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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Dec 22. 2020

메디치, 아들을 '꽂아 넣다'

르네상스의 자본과 정치, 그리고 종교(5)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던 피렌체를 얘기할 때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막대한 부로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를 후원하며 피렌체의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반면에 그림자 뒤에 숨어 공직선거까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며 공화주의를 훼손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각종 법과 원칙은 메디치 가문에게만은 적용되지 않았다.


시민의 왕이거나 왕 같은 시민로렌초


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일 것이다.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의 사망 이후 갓 20살이 된 로렌초는 가문의 부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정치권력을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보며 자란 로렌초의 정치 수완은 대단히 뛰어났다. 


교황은 피렌체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메디치가 점점 불편해졌다. 1478년 4월 교황 식스투스 6세의 지원을 받은 파치 가문이 로렌초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동생 줄리아노만 죽고 로렌초 암살은 실패한다. 이 사건 직후 피렌체 정부는 식스투스 6세 교황을 ‘베드로의 자리를 차지한 유다’라며 저주한다. 반대로 교황은 로렌초를 이단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피렌체 도시 전체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식스투스 6세는 이단 피렌체를 정벌하기 위해 나폴리를 부추긴다. 교황과 손을 잡은 나폴리 군대는 토스카나 지역 도시를 하나씩 점령하며 북진하여 피렌체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이처럼 도시의 운명이 위급했지만 피렌체의 군사력은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이때 로렌초는 큰 결단을 내린다. 12월 6일, 피사에서 배를 타고 적진의 심장인 나폴리로 들어간 것이다. 어떠한 무장이나 호위 병력도 없이 단신이었다. 


당시 나폴리의 페란테 왕은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로렌초를 잡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죽일 태세였다. 하지만, 로렌초는 이런 페란테 왕과 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장장 3개월 동안이나 협상을 펼쳤다. 로렌초는 가져간 선물과 돈을 뿌리며 나폴리 시민과 고위층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페란테 왕에게 여러 가지 외교적 카드와 특권을 제안한다. 마침내 페란테 왕과의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고 로렌초는 피렌체로 돌아온다. 이는 교황에 대한 사실상의 판정승이었다.


보티첼리는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를 그린다. 팔라스는 아테나 여신으로 지혜와 예술, 전쟁의 신이다.  팔라스는 로렌초를 상징한다. 그림에서 팔라스는 월계수를 쓰고 반지 고리 문양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모두 로렌초가 즐겨 쓰던 가문 문양이다. 그리고 켄타우로스는 식스투스 4세를 비롯한 적들을 상징한다.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보티첼리, 우피치 미술관. 팔라스(로렌초)가 켄타우로스(식스투스 4세)의 머리를 잡고 있다.


다른 부자와 귀족들이 피신하기 급급할 때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평화협정을 일구어낸 로렌초는 단번에 피렌체의 구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로렌초의 정치적 입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더욱 공고해졌다. 그야말로 ‘시민의 왕이거나 왕 같은 시민’이었다.


이 일로 로렌초는 ‘일 마나피코(il Manafico, 위대한 자)’라는 호칭을 얻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호칭은 로렌초 스스로 붙였다고 한다. 사후에 피렌체 정부로부터 ‘파테르 파트리아에(PaterPatriae, 국부)’라는 칭호를 받았던 자신의 할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를 의식했을지도 모른다.


로렌초는 예술과 철학에 아낌없이 후원했다. 본인 역시 예술과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 10대인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 저택으로 불러 함께 기거하며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이런 로렌초 덕분에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최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에 비해 사업 수완은 신통치 못했다.


당시 메디치 은행은 거듭된 투자 실패와 동업자들의 횡령과 실책으로 그 규모가 계속 쪼그라들고 있었다. 1489년에 피사 지점이 문을 닫았다. 결국 구조조정을 해야 했고 일부 동업자들은 자신들의 지분을 챙겨 갈라서게 된다. 곳곳에 퍼져있던 지점 중 남은 곳은 피렌체, 로마, 나폴리, 리옹 단 4개뿐이었다.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지출을 계속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자식을 소위 ‘낙하산’으로 고위직에 앉히기 위해 엄청난 지출을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여덟 살의 대주교


