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설산

by 돌부처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는 잿빛이었다.


허공을 맴돌다 땅에 닿기 전, 화산재와 엉겨 붙어 더러운 검은 눈보라로 변모했다. 흰 머리라는 뜻의 백두산(白頭山)은 오래전 제 이름을 버렸다. 산등성이는 검은 털을 기괴하게 펄럭이는 거대한 마수(魔獸)의 형상이었다.


연은 눈 덮인 가파른 비탈을 기어올랐다.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비릿한 쇠맛이 올라왔다. 공기 중에는 독한 유황 냄새와, 짐승의 썩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수천 년간 묵혀둔 거대한 죄악이 균열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악취다.


"산군(山君)께서 노하셨다."

앞서 걷던 스승이 입을 열었다.


만신(萬神) 금화. 그녀가 걸친 붉은 쾌자가 거센 눈보라 속에서 핏자국처럼 펄럭거렸다. 칠순 노파의 굽은 등과 달리, 경사면을 오르는 발걸음은 기이할 정도로 가벼웠다. 허공에 뜬 유령처럼, 눈먼 광신도의 맹목적인 걸음이었다.


연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 무더기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잿빛 돌멩이들. 그것은 짐승의 백골이었다. 사슴, 멧돼지, 반달가슴곰. 수천 마리의 산짐승들이 스스로 화구를 향해 기어 올라가다 얼어붙은 잔해들이었다. 그것들은 두개골을 정상 쪽으로 향한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


치직, 치지직.

발밑 두꺼운 얼음 밑바닥에서 벌레 떼가 뼈를 긁어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울렸다. 연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놋쇠 방울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음장 같은 쇳덩이의 감각이 파고들었다.


"스승님."

연의 목소리는 매서운 바람에 부서졌다.


"이건 신의 강림이 아닙니다. 산이 완전히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금화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정상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탁하게 흐려진 두 눈동자에는 광신도 특유의 번들거리는 열기가 끓어올랐다. 평생을 바친 맹신이 끔찍한 파멸로 향하더라도, 그대로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겠다는 광기였다.


"입 다물거라, 이년아! 감히 산군님의 부름에 불경한 주둥이를 놀려?"

금화가 뒤돌아보며 찢어질 듯 소리쳤다. 그녀의 입술 틈새로 하얀 입김 대신 매캐한 흑연(黑煙)이 새어 나왔다.

그녀에게 산군은 절대적인 밥줄이자 종교였다. 매일 새벽 살아있는 수탉의 목을 비틀어 피를 뿌렸고, 동짓날마다 제 손목을 그어 제단에 피를 적셨다. 70년 세월을 진흙탕에 처박으며 바친 대가는 신의 축복이 담긴 예언이 아니라, 그저 고기 방패로 바쳐지는 제물의 자격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파편화되어 뇌리를 스쳤다. 열 살, 핏줄의 저주를 감당 못한 부모에게 버림받아 금화의 손에 질질 끌려 산으로 들어온 첫날밤. 금화는 바닥에 구르는 개처럼 굿판의 피비린내 나는 돼지 내장 찌꺼기를 연의 입에 쑤셔 넣었다.


"너는 눈을 뒤집어쓰고 태어났구나."

금화가 연의 왼쪽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며 내뱉은 말이다.


역안(逆眼).

검은자위가 흰자위를 완전히 덮어버린 채, 기괴하게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동공. 세상의 그림자를 투시하는 흉측한 낙인.


"그 눈으로 보아라. 내 뒤에 무엇이 자리하느냐."

어린 연은 입술을 꽉 깨문 채 텅 빈 허공만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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