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멜로디언

by 돌부처

오후 두 시. 5월의 햇살은 이미 초여름처럼 따가웠다.


정희는 아파트 입구 그늘에 서서 구두 뒤꿈치를 까딱거렸다. 시장에서 만오천 원을 주고 산 남색 정장 투피스가 땀에 전 지 오래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커다란 레자 가방 안에는 초등학생용 방문 학습지 샘플과 전단지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포장마차가 박살 나고 돈통을 잃어버린 지 일주일.


낮에는 학습지 외판원, 밤에는 포장마차를 뛰는 정희의 이중생활은 그날 이후로 살얼음판이 되었다. 당장 목돈이 필요했다. 멜로디언 값 삼만 원, 부서진 리어카 수리비, 그리고 다음 달 전세금 인상분까지. 평소처럼 일해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구멍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이 새 학기 공부 때문에 걱정 많으시죠? 저희 아이템풀 학습지에서..."


쾅.

철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이번이 스물세 번째 거절이었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는 피아노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자가용을 굴리는 중산층들로 넘쳐났다. 그들의 현관 너머로는 고급 전집 세트와 왁스 칠한 마룻바닥이 보였다. 정희는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단숨에 허물었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 리어카를 끌고 꼬박 서 있어야 하는 발이다. 이미 발가락에는 물집이 잡혔다 터지기를 반복해 진물이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딱 세 집만 더 채우자.


정희는 무거운 레자 가방을 고쳐 메고 다음 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초록색 32 건반 멜로디언뿐이었다. 진영은 그날 이후로 멜로디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면 선생님께 맞은 손바닥을 숨기느라 바빴다. 그 작은 손바닥을 볼 때마다 정희의 억장이 무너졌다.


오후 네 시.


초라한 실적표를 들고 지부에 복귀한 정희는 가불금 삼만 원이 담긴 누런 월급봉투를 받아 들었다. 내일모레 떼일 수수료였지만 상관없었다.


정희는 곧장 문방구로 달려갔다.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든 초록색 멜로디언. 호스가 돌돌 말려 있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하숙방이 든 좁은 골목길을 걷는 정희의 발걸음은 모처럼 가벼웠다.


골목 어귀에서 우유팩 하나와 쉰내 나는 단팥빵 반 쪼가리로 저녁을 때웠다. 퍼석한 빵조각이 식도를 긁으며 넘어갔다. 물기가 필요했지만 그 흔한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대신 가슴속에는 멜로디언을 건네받을 진영의 얼굴이 꽉 차 있었다.


방문을 열자 진영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진영아."


정희가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부스스 눈을 떴다.


"엄마가... 이거 사 왔다."


정희가 등 뒤에서 초록색 케이스를 꺼냈다. 진영의 눈이 커졌다. 졸음이 확 달아난 얼굴이었다.


"진짜? 진짜 내 거야?"


아이는 멜로디언을 품에 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곧바로 호스를 연결해 서툰 솜씨로 학교 종을 불기 시작했다. 삐삑, 삐삑. 아직 숨결 조절이 안 되어 우스꽝스러운 소리였지만, 정희에게는 그 어떤 교향곡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문득 서늘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 겨우 1학년. 앞으로 저 아이가 커가면서 필요로 할 것들은 멜로디언 한 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소풍, 교복, 전과, 자전거. 남들 다 하는 보습 학원이나 윤선생 영어는 꿈도 못 꾸더라도, 준비물 하나 없어서 손바닥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가난의 무게는 아이가 온전히 자라기도 전에 그 작은 어깨를 눈덩이처럼 짓누를 것이 자명했다. 정희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을 삼키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선생님한테 안 혼나겠네. 얼른 불어보고 자."

"응! 엄마 최고!"


정희는 서둘러 자개장에서 앞치마를 꺼내 둘렀다.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투피스를 벗고 목이 늘어난 티셔츠로 갈아입는 짧은 찰나, 어깨에 선명하게 남은 가방끈 자국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자정 무렵.

포장마차의 카바이트 불빛 아래로 취객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요즘 애들 사교육비 장난 아냐. 웅진위인전기 전집 하나 넣었는데 십만 원이 훌쩍 넘더라고."

"우리 집은 윤선생 영어 시키잖아. 마누라가 극성이라 뼈가 빠진다니까."


가방끈을 길게 맨 넥타이 부대들이 오뎅 국물을 들이키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들의 뼈 빠지는 고민은 정희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전집 세트. 영어 과외.


