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바닥에 회색 어음 쪼가리들이 흩어졌다.
항상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도 당당했던 태수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사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기 시작하자, 부엌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희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허공에 뜬 국자를 내려놓지 못했다. 등 뒤의 화영이만이 낯선 고단함과 고함 소리에 놀라 숨넘어갈 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진영은 차가운 화장실 타일 바닥에 웅크려 앉아 귀를 막았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종이 한 장의 무게는, 태수가 던져버린 저 빛바랜 약속어음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운 사치에 불과했다.
월요일 아침이 밝아도 태수는 출근하지 않았다. 코팅 장갑을 끼고 콧노래를 부르던 목소리 대신, 굳게 닫힌 안방 문틈 사이로 소주 냄새와 푸념만이 새어 나왔다. 공장의 기계 소리가 멈춘 현실은 즉각적인 고통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가구 주택의 이층 철 대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 사장!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고 밀린 월급 결판내!"
태수와 함께 기계를 돌리던 나이 지긋한 선반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정을 봐달라며 읍소하다가, 끝내 문이 열리지 않자 험악한 욕설을 퍼부으며 문짝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방에 틀어박힌 태수 대신 그 분노를 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오롯이 정희의 몫이었다. 정희는 화영이를 등에 업은 채 현관문을 반쯤 열고 수백 번 허리를 굽혔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든, 기계라도 팔아서 챙겨드릴 테니 제발 오늘만 돌아가 주세요. 애가 놀랍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엄마의 등을 보며, 진영은 손톱을 꽉 쥐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우리 아빠는 김태수'라고 반듯하게 적어 내고 싶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 하루빨리 이 끔찍한 빚쟁이 아수라장에서 '나는 저 사람들의 핏줄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것은 한 남자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었다. 평생을 쇳가루 마시며 버텨온 태수는 어음 부도라는 낯선 괴물에 걸려 넘어졌다. 은행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했던 하청 업자에게 자본의 벽은 너무 높고 단단했다.
태수는 아침부터 방구석에 앉아 소주병을 열었다. 방바닥에는 빈 병이 굴러다녔고, 알코올 냄새가 좁은 집에 배어들었다. 진영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주던 든든한 등판은 점점 구부러졌고, 다정했던 눈빛은 핏발이 서 초점을 잃었다. 단 몇 주 만에 그는 가족에게 소리를 지르는 폭군이 되었다.
보일러 기름이 바닥난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해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태수가 돌연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뻗어 밥상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상 위에 놓여 있던 빈 소주병과 찌개 그릇이 엎어지며 사기 파편이 장판 위로 흩어졌다. 윗목에 누워 있던 아기 화영이가 파래진 입술로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태수가 붉은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아, 시끄러워! 애새끼 입 좀 다물게 못 해? 내 평생이 개차반이 났는데!"
거실은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정희는 엎드린 채 어깨를 떨었지만 대들지 않았다. 진영은 방문 틈새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현듯 아버지가 없는 진영을 데리고 정희가 처음 태수를 소개시켜 주었던 삼 년 전의 저녁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시내의 제법 번화한 경양식집. 열한 살 인생에 처음으로 맛본 바삭하고 달콤한 돈가스였다. 태수는 기름때가 옅게 밴 크고 투박한 손으로 반짝이는 나이프를 쥐고, 진영의 접시 위 고기를 다정하게 잘라주었다.
"우리 진영이, 많이 먹어라. 앞으로 아저씨랑 엄마랑 셋이서 진짜 가족 한번 만들어보자. 아저씨가 앞으로 맛있는거 다 사줄께."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머리를 두툼한 손으로 쓱쓱 쓰다듬어 주던 그 다정했던 태수의 얼굴. 하지만 돈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그 든든한 남자는 부도 어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그릇들, 역겨운 술 냄새. 그리고 울음을 삼키며 우두커니 선 엄마를 불쌍하게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는 저 낯선 폭군은, 처음 돈가스를 썰어주며 웃던 그 사내가 아니었다. 가난이 사람의 다정한 껍데기를 어떻게 잔인하게 벗겨내고 흉측한 밑바닥을 드러내는지를, 진영은 숨죽여 기록했다.
