄새와 비린내가 맴돌았다. 진영은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그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소리치는 것, 엄마가 죄인처럼 굽신거리는 것. 아이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손바닥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을 할퀴었다.
한참 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 거기 있냐?"
걸걸한 목소리. 칠성네 할머니였다. 진영은 겁이 덜컥 났다. 또 혼내러 온 걸까. 엄마도 없는데. 아이는 숨을 죽이고 없는 척했다.
"있는 거 다 안다. 나와 봐라."
할머니는 문고리를 덜컥거렸다. 진영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살짝 열었다. 문 앞에는 칠성네 할머니가 서 있었다. 험상궂게 찌푸린 눈썹. 진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할머니는 손에 든 양은 그릇을 툭 내밀었다.
"이거 먹어라."
그릇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 세 개가 담겨 있었다.
"저녁도 안 먹고 굶고 있을 거 아냐. 에잉, 쯧쯧. 애미는 밖으로 나돌고, 애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고. 꼴 좋다."
입으로는 독한 말을 뱉으면서도, 할머니는 그릇을 방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먹고 그릇은 수돗가에 내놔. 괜히 방에 둬서 쥐 꼬이게 하지 말고."
할머니는 힉 돌아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문 단속 잘해라! 요즘 도둑놈들이 많아!"
안채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났다.
진영은 멍하니 김이 나는 고구마를 내려다보았다. 뜨끈한 온기가 그릇을 타고 바닥으로 전해졌다. 방금 전까지 엄마를 구박하던 그 무서운 할머니가 준 고구마. 진영은 조심스레 고구마 하나를 집어 들었다. 뜨거웠다. 호호 불어가며 껍질을 까자, 노란 속살이 드러났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목이 메는 맛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할머니가 준 고구마가 더 따뜻해서 슬펐다. 아니,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차가운 집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진영은 고구마를 우물거리며 마당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 한가운데, 칠성네 할머니가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펄럭이는 소리가 마치 "살아라, 그래도 살아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길고 어두웠지만, 적어도 오늘 밤 진영의 배는 고프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