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가난의 모서리마저 무디게 갈아내는 마력을 지녔다.
마당 한가운데서 이빨이 다 닳아버린 식칼로 궤짝을 쪼개던 그 처절했던 새벽으로부터 꼬박 삼 년이 흘렀다. 진영은 국민학교 4학년이 되었고, 정희의 굽은 등에는 이제 커다란 레자 외판원 가방 대신 돌이 갓 지난 핏덩이 아기가 포대기로 업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집이었다.
매캐한 연탄 냄새와 녹물이 쿨럭거리던 기와집 마당 셋방을 떠나, 그들은 변두리에 위치한 다세대 주택 이층 전세로 이사했다. 김씨 아저씨, 김태수와 정희가 합치게 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비록 방 두 칸짜리 비좁고 허름한 주택이었지만, 무엇보다 집 안의 하얀 타일이 깔린 화장실에서 옅게 풍기는 락스 냄새는 정희에게 지난 삼 년의 구질구질하고 끔찍했던 가난을 잠시나마 잊도록 해 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새로운 가장이 된 김태수는 공단 어귀 모퉁이에 딸린 작은 선반 도급 공장을 차렸다. 밤낮없이 내뿜던 뒷골목의 축축한 땀내 대신, 이제 그의 두터운 작업복에서는 짙고 매끄러운 윤활유 냄새와 날카로운 쇳가루 냄새가 훅 끼쳐왔다. 동네의 번듯한 사장님들처럼 자가용을 굴릴 만큼 부유해진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늘 당장 먹을 쌀을 걱정하며 밤새 눈시울을 붉히지 않아도 되는 삶. 그것만으로도 정희는 평생 처음 누려보는 일상의 평온이자 거대한 안도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한 이층집 거실 한구석에서, 열한 살 진영의 머릿속은 매일같이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김진영. 백 점. 이번에도 우리 반 일 등이네."
오전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이 빳빳한 시험지를 건네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육십 명 남짓한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교탁 앞의 진영에게 쏠렸다. 부러움과 시기가 뒤섞인 눈빛들 속에서 진영은 태연한 척 자리로 돌아왔다. 진영은 동네 보습 학원의 간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입학 이래 줄곧 1등을 하곤 했다. 정희조차 까맣게 몰랐지만, 진영은 세 살 무렵, 버려진 스포츠 신문의 굵은 흑백 헤드라인들을 보고 스스로 한글을 통째로 깨우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지나치게 똑똑한 머리가 문제였다. 진영은 제 나이 또래들이 가져야 할 천진난만한 철없음을 유예당한 채, 자신이 처한 얄궂은 가정환경의 모순을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날카롭게 이해해 버렸다.
진영은 알고 있었다.
머나먼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돈을 벌러 갔다는 동네 사람들을 향한 엄마의 새빨간 거짓말 뒤에 숨어, 아내와 핏덩어리 아들을 지독한 구렁텅이에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에게로 도망쳐버린 친부 김영수라는 파렴치한 사내 덕분에 자신의 생활이, 그리고 엄마의 삶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그 이름 석 자는 진영의 머릿속에 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캄캄한 공포와 배고픔이라는 형체 없는 짐승의 이름으로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매일 아침 골목 어귀까지 자신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덜컹거리며 등교시켜 주고, 일요일 낮잠을 잘 때면 슬그머니 다가와 까끌까끌하고 거친 쇳가루 묻은 수염으로 볼을 마구 비비며 장난을 치는 저 크고 든든한 사내. 밤낮없이 기름때를 묻혀가며 세 식구의 따뜻한 밥을 책임지고 있는 김태수가 자신의 진짜 핏줄이 아닌 새아버지라는 사실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진영의 깊은 기억 밑바닥에는 홀어머니 정희의 등 뒤에 업혀 매일 밤거리를 헤매며 굶주리던 그 옛날 단칸방 시절의 참혹한 가난이 시커먼 화상 흉터처럼 늘러붙어 있었다. 빚쟁이들이 쾅쾅대며 문을 부서지라 두드리고, 추운 겨우내 연탄 한 장 살 돈이 없어 냉골 바닥에서 서로의 체온에만 의지해 숨을 죽이고 밤을 지새우던 끔찍한 날들의 감각은, 열한 살 소년이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공포였다.