그 순간, 진영은 모순적이게도 서글픈 안도를 느꼈다. 학교 서류에 김태수라는 이름표를 달지 못하고 숨어 지냈던 수치심. 그것이 지금 이 침몰하는 집안에서 자신은 '온전한 핏줄'이 아니라는 얄팍한 다행감으로 바뀌었다. 정상적인 아버지가 있는 가족이라는 환상. 애초에 빈민가의 자식에겐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돈줄이 끊기자 가장 먼저 바닥을 드러낸 건 마당 한구석의 빨간 기름보일러 통이었다. 겨울이 닥쳤지만, 정희가 함바집 주방에서 손이 짓물러라 설거지를 해 벌어오는 푼돈으로는 드럼통에 실린 붉은 등유 한 말조차 배달시킬 수 없었다. 전원이 내려간 보일러 스위치에는 먼지가 쌓였고, 온기가 사라진 방바닥은 차갑게 식어갔다.
방안의 공기는 날 선 외풍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어린 화영이는 두꺼운 내복을 여러 겹 껴입었다. 정희는 행여나 아이가 감기에 걸릴까 문틈을 테이프로 막고, 화영이를 두꺼운 솜이불 속에 깊숙이 파묻어두었다.
진영은 냉기가 도는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차가워진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몽당연필을 고쳐 쥐었다. 손끝이 시렸지만, 묵묵히 산수 공책에 숫자들을 써 내려갔다. 숙제를 마쳐야 한다는 학생의 의무감이 아니었다. 이 미쳐가는 집안에서 자신마저 제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매달리는 의식이었다.
밤 11시. 현관문이 열리고 찬 바람과 함께 정희가 들어왔다. 그녀의 옷깃에서는 식당의 찌든 기름 냄새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섞여 났다.
"진영아, 안 자고 뭐 해. 춥지? 이리 와서 엄마 품에 손 좀 녹여."
정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지만, 진영은 차갑게 언 손을 무릎 밑으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퐁퐁에 짓무른 정희의 젖은 손끝은 투박하게 부르터 있었다. 진영의 손보다 더 얼음장처럼 차갑고 붉게 갈라진 손. 진영은 그 손을 마주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차가운 손을 잡는 순간, 참아왔던 서러움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정희는 차가운 장판에 웅크려 잠든 태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원망할 기력조차 없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물수건을 짜서 화영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삼 년 전, 처음 이 집 대문을 열며 다 같이 웃었던 세 식구. 그 희망은 자취를 감추고, 거실에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헐떡이는 길 잃은 유령들만이 소리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매일 밤 빚쟁이들이 대문을 두드리고 욕설을 쏟아냈다. 온기를 잃어버린 화장실에서는 더 이상 락스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신 하수구에서 비릿한 시궁창 냄새가 올라왔다. 소년은 알았다. 이 얄팍한 종이 요새가 곧 무너져 내릴 거라는 것을.
수세식 화장실 타일에서 살얼음 같은 한기가 올라오던 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정희가 식당에 나가고, 태수가 낮술에 취해 코를 골고 있던 대낮. 진영이 엎드려 몽당연필로 산수 숙제를 할 때, 잿빛 양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구두 발소리를 내며 이층 계단을 올라왔다. 집행관들이었다.
그들은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들어섰다. 텔레비전, 장롱, 냉장고 구석구석마다 시뻘건 압류 딱지를 기계적으로 붙였다.
"이 냉장고는 연식이 너무 오래돼서 처리 비용이 더 들겠네. 쯧."
"그래도 일단 붙여."
무심한 대화가 거실을 찔렀다. 붉은 종이 스티커들은 이 가족이 세상과 맺었던 모든 권리가 철저하게 박탈당했음을 선고했다. 그들이 엎드려 숙제하던 찌그러진 앉은뱅이 책상 위로 다가오자, 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양팔을 벌려 책상을 막아섰다.