그것들은 정희가 낮에 다른 집 현관문 틈새로만 엿보던 신기루 같은 세계였다. 당장 쌀독이 비어 가는 마당에 위인전기 따위는 사치였다. 정희는 묵묵히 연탄불 위에서 곰장어를 뒤집었다.


치이익.

양념이 타들어 가는 냄새. 짙은 연기가 무너질 듯 피곤한 눈을 찔렀다.


하루 종일 서 있던 다리는 감각이 없었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통증이 허리를 타고 뒷목까지 뻗쳐 올랐다. 매캐한 연탄가스와 곰장어 비린내가 땀범벅이 된 몸 위로 엉겨 붙었다.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정신 차려. 타잖아.'


정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억눌렀던 피로와 서러움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판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


치이익.


눈물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양념 냄새와 섞여 증발해 버렸다. 울 시간조차, 슬픔을 치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 정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고 다시 집게를 쥐었다. 눈물로 고기를 태워먹을 순 없었다.


"계산이요."


마지막 취객이 흔들리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천막 안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정희는 가스 불을 줄이고 빈 소주병을 상자에 주워 담았다.


"오뎅 국물 좀 남았습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굵은 목소리. 정희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비가 오던 며칠 전, 젖은 작업복 차림으로 홀연히 나타나 오만 원이 든 봉투를 놓고 갔던 남자, 김 씨였다.


"아... 네. 마침 펄펄 끓여 놨어요."


정희는 황급히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쳤다. 김 씨는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눈시울을 보면서도 티 내지 않고,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정희가 플라스틱 그릇에 어묵 국물을 담아 내밀자, 그가 투박한 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낮에... 무슨 험한 일이라도 했어요? 어깨가 다 까졌는데."


김 씨의 시선이 늘어난 티셔츠 목덜미 밖으로 벌겋게 부어오른 정희의 무거운 가방끈 자국에 머물렀다. 정희는 당황하며 옷깃을 치켜올렸다.


"아, 예. 낮에 학습지 외판원 일을 뛰고 있어서요. 애가 클수록 들어갈 돈이 많다 보니까..."

"무리하지 마요. 그러다 먼저 골병들면 남은 애는 어쩌려고."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김 씨는 말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두 사람 사이로 카바이트 불빛만이 쉬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새벽 세 시. 밤바람이 서늘해질 무렵, 김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늘 그랬듯 안줏값 대신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무심히 내려놓았다.


"잠깐, 김 씨 아저씨! 잔돈 받아가셔야..."


정희가 돈통을 열어 거스름돈을 찾는 사이, 김 씨는 이미 천막 밖으로 나가 리어카 짐을 묶는 고무줄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쇠파이프 지지대를 해체하고 차곡차곡 리어카 위에 실었다.


"내가 끌어줄 테니, 앞치마나 벗고 나와요."

"매번 이러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 어떡해요. 번번이 남는 돈도 안 받으시고..."

"미안할 거 없어요."


김 씨가 찌그러진 리어카 손잡이를 묵직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힘줄 돋은 팔뚝 위로 가로등 불빛이 떨어졌다.


"나도 퇴근하고 불 꺼진 빈 방에 들어가는 거, 신물이 나서 그래요."


불쑥 던진 한마디에 정희의 손이 멈칫했다. 김 씨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바닥만 응시한 채 덧붙였다.


"당신 혼자 이 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애 키우는 거, 옆에서 보기 아슬아슬해서 숨이 막혀요. 내가 리어카 앞에서 끌 테니까, 댁은 뒤에서 슬슬 밀기만 해요."


그것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90년대 식 청혼이었다. 화려한 꽃다발이나 값비싼 반지 따위는 없었다. 그저 여자의 고단한 리어카를 같이 끌고, 함께 아이의 삶의 무게를 나눠지겠다는 사내의 묵직한 약속이었다. 입에 발린 위로나 겉치레 섞인 동정심보다, 체념하며 살아온 빈민가 바닥에서는 천 배는 든든한 다짐이었다.


정희는 대답 대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에는 피로감 섞인 설움이 아닌, 전혀 다른 감정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철판 위로 떨어져 치이익 증발해 버린 아까의 서글픈 눈물과는 달리, 옷소매에 맺힌 눈물방울은 꽤 오랫동안 따뜻한 온기를 머금었다.


비좁은 골목길 어귀.


삐걱거리는 리어카 바퀴 소리가 고요한 어둠을 갈랐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앞에서 묵직하게 리어카를 끄는 김 씨와 뒤에서 가만히 미는 정희. 두 사람이 이끄는 리어카는, 이제껏 그녀가 지나온 그 어떤 밤길보다 가볍게 비탈을 차고 오르고 있었다.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