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자본과 정치, 그리고 종교(1)
당시 이윤을 추구하는 도시의 상인들은 아무런 목적 없이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 왜 피렌체 상인들이 수도원을 신축 또는 확장하는 데 필요한 벽돌이나 목재의 구입 비용, 수도원 내부를 장식할 고가의 그림이나 조각품을 제작하는 비용을 지불하기 시작한 것일까?(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문학동네, 21쪽)
피렌체를 여행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오래전부터 가톨릭은 고리대금업을 죄악시했다. 이율을 떠나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가 금지되었다. 은행업자들은 모두 고리대금업의 죄를 짓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메디치 가문을 비롯해 피렌체의 여러 부자들은 교회에서 ‘불법’으로 규정하는 은행업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을까? 새로운 인문주의가 꽃피웠다고 해도 여전히 종교의 힘이 생활과 사고방식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는데 말이다.
피렌체 대성당 앞에는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이 있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로서 피렌체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여기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세례당 안에는 도나텔로가 제작한 요하네스 23세의 무덤이 있다.
메디치의 정치헌금
요하네스 23세는 훗날 폐위당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때, 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1360 ~1429)가 대신 보석금을 내주고, 피렌체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준다. 이 둘의 관계를 아름다운 우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
조반니는 교황이 되고 싶었던 발다사레(Baldassare Cossa) 주교에게 1만 베네치아 금화(약 80억 원)를 빌려준다. 일종의 정치헌금이다. 그리고, 조반니는 주교의 모자를 담보로 잡았는데, 그냥 모자가 아니라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었다. 조반니의 자금을 발판으로 이 주교는 추기경을 거쳐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되었다. 교황은 자신을 도와준 조반니에게 교황청의 자금 운영권을 넘겨준다. 전 세계에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니 그 수익도 어마어마했다. 이를 바탕으로 메디치 은행은 급성장하게 된다.
자금 운영권이란 쉽게 말해 각 지역의 화폐로 들어오는 헌금을 환전해 주는 것이다. 은행은 길거리에 녹색천이 덮인 테이블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돈을 바꿔주던 환전상이 발전하여 은행업자가 된다. 피렌체 사람이 런던에 가서 물품을 구입하고자 하는데, 무거운 금화를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은 힘들기도 할뿐더러 위험하다. 그래서 피렌체의 은행 업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신용장을 받는다. 이 신용장을 가지고 런던의 지점이나 제휴은행으로 가서 다시 돈으로 바꾼다. 이런 과정에서 은행은 수수료와 시세 변동에 따른 환차익을 얻게 된다.
이런 방법에 교황청도 관심을 가진다.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거둬들이는 헌금은 엄청난 양이었다. 송금이 늦어지는 지역의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에게는 심한 질책과 벌이 내려졌고, 심한 경우 파문에 이르기도 했다. 이렇게 거둬들인 돈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로마로 옮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은행의 신용장과 환어음을 이용했다. 그리고 은행업에 대해 암묵적인 인정을 해 준다. 이후 은행업자와 교회의 유착 관계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특별한 고객들을 위한 맞춤 상품 '재량예금'
은행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아무리 메디치 가문이라도 자신의 돈만으로는 어려웠다. 그래서 여러 군데에서 투자를 받아 해외 지점도 늘렸고, 다양한 상품에 투자했다. 투자한 금액이 큰 동업자는 해외 지점장을 맡기도 했다. 이 투자자들 중에는 고위 성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돈을 굴리는 행위 자체가 죄악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일반 투자자들처럼 투자금을 넣고 수익을 분배받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재량예금이라는 아주 희한한 상품이 발명되었다. 재량예금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돈을 맡겨 놓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돈을 정말 가만히 맡아주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은행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적절하게 알아서 돈을 굴려 수익을 남겼다. 하지만 예금주는 수익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신분이다. 그래서 은행업자들은 성직자에게 ‘재량’껏 ‘선물’을 했다. 이것은 이자나 투자 수익이 아니다. 그저 은행업을 하는 신자가 바치는 선물이었다. 그래도 수익률은 연 8~12퍼센트에 달했다. 물론, 예금주의 신원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교회도 무언가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은행업자들은 고리대금업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까 매우 걱정했다. 고리대금업의 죄를 씻는 방법은 살면서 얻은 이익을 죽기 전에 모두 토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쉽겠는가? 그래서 교회의 도움을 받아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고리대금업자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할 때 재산을 모으는 데 부정한 방법을 썼음을 인정하고, 이것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서약해야 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으로 피해를 봤던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각각 얼마를 돌려주겠다고 서약한다. 물론, 모두 사실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 서약은 사후에 그대로 집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서약이 매우 모호하게 변한다. 내가 불법적으로 거둬들인 재산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요구한다면 그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식으로 바뀌고, 사제들은 이런 애매한 서약을 인정해준다. 하지만, 누군들 선뜻 나설 수가 없다. 메디치처럼 여러 부유한 가문들은 이미 세속권력인 정부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받을 불이익이 두려웠다.
교회를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자본
또 다른 방법으로는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수도원을 후원하는 것이다. 피렌체의 성당들은 중앙 제단 양 옆에 작은 기도실(혹은 예배당)들이 여러 개 펼쳐져 있다. 이 기도실을 치장하는데 여러 부자 가문들이 거액을 후원했다. 그 대가로 기도실에는 후원해 준 가문의 이름이 붙고, 후원자는 죽은 후 성당에 묻힐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아예 교회 하나를 통째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산 로렌초 성당이다. 이곳은 메디치 가문의 전용 교회라고도 불리는데, 메디치 가문이 돈으로 자신들의 죄를 씻기 위해 공공 교회를 사유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코시모 데 메디치는 산 마르코 수도원 건축에도 막대한 기부금을 냈다. 그 대가로 수도원 내부에 전용 기도실을 얻었고, 교황은 코시모의 죄를 사해준다는 공식문서를 보내주었다.
더 놀라운 사례도 있다. 피렌체는 아니지만, 1300년대 초반 파도바라는 도시에 엔리코 스크로베니라는 거부가 있었다. 그는 정부와 교회에 돈을 빌려주던 고리대금업자였는데, 재산이 우리 돈으로 120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아예 자신의 땅에다 교회를 세워버린다. 토지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임대료처럼, 자신의 땅에 세워진 건물의 소유권은 토지 소유주의 것이었다. 교회 설립은 신앙심의 표현으로 포장되었고, 더 이상 고리대금업의 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 교회는 개인의 소유물이었으며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교회에서 발생하는 헌금과 십일조 역시 교회 소유주의 몫이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매매도 가능했다. 교회 그 자체가 가장 확실한 상속수단이자 투자처가 된 것이다. 이건 마치 현대 부자들이 각종 재단을 설립하는 것과 비슷하다.
부유층들이 왜 교회에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했는지 다양한 시각으로 본다면, 피렌체를 좀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르네상스 때도 자본이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모두를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 문학동네
팀 팍스, <메디치 머니> ,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G.F.영 <메디치>,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김상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21세기 북스
김혜경, <인류의 꽃이 된 피렌체>, 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