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로 승부하는 자들이 어떻게 에이스를 내쫓는가

by 돌부처

저녁 6시 30분.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사무실의 공기는 묘하게 싸늘하고 고요합니다. 각자의 모니터 불빛만이 하얗게 빛나는 가운데 누구도 먼저 가방을 싸지 못합니다. 눈치 게임의 중심에는 항상 창가 쪽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최 부장님이 있습니다.


그는 키보드를 부설 듯이 타건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냅니다. 중간중간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현재 회사에서 가장 막중한 업무를 홀로 짊어지고 있다는 비장한 아우라를 전방위로 뿜어냅니다. 그 무거운 한숨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칼퇴근을 꿈꾸던 김 대리의 엉덩이는 다시 의자에 무겁게 접착되고 맙니다.


결국 밤 9시가 되어서야 최 부장님이 "다들 고생했어,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라며 선심 쓰듯 외투를 집어 듭니다. 그제야 사무실의 정지되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사무실의 가장 신성하고 위험한 빌런, '야근의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회사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청춘과 저녁 있는 삶을 불살랐다고 굳게 믿으며 스스로에게 숭고한 십자가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그 기나긴 야근 시간은 회사의 영업 이익 창출에 1퍼센트라도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을까요?


냉정하게 말해, 엉덩이로 승부하는 순교자들의 모니터 안을 샅샅이 들여다보면 실체는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야근의 순교자들이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는 가장 큰 이유는 십중팔구 비극적일 만큼 낮 시간의 업무 효율이 처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일사불란해 보이는 하루 일과를 초 단위로 쪼개어 관찰해 보십시오.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커피를 내리는 데 30분을 소비하고 사내 인트라넷 게시판의 의미 없는 댓글들을 정독하며 워밍업이라는 핑계로 오전을 전부 날려버립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쏟아지는 식곤증을 핑계로 인터넷 기사 검색과 주식 창을 들여다보다 결국 진짜 본격적인 업무는 남들이 퇴근을 준비하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부랴부랴 마우스에 손을 얹고 시작합니다.


남들에게는 하루 8시간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온전히 집중과 몰입의 시간 밀도로 꽉 채워지는 반면, 순교자들의 8시간은 치즈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잡담과 딴짓과 무기력으로 듬성듬성 비워져 있습니다. 당연히 남들이 4시간 만에 끝낼 수준의 평범한 기획안 하나를 작성하는 데 이들은 꼬박 12시간을 허비하고 맙니다.


본인의 형편없는 타임 매니지먼트 역량과 집중력 부족을 인정하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아주 교묘하고 영악한 방어 기제를 선택합니다. 바로 '근면성'이라는 방패의 최후 보루인 야근입니다.


밤늦게 켜진 모니터 불빛 앞에서 무의미하게 클릭질을 반복하며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 최면에 빠집니다. "이렇게 밤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일하는 나 자신을 회사가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나는 누구보다 회사에 충성하는 핵심 인재야"라는 지독한 환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조직의 구원자이자 영웅으로 승격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주의 자본 사회의 회사는 당신의 노력하는 태도에 점수를 매기는 자선 단체나 학교가 결코 아닙니다. 기업은 투입된 시간 대비 가장 높은 효율의 아웃풋 즉 결과물에만 냉혹하게 보상해야 하는 전쟁터입니다. 엉덩이가 무거운 순교자들은 이 거창한 성과주의의 본질을 외면한 채, 그늘진 사무실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자랑하는 데에만 집착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순교자들의 해악이 단순히 그들 개인의 무능함과 시간 낭비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진짜 비극은 엉덩이로 일하는 자들이 내뿜는 병든 공기가 팀 전체의 조직 룰을 조용히 질식시켜 버릴 때 발생합니다.


어느 조직에나 본인의 업무를 폭발적인 효율로 단숨에 쳐내고 오후 4시쯤 깔끔하게 키보드에서 손을 떼는 천재적인 에이스들이 한두 명씩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들은 주어진 문제를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창의적이고 완벽한 설계도로 해결하는 능력자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정규 퇴근 시간인 6시가 되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칼퇴를 하고 자신의 저녁 생활이나 취미 운동에 에너지를 온전히 투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팀에 막강한 권력을 지닌 야근의 순교자가 상사로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 상황은 지옥으로 돌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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