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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Nov 30. 2020

권력, 종교에서 시민에게 넘어오다

르네상스로 가기 위한 투쟁(2)

시뇨리아 광장과 공화국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중간쯤에는 오르 산 미켈레라는 조그만 교회(Chiesa e Museo di Orsanmichele)가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 있지만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이 있더라도 이곳이 예전 곡물 시장이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신흥 상인을 비롯한 시민 세력들이 전통 귀족의 기득권에 대항한 상징적인 곳이다.


기벨린(황제파)과 겔프(교황파)의 대결에서 겔프파를 지지한 신흥 상인들의 부상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신흥 상인 세력은 초창기 겔프파와는 결이 다르다. 초기에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하여 주교에게 대항했던 개혁적 수도사들이 겔프파의 주축이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기벨린파에 대항했다. 


기벨린파의 중심인 전통 귀족들은 농장과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소작료를 근간으로 부와 지위를 유지했다. 반면에 무역과 은행업을 주축으로 부를 쌓은 신흥 상인들은 전통 농업구조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겔프파를 지지한다.


교황 역시 십자군 전쟁으로 거덜 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상인들에게 받은 대출금 때문에 이들을 지원했다. 사실 이 시기 즈음 기벨린과 겔프는 이미 처음과 그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

오르 산 미켈레 교회가 있는 거리. 제일 오른쪽 건물이 오르 산 미켈레 교회이다. 휴일인 성탄절 아침이라 거리가 한산하지만 평소에는 수많은 인파가 붐빈다.

기벨린과 겔프의 변화 


여기서 기벨린과 겔프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짧게 살펴보자. 부패한 대주교와 그에 대항하는 수도사들로부터 피렌체의 기벨린과 겔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벨린과 겔프라는 명칭은 조금 더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그 의미가 여러 차례에 거쳐 조금씩 변해왔다.


원래 이 두 단어는 독일의 두 명문 귀족 집안인 호엔슈타우펜과 벨프의 대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두 집안은 독일 황제(신성로마제국)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주요 거점이 바이블링겐(Waiblingen) 지역이었는데 이를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하면서 변형된 것이 기벨린(Ghibellini)이다. 그리고 벨프(Welf) 가문을 이탈리아식으로 표기한 것이 겔프(Guelfi)가 된다. 


그리고 두 가문 중 어느 가문을 지지하는가에 따라 기벨린파와 겔프파로 나뉘었다. 신성로마제국이 유럽을 아우르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말은 당시 유럽 전체의 정치 구도를 나타나는 용어이기도 했다.


115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인 프레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1190)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길 원했다. 이런 황제의 이탈리아 진출을 막기 위해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을 규합하여 롬바르디아 동맹(LegaLombarda)을 결성한다.


이후에도 황제와 교황의 대립은 황제 프레드리히2세(Friedrich II, 1194-1250)와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PP. IV, 재위 1243-1254)의 대립까지 이어진다. 황제와 교황은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1235-1250) 이때 이탈리아 내에서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은 기벨린파라고 불렀고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은 겔프파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의미가 변했다.


13세기 중반 프랑스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1309년 프랑스 군대는 교황을 체포하여 아비뇽으로 이주시킨다. 이른바 세속 군주가 종교 권력을 압도한 아비뇽 유수(1309-1377)이다. 힘을 잃은 교황은 이탈리아 패권 다툼의 조연으로 밀려났다. 이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중심이 되었다.


기벨린파와 겔프파의 대립 


이탈리아 내에서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는 세력은 여전히 기벨린파로 불렸다. 하지만 겔프파는 프랑스를 지지하거나 기존 세력에 도전하는 신진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밀라노 등 이탈리아 북부 지방은 기벨린파가 강했다. 반면에 나폴리와 피렌체를 비롯해 이탈리아 남부와 중부 지방은 겔프파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애초에 두 명문 가문의 대립을 표현하던 단어가 황제와 교황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말로 변했다가 이제는 이탈리아 내 지역적인 정파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다.


피렌체도 처음에는 황제와 교황에 대한 지지 여부로 파벌이 나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구시대 세력(기벨린)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신진 세력(겔프)의 대결로 그 양상이 변해갔다.


겔프파에 부유한 신흥 상인들이 협력한 데 이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지식인들도 합류한다.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Durante degli Allighieri, 1265-1321, 본명은 두란테이며 단테는 애칭)도 겔프파로 정치에 참여했다.


여기에 귀족들의 높은 소작료 때문에 고통받던 농민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든다. 이들은 대부분 모직업 노동자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겔프파를 지지하게 된다. 많을 때는 피렌체 시민 10만 명 중 2만 명 이상이 모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이탈은 기벨린파의 축소로 이어졌다.