다른 평범한 친구들이 주말이면 번듯한 옷을 차려입고 양친 부모의 다정한 손을 잡은 채 창경원이나 유원지로 소풍을 다녀오고, 당연하다는 듯이 온전한 가족의 보호 아래 무럭무럭 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진영은 언제나 이유 모를 짙은 결핍과 소외감에 휩싸였다. 자신만 이 세상에 뚝 떨어져 나온 불량품 같았다.
그런 진영에게 기적처럼 나타난 태수는 구원의 밧줄과도 같았다.
태수는 진영에게 거칠지만 다정했고, 단 한 번도 진영을 남의 자식 구박하듯 매몰차게 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진영이 받아오는 백 점짜리 시험지를 코팅해서 공장 벽면에 훈장처럼 붙여두고 껄껄 웃으며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쪽은 언제나 쇳가루 범벅인 태수였다. 태수가 차려준 이 따뜻한 이층 전셋집 안에서, 진영은 지옥 같던 편모 가정의 비참한 꼬리표를 마침내 떼어내고 돌이 갓 지난 이부동생 화영이까지 품은 남들처럼 정상적이고 완전한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마침내 무사히 안착했다고 굳게 여겼다.
하지만 진짜 고독하고 잔인한 고문은 매년 학기 초, 담임선생님에게 적어 제출해야 하는 한 장의 종이 쪼가리, 가정환경 조사서 안에서 어김없이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가족의 모든 구성원의 이름과 주민등록상 주소지, 부모의 직업과 최종 학력을 또박또박 적어내야 하는 그 갱지 뭉치 앞에서, 열한 살 소년은 매번 숨이 막히는 압박감 속에 작은 연필을 쥔 손을 벌벌 떨어야만 했다.
[부(父) 성명: 김영수, 나이: 33세, 직무: 건설업]
서류의 부(父) 란에는, 나와 엄마를 굶어 죽기 직전의 낭떠러지까지 모질게 내몰고 영영 증발해 버린 그 무책임한 친아빠의 이름 석 자가 여전히 악성 종양처럼, 끈적이는 거머리처럼 완고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정희와 태수가 구두쇠처럼 아끼고 살림을 합쳐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벌써 수년이 흘렀건만, 대한민국의 견고하고 가부장적인 호적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유령 같은 인간 김영수가 진영을 낳고 기르는 법적인 친아버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남자의 성씨가 기막힌 우연처럼 같은 김 씨였기에 이름 모를 성이 김 씨였다가 박 씨로 바뀌는, 그래서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쟤네 엄마 재혼했대" 라며 노골적이고 더러운 손가락질로 조리돌림 당하는 비참한 일만큼은 극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하지만 잔인한 법적 호적은 속일지언정, 진영은 그 종이 한 장을 또박또박 억지로 적어 낼 때마다, 자신이 여전히 평범한 친구들과는 다르게 지워진 태생적 결함을 가진 비정상적이고 위태로운 가정의 아이라는 뼈아픈 자각에 매일 밤 시달려야만 했다.
진영은 그 서류 빈칸이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그 서류 빈칸을 보고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친부가 너무 증오스러웠다.
지금 나의 월사금과 육성회비를 벌어 오고, 내가 한밤중에 고열로 앓았을 때 맨발로 나를 둘러업고 이십 리 밖 병원 응급실까지 이 악물고 뛰었던 나의 진짜 아빠는, 저기 시커먼 공단에서 기름때를 벅벅 묻혀가며 미친 듯이 일하는 땀 냄새 나는 아저씨 김태수인데. 대체 왜 나는 매년 학교에 제출하는 알량한 종이 위에 단 한 번도 내게 따스한 아버지 노릇 흉내조차 내지 않고 떠난 나쁜 사람의 이름을, 그것도 나의 가장 든든한 일차적 보호자이자 절대적인 가정의 기둥이라는 자리에 버젓이 매번 허락도 없이, 그리고 속을 까발려가며 적어내야 한단 말인가.
등 뒤에서 포대기에 싸여 쌕쌕거리며 엄마 정희의 기분 좋은 자장가 소리에 파묻혀 곤히 잠자는 젖먹이 갓난 여동생 화영이는 집 안팎으로 당당하고 평화롭고 의심할 여지 없는 김태수의 완벽한 피붙이 친딸이었다. 동생의 호적에는 티끌만큼의 얼룩도, 가려야 할 어두운 그림자도 없었다.