로렌초에게는 피에로, 조반니, 줄리아노 등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첫째 아들 피에로는 정치가로 둘째 아들 조반니는 성직자로 키울 결심을 한다. 로렌초는 자신의 세 아들에 대해 ‘하나는 바보고, 하나는 똑똑하며 나머지 하나는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로렌초가 바보라고 했던 장남 피에로는 영 신통치 않았다. 장남 피에로는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크고 작은 실책으로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피에로의 실정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피에로는 정치적 무능은 물론이고 예술적 안목도 현저히 부족했다. 피렌체에 눈이 많이 왔을 때,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를 불러서 고작 눈사람이나 만들어보라고 한 것은 피에로의 무능과 무지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로렌초의 둘째 아들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1475-1521)’이다. 어려서부터 사치를 좋아했지만 매우 영특했다. 로렌초는 조반니가 여덟 살이 되자 사제 서품을 받게 한다. 1483년 6월 1일, 현재 산타 크로체 성당의 카펠라 메디치(메디치 예배당)로 추정되는 곳에서 조반니의 견진성사와 삭발례가 거행되었다. 이때부터 조반니는 ‘메시레 조반니(Messire Giovanni)라고 불렸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 사제 서품을 받으면 시종이나 문지기 등의 하위 성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6월 8일 프랑스의 루이 11세에게 전갈이 도착한다.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 지역의 대주교구를 하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제가 된 지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당시의 통신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는 사제 서품을 받기 전부터 협의된 사항이었다. 루이 11세는 메디치 가문과 여러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다. 로렌초는 돈과 권력으로 아들을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자리에 초고속으로 앉혔다. 로렌초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조반니를 수도원장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로렌초는 당시까지 남아있던 메디치 은행의 리옹 지점에게 이 일을 지시했다. 리옹 지점은 프랑스 서부 퐁두스 대수도원장 자리를 두고 협상에 들어갔다. 은행 지점인 만큼 협상 도구란 다름 아닌 돈이었다. 결국 샤르뜨레 근처의 상 제메 수도원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푸아티에 근처 르 팽 수도원의 주교가 된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있더라도 불과 여덟 살 꼬마가 수도원장이라니 일반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뽀아띠에 근처의 르 뺑 수도원에서는 핏덩이 같은 주교 조반니의 이름을 앞세워 코시모 사세티가 교회재산을 가져가려고 하자 그가 교회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했다.
- 팀 팍스 <메디치 머니>(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384쪽)


하지만 결국 조반니는 여덟 살에 수도사와 사제뿐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까지도 영향력을 미치는 수도원장이 되었다.


돈과 권력 앞에 원칙과 절차 따위...


로렌초가 이렇게 아들을 고위 성직에 앉히려고 집착한 데에는 자식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과 함께 다른 이유도 있었다. ‘메디치 머니’를 쓴 팀 팍스는 줄어드는 가문의 재산을 메꾸기 위해 교회 재산과 성직록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조반니는 나폴리 인근의 카시노 대수도원장과 밀라노 근처의 모리몬도 대수도원장 등 무려 십여 개가 넘는 성직을 맡는다. 이는 모두 조반니가 성직자가 되기 전부터 온갖 로비를 벌이며 준비한 결과였다. 이런 성직들은 메디치 가문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었다.


로렌초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반니를 추기경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추기경은 오랜 시간 동안 성직에 봉사하고 여러 시험과 검증을 단계적으로 거쳐야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거기다 당시 기준으로 조반니의 나이는 추기경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조반니가 수도원장 자리까지 오르는 것은 묵인할 수 있지만 추기경은 절대 불가하다는 내외부 반발이 많았다. 하지만 로렌초는 이미 뒷거래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통달해 있었다. 로렌초에게 여러 정상적인 절차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 앞에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로렌초는 여러 고위층을 공략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1484년 교황에 오른 인노첸시오 8세(Papa Innocenzo VIII, 1484-1492)가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교황에게는 ‘프란체스키토 키보’라는 혼외자가 있었다. 1488년, 로렌초는 자신의 딸 마달레나 데 메디치(Maddalena de' Medici, 1473년 – 1519년)를 교황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교황에게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을 대출해준다. 1482년 메디치 은행의 자본금 총액이 5만 2천 플로린이었고, 로렌초의 지분이 2만 플로린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교황은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도 않았다. 원금과 이자가 연체될 때는 현금 대신 백반으로 지급하기도 했다. 


당시 백반은 철과 소금 다음으로 중요한 광물이었고, 메디치는 한 때 전 세계 기독교 국가에 대한 백반 판매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독점권을 잃은 뒤였기 때문에 백반을 현금화할 경로가 딱히 없었다. 그럼에도 로렌초는 현금 대신 백반으로 받은 것이다. 그만큼 둘째 아들을 고위 성직에 올리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했다.


이 외에도 로렌초는 교황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야생 조류나 포도주, 옷감, 더 나아가 예술가들까지도 아낌없이 보냈다. 로렌초가 보내는 선물이 하도 많아서 교황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교황은 로렌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잠을 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열세 살의 추기경


이런 노력의 결과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교황은 1489년 나이 제한을 철폐한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3일 열세 살의 조반니는 추기경이 된다. 권력과 재산으로 자식에게 특권을 주려는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상위 1퍼센트의 자식 사랑 방법인 듯하다.


추기경에 임명되었지만 조반니가 추기경의 문장과 추기경단에 합류하는 것은 보류되었다. 나이 제한 폐지에 따른 주변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반니는 약 2년 간 피사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면 지낸다. 그러다 1492년, 정식으로 추기경단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고 로마로 간다.


조반니는 그 영특함과 아버지에게서 배운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로마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고 1513년 3월 9일 율리오 2세를 이어 교황 레오 10세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이었다.


조반니의 추기경 임명은 메디치 은행의 쇠락과 함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시민들의 신망을 잃는데 기여한다. 메디치 가문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디치는 토착 귀족에 대항해 시민들의 편에 섰다. 그래서 메디치는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최고의 가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점차 신뢰와 존경을 잃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만다.



교황 레오 10세와 두 명의 추기경(라파엘로, 우피치 미술관).  가운데 인물이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 교황이다. 라파엘로의 작품,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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