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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Dec 01. 2020

노동자의 몸부림, '치옴피의 난'

르네상스로 가기 위한 투쟁(3)

그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방법만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밥에 서슴없이 모래를 섞을 사람들이었다. (중략) 영희는 회사 사람들이 노동조합 지부장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어갔다고 말했다. 아주 심한 날은 삼십여 명의 공원들을 무더기로 해고시켰다. (중략) 은강방직 노조는 조용히 침몰해가고 있었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20-221쪽) 


피렌체에는 예전부터 두 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하나는 로마 시대부터 시장으로 이용되었던 메르카토 베키오(Mercato Vecchio, 오래된 시장)인데 현재의 공화국 광장(Piazzi della Republica) 자리이다. 


메르카토 베키오가 복잡해지자 메르카토 누오보(Mercato Nuovo, 새로운 시장)를 만든다. 메디치 같은 금융업자들이 이곳에 영업용 녹색 테이블을 펼치며 은행이 시작되었다. 현재는 코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하는 청동 돼지상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여기에는 여러 조각품들이 있는데, 그중 깃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남자의 조각이 있다. 그는 피렌체의 양모 산업 하층 노동자들을 위해 앞장서 투쟁했던 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이다. 


후대 많은 역사가들은 미켈레를 ‘맨발의 벌거숭이 폭도’로 비하했다. 하지만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그를 탁월한 민중 지도자로 표현했다.

청동 돼지상. 수많은 관광객이 코를 만져 색이 변했다.
메르카토 누오보. 평소에는 상인들과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이 때는 성탄절 아침이라 한산했다.

노동자와 자본가, '화폐적 인종 분리'


신흥 상인 세력들이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새롭게 들어 선 길드 자치 정부(시뇨리아)의 최고 행정 기구인 8인회와 그 대표인 곤팔로니에레는 선출직이었다. 정부의 정책을 검토하고 견제하는 시민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민주적인 정부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드에 가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길드를 만들거나 가입할 수 없었다. 뱃사공, 짐꾼 등 하층 노동자는 길드에 가입할 수 없었다. 자연히 정치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이들의 권익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반대로 길드 회원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상인들과 부유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정부 정책을 운영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화폐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주요한 가치 척도 기준과 교환 수단은 금과 은이었다. 자연히 화폐도 금과 은으로 만들었는데, 피렌체의 금화는 플로린이었고 은화는 피치올로였다. 


플로린은 1252년 처음 만들어졌다. 이때만 해도 1 플로린은 1리라(20 피치 올로)였다. 그런데 피치올로를 모아 1리라가 되어도 1 플로린으로 쉽게 바꿀 수 없었다. 플로린과 피치올로는 완전히 분리된 다른 화폐였다. 왜 이렇게 두 개의 화폐제도를 운영했을까?


영국 출신의 작가로 메디치 가문의 경제 구조에 대해 파헤쳤던 팀 팍스(Tim Parks)는 그의 저 서 <메디치 머니>에서 그 이유를 '사회 현실이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를 '화폐적 인종 분리'라고 말한다.


플로린은 부유층의 화폐였고 피치올로는 서민들의 화폐였다. 사치품을 구입하거나 국제 무역에는 플로린이 쓰였고, 빵과 같은 일반 서민 물품 거래에는 피치올로가 쓰였다. 마치 과거 한 국이 가난했을 때 부유층들이 달러로 재산을 축적하고 사치품을 사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피렌체는 쓰는 화폐 조차도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던 사회였다.


노동자들은 피치올리로 임금을 받았다. 그런데 길드들은 여기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치올리를 만들 때 들어가는 은의 함유량을 점점 줄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피치올리의 가치는 떨어졌다. 처음에는 1 플로린은 1리라였지만 나중에는 7리라(140 피치 올 리)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가 처음 약속했던 것과 똑같은 액수의 피치올리를 받지만 실제 임금은 계속 줄어들었다. 고용주들은 인건비를 아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인건비를 더 아끼기 위해 급여를 돈이 아닌 양모로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도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반면에 노동자들이 작업 중 실수를 하거나 불량품을 내면 채찍을 맞고 족쇄를 차야 했다.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정책은 이뿐이 아니었다. 국가에 내는 세금이나 여러 중요한 일에는 플로린을 내야 했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피치올리를 플로린으로 ‘환전’해야만 했다. 금융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환전 수수료를 받아 챙겼다.


