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38화

또 다른 길

by 돌부처


쾅! 쾅! 쾅!

서재 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울렸다.


최민준 형사의 목소리는, 이제 확신에 차 있었다.


“마지막 경고다! 문 열어!”

“젠장….”


지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다급하게 금제록의 페이지를 넘겼다.

북(鼓)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단서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기록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마치 남은 이야기는, 네가 직접 써 내려가라는 듯이.


‘필부 따위에게 쫓기는 꼴이라니.’


왕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조롱하듯 울렸다.


‘짐에게 맡기거라. 저 문짝과 함께, 문밖의 벌레들까지 모두 먼지로 만들어주마.’


손등의 옥 매미 문양이, 왕의 분노에 반응해 검푸른 빛을 발했다.

압도적인 힘의 유혹.


“안 돼.”


지운이 속삭였다. 그는 자신의 손등을 움켜쥐며, 왕의 힘을 억눌렀다.

그 힘을 쓰는 순간, 자신은 완전히 잠식당할 것이다. 그는 한지운으로서, 이 위기를 돌파해야만 했다.


“지운 씨, 이제 시간이….”


서화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그녀의 시선은, 서재의 유일한 창문을 향해 있었다.

2층.

뛰어내리기에는 너무 높았다.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지운은 책상 위에 놓인 금제록을 품 안에 소중히 챙겼다.

그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수만 권의 책. 할아버지의 평생.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


‘지운아, 이 서재는 살아있는 역사란다.’

'모든 책은 제자리가 있지. 하지만 가끔은, 제자리를 벗어난 책이 가장 중요한 길을 알려주기도 한단다.’


그의 눈이, 거대한 책장의 한 부분에 멈췄다.

수많은 역사서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꽂혀 있는 한 권의 책.

그가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낡은 세계 동화 전집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할아버지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 책만큼은 손대지 못하게 했다.

지운은 비틀거리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가 동화책을 꺼내, 안쪽으로 힘껏 밀어 넣자.


쿠르르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책장 전체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책장 뒤편으로, 아래로 향하는 어둡고 좁은 비밀 계단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


서화는 말을 잃었다.


“기록자는… 언제나 역사의 뒷문을 만들어두는 법이니까요..”


지운은 할아버지의 말을 흉내 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먼저 계단으로 들어서며, 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쾅!


바로 그 순간, 서재의 문이 부서져 내렸다. 최민준 형사와 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서재. 그리고, 천천히 닫히고 있는 거대한 책장이었다.


“거기 서!”


최 형사가 소리치며 총을 겨누었지만, 이미 늦었다.


쿵.


책장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며, 마지막 틈마저 사라졌다.

완벽한 벽.


“젠장!”


최 형사는 책장을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재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결계의 흔적. 그리고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은, 오존 냄새와 피 냄새.

그는 이 공간에서, 인간이 아닌 것들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할아버지의 책상 위로 향했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였지만, 유독 한 곳만은 깨끗했다.

금제록이 놓여 있던 자리.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처럼.


“팀장님.”


그가 다시 무전기를 들었다.


“이 집, 전부 폐쇄하고 정밀 감식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색 빛 눈동자가, 책장 너머의 어둠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서울 시내의 모든 고궁, 박물관, 그리고 오래된 제단이 있는 곳. 전부 수배 내려주십시오.”

“놈들은… ‘다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비밀 계단의 끝은, 집의 지하 와인 저장고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비밀 통로가 바깥의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을 달려, 마침내 할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성북동의 한 산책로에 숨어 숨을 골랐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상처의 고통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제… 어떡할 거죠?”


서화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경찰까지 우리를 쫓고 있어요. 서울 안에서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알아요.”


지운은 품 안에서 금제록을 꺼내 들었다. 그는 다시, 할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기록을 펼쳤다.


‘세 번째 열쇠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비춘다.’


그리고 그 아래 그려진, 거대한 북(鼓).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비춘다….”


지운은 문장을 곱씹었다. 이것은 수수께끼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북이 아닌가.’


왕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가장 높은 곳이라면, 당연히 하늘이겠지. 그렇다면 답은 정해진 것 아닌가. 이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남산….”


지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울의 중심. 가장 높은 곳.

그리고 그곳에는, 과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아니에요.”


서화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그건 너무 단순한 함정입니다. 화천회가, 그리고 당신의 할아버님께서 그런 뻔한 답을 남겨두셨을 리가 없어요.”

“‘비춘다’는 말에 집중해야 해요. 가장 높은 곳에서 쏘아 올린 빛이, 가장 낮은 곳에 닿는다는 뜻일 겁니다.”


가장 높은 곳의 빛.

가장 낮은 곳.


지운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록의 파편들이 충돌했다.

역사, 지리, 천문. 그의 모든 지식이, 이 하나의 문장을 풀기 위해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대담한 계획이었다.


“찾았어요.”


그가 서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학자의 눈이 아니었다.

거대한 진실을 마주한, 기록자의 눈이었다.


“세 번째 열쇠의 위치를….”

“그리고, 화천회의 진짜 목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