하지만 왜 자신은 똑같은 집에 살면서 남들처럼 단 한 번이라도 떳떳하게 진짜로 곁에 있는 우리 아빠가 누구라고 단 한 장의 흔한 서류 종이 위에 적어 부를 수 없는 것인지. 다른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단 한 명의 완전하고 흠 없는 아버지를 온전히 가지는 일이, 나에게는 왜 이토록 불가능하고 무거운 죗값처럼 평생을 달고 다녀야 하는 저주로 주어지는지.
어린 소년은 어른들이 모두 잠든 깊고 고요한 밤이 오면, 며칠 밤낮을 하얀 타일이 차가운 화장실 세면대에 웅크려 앉아,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꽉 깨물고 홀로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뜬눈으로 가슴앓이를 했다.
"엄마."
찬 바람이 유독 매섭게 불던 11월의 어느 늦은 일요일 저녁.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치찌개를 무심히 뜨던 진영이 돌연 숟가락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에 부엌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 내일모레 학교 숙제로 낼 새 학기 가정통신문 조사서에... 그냥 우리 아빠 이름, 김태수라고 쓰면 안 돼? 나 이제 김영수라는 그 이름, 쓰기 싫어. 우리를 도망쳐 버린 사람이잖아. 내 학용품을 사주고 밥을 먹여주는 진짜 우리 아빠는 여기 태수 아저씨인데, 왜 나는 학교에서 우리 아빠를 아빠라고 적을 수가 없는 건데?"
정희가 국자를 푸던 손이 허공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뒤편 포대기에서 새근새근 잠든 젖먹이 화영이의 고른 숨소리, 그리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불안하게 요동치는 부엌을 메웠다. 정희의 시선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차마 명쾌한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게... 진영아. 아직 법원에 서류가... 어른들의 사정이 많이 복잡해서 그래. 동의를 받아야 호적을 파든 말든 하는데, 연락도 없는 인간을 어찌 찾겠어.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면 안 될까?"
말끝을 흐리고 황급히 눈동자의 시선을 바닥으로 회피하는 정희의 비겁하고 궁색한 변명은 진영이 처음 눈물로 호소했던 3년 전부터 수백 번은 족히 들었던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대답의 반복이었다.
사실 어른들의 그 구차한 핑계 이면에는, 현실의 거대한 철문이 완고하게 가로막혀 있었다. 전남편 김영수를 상대로 한 진흙탕 같은 이혼 재판, 하루하루 쌀값 대기도 벅찬 가솔들에게 벼락치듯 떨어지는 수백만 원이 훌쩍 넘게 드는 전담 변호사 선임 비용,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 매뉴얼만 들이대며 몇 달을 법원과 구청을 이리저리 오가게 만들고도, 지독하게 질긴 혈연의 뿌리를 쉽게 잘라내어 주지 않는 행정 관청의 지독한 철벽.
그 모든 것이 한데 엮여 거대한 올가미가 되어 양육권을 가져오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봤던 정희를 일찌감치 체념시키고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짓눌러 주저앉힌 지는 이미 영겁처럼 오랜 시간이었다. 하지만 서류 한 장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기엔, 그것이 얼마나 잔혹하게 사람의 피를 말려 죽이는 괴물인지를, 정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꽃다운 나이의 열한 살 아들에게 차마 그 잔인한 밑바닥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설명해 주기엔 너무도 연약한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알량하고 가벼운 서류 한 장이, 여전히 지워내지 못하는 묵직한 태생적 꼬리표가, 어느새 소년으로 자라 자아를 가지게 된 열한 살 아들의 깊은 내면을 얼마나 잔인하게 북북 찢어놓고 피를 흘리게 만들고 있었는지, 하루 벌어 하루를 근근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현실의 풍파에 찌든 정희는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나도 화영이처럼! 그냥 다른 보통 애들처럼 반듯하게 평범하게 우리 아빠 진짜 이름 내 손으로 내 빈칸 서류에 당당하게 적어놓고 싶어. 내가 남의 집 애야? 나도 내 온전한 가족이 갖고 싶다고! 이제 두 번 다시 가짜 서류에 우리 버린 나쁜 사람 이름 쓰기 싫어!"
단 한 번도 정희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진영의 맑고 까만 눈동자에는 어느덧 투명하고 뜨거운 억눌렸던 폭발하는 서러움의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더니 이내 뺨을 타고 굵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난도 버텨냈던 소년의 작고 여린 어깨가 서럽게 들썩이고 있었다.
