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자본과 정치, 그리고 종교(4)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와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 있는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피렌체의 명소다.
이 광장 바닥 한쪽에는 돌판이 하나 있다. 대부분 여행자들은 돌판의 존재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 돌판은 피렌체 역사상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중 한 명에 대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 아래 풍요로움을 한껏 누리던 피렌체 시민들 앞에 한 수도사가 나타난다. 날카로운 눈매와 고집스럽고 보이는 인상, 거기에 강하고 신념에 찬 목소리로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며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이며 나중에 산마르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였다.
권력에 대한 정면 비판
사보나롤라는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며 개혁을 주창했다. 특히 당시 새롭게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의 개인사를 들추며 소위 저격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황 중 하나로 ‘교황들 중의 네로’라고 불릴 정도로 탐욕스럽고 잔인했다. 정부가 6명이나 되었고, 슬하에 자녀도 여럿 두고 있었다.
또한, 사보나롤라는 로렌체 데 메디치를 비롯한 메디치 가문 역시 비판했다. 재미있는 것은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초빙한 것이 로렌초였다는 것이다. 교황과 대립하던 로렌체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피렌체 시민들의 반교황 정서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교황에 비판적이던 사보나롤라를 데려 왔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향락과 사치의 도시로 만든 주범으로 보았다. 그리고 로렌초 데 메디치를 독재자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신성 공화국’ 설립을 외쳤다.
교회와 권력자의 부패를 비판하며,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주장하는 그의 설교는 하층민을 시작으로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급기야 자신을 신이 보낸 예언자로 주장하면서 추종자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중에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로렌초가 죽은 후, 사보나롤라는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피렌체 정부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피렌체를 성경에 입각한 도시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한다.
1497년에는 도시 내 모든 사치품(귀금속, 그림, 책 등)을 모아 시뇨리아 광장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일명 ‘허영의 화형식’이었다. 시민들은 솟구치는 불길을 보며 성가를 불렀고, 큰 소리로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이때 보티첼리도 자신의 작품을 이 화형식에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친구들이 간신히 말렸다고 한다.
보다 못한 교황청은 사보나롤라에게 극단적인 설교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추기경 자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피로 물든 붉은 모자(그리스도의 피의 면류관)를 쓴 순교자’가 되길 원한다며 제안을 단번에 거절한다.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파문했고 뒤이어 피렌체 도시 전체를 파문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사보나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교황의 '제거' 명령
결국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피렌체 내에서는 사보나롤라의 지나친 금욕주의와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는 공포스러운 설교에 조금씩 지쳐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라비아티(Arrabbiati)’라고 불리는 사보나롤라의 반대세력도 생겼다. 교황은 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메디치 가문의 일대기를 정리한 G.F. Young은 그의 책 ‘메디치(The Medici)’에서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피렌체는 더 이상 강한 정부도 없었고, 한 때 성내에서 선동을 시도하던 대주교를 매달고 교황을 능멸할 때 지녔던 통일된 시민적 역량도 없었다. (중략) 정부도 유약한 데다 부패했기 때문에 개혁을 외치는 설교자를 반대하고 교황의 촉수가 되어 활동할 태세가 되어 있는 정파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G.F. 영 <메디치>(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238쪽)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황의 하수인들은 피렌체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사보나롤라를 거짓 예언자,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급기야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도사가 자신과 함께 신성재판에서 ‘불의 시죄’를 해보자고 제안한다.
시죄(試罪, ordeal)라는 것은 한 마디로 죄를 시험한다는 의미로, 신체에 고통을 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단 혐의를 받는 사람의 몸에 무거운 바위를 묶은 후, 연못에 던진다.
만약 죄가 없다면 하느님의 보호 아래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거나, 천사가 내려와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줄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로 익사하면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의 시죄’이다. 이 물의 시죄는 나중에 더 이상하게 발전하는데, 마녀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생각 때문에 물에서 떠오르면 마녀라는 증거로 보고 죽였다. 그럼 안 떠오르면? 그 또한 그냥 죽는 거다. 시죄는 펄펄 끓는 기름에 손을 짚어넣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사보나롤라에게는 불 속에서도 무사히 걸어 나올 수 있는지 보는 ‘불의 시죄’를 제안한 것이다.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이성적 사고를 발전시켜 온 피렌체 시민들이었지만, 이 야만적인 시죄 제안에 흥분했다. 어서 시죄를 시행해서 기적을 보여달라고 외쳤다. 르네상스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아직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근대로 발전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것 같다.
민중의 영웅에서 민중의 조롱감으로
시죄 당일(1948년 4월 9일)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폭풍우가 불어 시죄는 무산되었다. 하느님의 예언자가 기적을 행하려는 날에 폭풍우가 불다니,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에게 속았다며 분노했다. 다음날 산 마르코 수도원에 들이닥친 시민들은 사보나롤라와 그 제자들을 붙잡았다. 이단 행위, 신성한 교황에 대한 모독, 그리고 분열을 조장한 죄 등의 혐의를 들어 종교재판이 열렸다.
이미 사형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과정을 끼워 맞추는 재판이었다. 온갖 고문을 했지만 혐의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다. 짜인 극본대로 진행되는 재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바르톨로 자티(Barolo Zati)라는 재판관이 ‘살인에 가담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사임하기도 했다.
시간을 더 끌면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세르 체코네(Ser Ceccone)라는 공증인을 불렀다. 쉽게 말하면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는 기술자였다. 사보나롤라는 16일 이상 고문을 당했고, 어떨 때는 하루에 열네 번이나 고문대에 올라가야만 했다.
마침내 교황이 원하던 결과가 나왔다. 사보나롤라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서명했다. 당연히 문서가 날조되었다는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 당시 한 재판관은 ‘선한 의도로 일부는 생략하거나 첨가했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498년 5월 19일 피렌체에 도착한 교황청의 재판관들이 3일간의 최종 재판을 진행했고, 5월 22일 정해진 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1498년 5월 23일, 시뇨리아 광장 한가운데 화형대가 만들어졌다. 사보나롤라를 비롯해 다른 두 동료 수도사 ‘프라 도메티고(Fra Domenico)’와 ‘프라 실베스트로(Fra Silvestro)’도 함께 화형대에 올라갔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1년 전만 해도 사보나롤라를 지도자로 받들던 군중들이 이제는 그를 향해 조롱과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혹시라도 사보나롤라가 진짜 기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그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고 일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이런 사보나롤라의 지지자들을 ‘흐느끼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훗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군주가 되었을 때 공화정 회복을 주장하며 지하로 숨어들어 메디치의 반대파가 되었다.
사보나롤라가 화형 당했던 장소가 바로 시뇨리아 광장에 바닥에 있는 돌판이다. 자신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시민들과 허영의 화형식을 치렀던 곳에서, 딱 1년 만에 등을 돌린 시민들의 조롱을 받으며 불꽃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솔로몬)
G.F.영 <메디치>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김상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21세기 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