상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모았다. 이런 노력들이 발전하여 직종별 길드를 만들게 되고 더 나아가 길드 자치정부를 수립한다. 이 자치정부가 나중에 시뇨리아(Signoria)라는 공화정으로 발전한다. 길드 자치 정부가 종교권력에 의지하던 주교와 귀족들에게 세속권력으로 맞서는 형태가 되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자 식량난이 심해졌다. 하지만 귀족들은 시민들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매우 비싸게 팔아 더 큰 이익을 취할 궁리만 했다. 그들은 사회 전반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이와 달리 길드 자치 정부는 권력의 핵심이 시민들의 지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식량난을 해소해야 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인들은 무역이라는 자신들의 특기를 발휘한다. 나폴리에서 싼 가격에 곡물을 들여와 시민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당시 곡물을 저장하고 판매했던 시장이 현재 오르 산 미켈레(Orsanmichele, 대천사 미카엘의 텃밭이라는 뜻) 교회가 있는  자리이다.


이 일은 길드 자치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가 크게 늘어나는 계기가 된다. 거기다 이 곳에 있던 '은총의 성모 마리아' 그림이 병자를 치유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난다.

은총의 성모 마리아. 매우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최고의 예술품 중 하나로 꼽힌다.

귀족 몰아내고 새로운 승자가 된 상인들 


1291년 오르 산 미켈레를 찾아오는 신도들을 안내하고 관리하기 위해 평신도회(La Compagnia dei Laudesi)가 조직된다. 이 단체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빵을 나눠주는 구호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평신도회는 말 그대로 사제나 수도사가 아닌 평신도들의 친목과 교류를 위한 단체를 말한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들에게는 이 평신도회의 성장도 큰 위협이었다.


귀족들은 주교와 함께 두오모 성당 인근에 모여 살며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히 했다. 두오모 성당은 피렌체의 영적 중심지이자 종교권력의 핵심이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두오모 성당이 지어지기 전에 같은 자리에 있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Chiesa di SantaReparata)이 두오모 성당으로 불렸다. 시민들의 지지를 잃고 길드 자치 정부에 밀리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주교와 고위 성직자로 대변되는 종교 권력뿐이었다.


그런데 평신도회의 종교행사들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 회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길드 자치 정부가 지원했다. 사제가 없는 종교행사의 활성화는 곧 전통적 종교권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여기에 1292년 2월 교황이 '은총의 성모 마리아' 그림을 순례지로 지정해주며 힘을 실어 주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규모의 헌금이 모이고 이는 자치 정부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 오르 산 미켈레는 시민들의 새로운 영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는 종교권력의 중심마저 두오모 성당에서 오르 산 미켈레로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막다른 길에 몰리던 귀족들은  조급해졌다. 그들은 1304년 여름, 오르 산 미켈레에 방화를 저지른다. 지금은 벽돌로 사방이 막힌 건물이지만 당시에는 나무로 지은 건물이라 금방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 방화는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피렌체의 여름은 우리나라와 달리 몹시 건조하다. 이 때문에 불길은 삽시간에 주변 일반인 거주지역으로 번졌다. 이 화재로 1700여 채의 가옥이 불에 탔다고 한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고 귀족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화재 이후 자치정부가 자금을 대 3층 건물로 다시 짓게 된다. 1층은 예배당이고 2층은 곡물 창고, 3층은 길드 사무실로 쓰였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는 각 길드의 수호성인을 조각한다. 이렇게 해서 현재와 같은 오르 산 미켈레 교회의 모습이 된다.


당시 방화로 소실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그림도 복원되었다. 그리고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석 장식으로 주변을 감쌌다. 얼핏 보면 전체가 하나의 장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117개의 대리석 조각들을 이어 붙인 것이다. 여기에 8만 6천 플로린(약 700억 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이는 100여 년 뒤에 만들어진 조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보다 50억 원 정도 더 비싼 금액이라고 한다.


주교가 임명한 사제가 이 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려 했지만 시민들은 거부했다. 오르 산 미켈레 교회는 신흥 상인을 비롯한 시민계급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1층은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는 예배당이고 2층에는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료로 관람이 가능 하지만 요일과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사전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기벨린과 겔프, 전통 귀족과 신흥 상인의 대립이 서서히 마무리되어갔다. 권력은 시민들에게 넘어왔고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 피렌체 공화국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한 때 같은 편이었던 이들은 곧 겔프 백당과 흑당으로 갈라져 다시 대립하게 된다.

오르 산 미켈레 교회.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지만 개방 시간이 짧아서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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