진영의 서러운 목소리가 부엌을 찢어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현관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바깥의 매서운 칼바람과 함께 시큼하고 비릿한 싸구려 막걸리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태수였다.
평소라면 공단에서 돌아와 작업복을 현관에서 깔끔하게 털고 웃으며 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듬직한 태수의 낯빛이 오늘따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피로와 알코올에 전 두 눈에는 시퍼런 핏발이 서 있었다.
"여보, 당신 대체 무슨 일이에요? 대낮부터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요?"
정희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다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가 그의 더러워진 외투를 받아들려 했다. 하지만 태수는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비틀거리는 그의 마디 굵은 투박한 손에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손때 묻어 빛이 바랜 뻣뻣한 종이 쪼가리 몇 장이 병든 짐승처럼 쥐여 있었다.
"이 빌어먹을 더럽고 파렴치한 새끼들... 뼈가 으스러지도록 철야로 삼 교대 돌리고 밤낮없이 먼지 마시며 그 무거운 쇳덩이 돌려서 기한 안에 겨우 납품 맞춰 줬더니, 피 같은 결제 대금을 은행 수표도 현찰도 아니고 언제 처망할지 모르는 부도 딱지 묻은 어음 쪼가리로 또, 이 씹어먹을 어음으로 던져주고. 벌써 석 달째야, 석 달째. 우리가 받아먹지 못하고 묶인 현금 돈이 얼만데!"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깊고 탁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쇳가루가 단단하고 까맣게 박히고 기름때로 엉망이 된 채 깊게 팬 상처가 가득한 태수의 억센 손바닥 위에서, 낡은 종이 쪼가리가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모멸감과 배신감, 그리고 극한의 분노로 인해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음. 현금 대신 당장 손에 쥐여 주지 않고 기약 없는 미래에 나중에 돈을 주겠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갑질하는 하청의 하청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의 병들고 영세한 밑바닥 공단의 썩어 문드러진 생태계가 낳은 괴물. 그 한 장의 구겨진 회색 종이는 태수가 기계와 씨름하며 흘린 뜨거운 땀방울과 눈물만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들 세 식구가 십수 년의 잔인한 모진 시련을 간신히 넘어 서로에게 피투성이가 된 채 엉겨 붙어 촘촘하게 엮어 세웠던 이 작은 남동공단의 낡은 다세대 주택 한 칸짜리 전세 보증금과, 내일의 쌀값과, 진영이 그렇게도 바라던 평범한 소풍의 희망, 그리고 저 하얗고 평화롭던 수세식 화장실에서 나는 문명의 희미한 락스 냄새의 단꿈마저 모조리 도려내어 한 줌의 시꺼먼 재로 산산조각 낼 수 있는, 망령처럼 부활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가난의 무자비한 소환장 그 자체였다.
식식거리며 거친 불처럼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 앞에 선 거대한 짐승 같은 태수의 거무튀튀하고 성난 길쭉한 그림자가, 멍하니 빈 숟가락을 쥐고 뺨 위로 하염없이 굵은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진영의 희끄무레한 얼굴 위로, 그리고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정희의 처진 굽은 어깨 위로 소리 없이, 그리고 흉측하게 방바닥을 타고 어둡게 누웠다. 수세식 화장실의 코를 찌르는 락스 냄새와 일요일 저녁의 보글보글 끓던 맛있는 김치찌개의 달콤한 온기로 지난 삼 년간 세상의 시선을 간신히 덮어두고 애써 상처 없는 단란하고 완벽한 가족인 척 연기하며 아슬아슬하게 누려왔던 잠깐의 유리성 같은 평화의 시간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가난이라는 이름의 굶주린 괴물은 한순간도 결코 완벽하게 꼬리를 자르고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잠시 빛이 닿지 않는 음습한 어둠 속에 몸을 웅크려 엎드린 채, 그들의 헛된 안도를 구경하며 서늘하게 다음 사냥의 찰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버림받은 친부의 핏줄과, 지켜야 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계부. 완전히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두 동강 나버린 두 개의 부서지고 깨어진 이름표를 제 여린 목에 올가미처럼 팽팽하게 걸고 매일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남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자신의 결핍에 시달리며 위태롭게 흔들리던 진영의 까맣고 서늘한 눈동자 눈망울 위로,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