이런 착취 구조의 가장 하층 계급 중에는 양모를 씻거나 염색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에 치옴피(Ciompi, 나막신)라고 불렸다. 이들이 하는 일은 모직물 제조 공정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처우는 가장 열악했다. 정부는 치옴피들의 길드(조합) 결성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래서 고용주들이 마음대로 해고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일해도 참혹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용주들은 법을 핑계로 대며 할 얘기가 있으면 정부에 가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길드를 만들 수 없는 치옴피들은 정부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정부도 치옴피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일부 양심적인 성직자들이 이런 부자들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피치올리가 아니라 플로린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치옴피의 난과 노동자 혁명정부


1378년 5월 치옴피들이 산타 크로체 광장과 치옴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산타 크로체 지구는 도심 외곽의 거주지역으로 주로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노동자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상 첫 대규모 파업이었다. 이때 지도자로 앞장선 사람이 미켈레 디 란도였다. 그의 지도하에 각성한 노동자들은 빠르게 조직화했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였다. 치옴피는 자신들에게도 길드 결성권을 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부와 고용주들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분노한 시위대들은 부자들의 집을 약탈하고 불 질렀다. 급기야 7월에는 정부 청사까지 무력으로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부를 선포한다.


혁명 정부는 노동자들의 부채를 없애는 등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친다. 그리고 부유층에게만 유리했던 조세 정책도 바꾼다. 미켈레는 혁명 정부의 수반으로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노동자들이 부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하려 하자 이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했다. 그러면서도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부자들의 과거 행위를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혁명 정부는 부유층이 아닌 서민 중심의 정책을 펼치지만 여러 가지 한계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확장성을 가지지 못했다. 혁명 정부는 양모 노동자인 치옴피가 주축이었는데 다른 업종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혁명 정부 내부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미켈레가 중재하려고 했으나 결국 서로 간의 유혈 충돌까지 발생한다. 이런 치옴피들의 폭력성을 목격한 일반 시민들도 이들에게 선뜻 동조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산타 크로체 성당과 그 일대. 성당 왼쪽으로 치옴피를 비롯한 하층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작되는 반격


이런 상황에서 고용주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피렌체의 주력 산업인 모직업이 타격을 받으면 국가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며 일반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여기에 치옴피들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민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고용주들은 재빠르게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와 빈자리를 메꾸었다. 치옴피들이 없어도 모직업과 경제가 굴러가자 혁명정부는 당황한다. 여기에 고용주들은 혁명 정부 인사들을 회유하고 이간질했다. 미켈레가 흔들리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노동자들의 동요는 점점 커져갔다. 많은 치옴피들이 외국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을까 겁을 먹고 이탈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고용주들이 고용한 용병들이 몰려왔다. 분열이 시작된 혁명 정부에게 이들을 막을 힘은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의 혁명 정부는 6주 만에 끝나고 만다. 다시 정권을 잡은 부자들은 주동자 160여 명을 사형에 처한다. 주동자인 미켈레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진다. 미켈레를 처형할 경우 분노한 노동자들이 다시 들고일어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치옴피의 난이 비단 과거 타국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도 법과 제도는 노동자들보다 일부 기득권의 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퍼뜨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이간질하고, 마지막에는 용역을 불러 에워싼다. 예나 지금이나 참 낯설지가 않아 씁쓸하다.


어쨌든 치옴피의 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등 하층민들의 기본 권리에 대한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 르네상스 태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치옴피의 난을 주도했던 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보르토네의 1895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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