"안 돼요! 이건 내 거예요!"
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양팔을 벌려 앉은뱅이 책상을 막아섰다. 덩치 큰 사내가 귀찮은 듯 콧방귀를 뀌며 진영의 어깨를 밀어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진영의 몸은 장판 위로 스키를 타듯 힘없이 밀려났다.
"꼬마야. 네 아버지가 남의 돈을 수천만 원이나 떼먹었어. 여긴 이제 네 게 아니라 다 빚쟁이들 물건이야. 비켜."
사내는 진영을 보지도 않은 채, 앉은뱅이 책상 정중앙에 시뻘건 딱지를 척, 하고 붙였다. 단단하게 풀칠된 종이가 나무 위로 밀착되는 소리가 방 안을 서늘하게 울렸다.
진영의 손에서 튕겨 나간 연필이 빨간 딱지가 붙은 냉장고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목이 콱 메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저 방구석에 코 골며 쓰러져 있는 저 한심한 사람은 내 호적상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빚쟁이가 아니라고, 이 불행은 생판 남의 것이라고 세상에 대고 악을 쓰며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 집의 핏줄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순간, 매일 밤 숨죽여 울며 부르튼 손을 문지르던 어머니에게서마저 영원히 버림받을 것 같은 공포. 그 시린 두려움이 열한 살 소년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집행관들이 거친 숨결을 남기고 빠져나간 뒤, 거실에는 온통 피딱지 같은 시뻘건 압류 딱지들만이 저녁노을을 받아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밤늦게 구부정한 허리로 돌아온 정희는 그 광경을 보고 현관에 주저앉았다. 곡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퀭하게 패인 까만 눈동자에는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마른 지독한 체념만이 고여 있었다.
정희는 멍하니 밥솥을 보던 진영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 손은 한겨울의 고드름처럼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화장실에서 락스 냄새가 나던 이층 다가구 주택. 그 짧고 달콤했던 가짜 중산층의 꿈은 그렇게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불도장 찍힌 어음 한 장이 몰고 온 파도였다. 다시 탄내 나는 지하방으로 쫓겨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네 식구는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아도 뼈마디의 서늘함으로 알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저무는 해가 뜯겨진 벽지 위를 오렌지빛으로 쓸쓸하게 비췄다. 온통 파괴된 거실을 뒤로하고, 진영은 돌아서서 낡은 캔버스 가방을 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빠의 자리에 기어코 '김태수' 석 자를 적어 넣고 싶어서 엄마에게 악을 쓰며 울부짖었던 그 새 학기 '가정환경 조사서'.
지금은 아무 쓸모도 지키지도 못하는 그 갱지 뭉치가, 구겨진 국어 공책들 사이에 꼬깃꼬깃 처박혀 있었다. 진영은 그 종이를 꺼내어 빈칸을 보았다. 부(父) 성명을 적는 네모난 빈칸은 여전히 하얗게 비어 있었다. 불과 한 달 전. 그깟 빈칸 하나를 채우지 못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서러워했던 자신이 이제는 한없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거실 밖에서는 빨간 딱지들이 기괴한 침묵 속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파괴적인 자본의 폭력 앞에서, 서류상의 아버지 이름 따위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진영은 몽당연필을 들어 그 하얀 빈칸 위에 천천히 빗금을 긋기 시작했다. 김영수도, 김태수도 아닌 시커먼 흑연의 선이 그 자리를 메웠다.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깊게 선을 긋던 소년은 마침내 연필을 내려놓았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이름표와 얄팍한 서류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은, 오직 이 지독한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는 차가운 체념뿐임을, 소년은 압류 딱지가 도배된 폐허 속에서 조용히 깨닫고 있었다.
캄캄한 가방 바닥으로. 누구의 이름도 적지 못한 그 서류가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이층집의 마지막 겨울밤이 차갑게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