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 앞뜰은 더 이상 왕의 위엄을 자랑하는 신성한 공간이 아니었다. 검은 화염과 붉은 핏자국, 그리고 무너진 기와 조각들이 널브러진 전쟁터였다. 이무기가 토해내는 검은 브레스가 닿는 곳마다 화강암 바닥이 끓어오르며 녹아내렸고, 백면이 불러낸 수많은 원혼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가득 메웠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달조차 검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췄다.
“흩어져요! 한곳에 모여 있으면 다 죽어요!”
하진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무기의 포효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죽어라! 모두 태워버려라!]
이무기의 머리 위에 올라탄 백면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이무기가 고개를 돌리며 불길을 뿜어냈다.
화아아아악!
검은 불길이 하진을 향해 쇄도했다. 하진은 사인검을 들어 올렸다.
“청룡의 비늘이여! 물을 불러라!”
그녀가 외치자, 사인검에 박혀 있던 청룡의 비늘이 푸른 빛을 발했다. 허공에서 물기둥이 솟아나 불길을 막아섰다.
치이이익!
엄청난 수증기가 발생하며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타 윤도진이 근정전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탄창을 확인했다. 남은 총알은 3발. 이걸로는 턱도 없었다.
“이강우 씨! 화염방사기 연료 얼마나 남았습니까!”
윤도진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간당간당해! 한 번 쏘면 끝이야! 저 뱀장어 새끼 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딜이 안 들어가!]
이강우는 근정전 지붕 위에서 이무기의 등판을 향해 화염을 쏘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무기의 비늘은 강철보다 단단했다. 화염은 겉만 그을릴 뿐, 속살까지 닿지 못했다.
“놈의 역린... 역린을 노려야 해요! 목 밑에 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하진이 수증기 사이로 뛰쳐나오며 외쳤다.
“알아! 근데 저놈이 고개를 안 쳐든다고!”
이무기는 교활했다. 약점을 본능적으로 감추며 턱을 땅에 붙이고 공격해왔다.
[크크크... 약점을 노리는 거냐? 어림없다! 그 비늘은 그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다!]
백면이 비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무기의 몸에서 가시가 돋아나더니, 사방으로 발사되었다.
파바바박!
가시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으악!”
윤도진이 피하려 했지만, 가시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형사님!”
하진이 달려가려 했지만, 백면이 가로막았다.
[어딜 가느냐. 네 상대는 나다.]
백면이 허공에서 내려와 하진 앞에 섰다. 가면 속의 어둠이 일렁였다.
[네 어미처럼 너도 내 손에 죽을 운명이다.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닥쳐! 우리 엄마 이름 더럽히지 마!”
하진이 분노하며 사인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백면을 향해 날아갔다. 백면은 검은 기운을 모아 검을 만들어냈다. 두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카아앙!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백면은 옥새의 힘을 흡수해 더욱 강해져 있었다. 하진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크윽...!”
[약하다, 너무 약해! 문지기의 힘이 고작 이 정도냐?]
백면이 검을 휘두르자, 하진의 사인검이 튕겨 나갔다. 하진은 바닥에 넘어졌다. 백면이 검을 들어 올려 하진의 심장을 찔러 죽이려 했다.
“죽어라!”
탕!
그때, 총성이 울렸다. 쓰러져 있던 윤도진이 권총을 쏘았다. 총알은 백면의 가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면 귀퉁이가 깨져 나갔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백면이 고개를 돌려 윤도진을 노려보았다.
“도망쳐요, 하진 씨! 어서!”
윤도진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하진은 그 틈을 타 사인검을 다시 쥐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끝내야 해.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모두 죽어.’
하진은 옥 조각을 가슴에 품었다. 문지기의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힘을 주세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옥 조각이 반응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옥 조각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머니 속에 있던 주작의 깃털, 청룡의 비늘, 백호의 기운, 그리고... 현무가 남긴 검은 기운까지 모두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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