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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Nov 19. 2020

중세 최고의 발명, 연옥

르네상스의 시작(1)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자 근대로 가는 인류의 큰 발걸음이었다. 이런 르네상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여기에는 미술, 종교, 철학, 경제, 정치, 역사 등 그 분야만큼이나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만큼 르네상스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발생했다. 그 요인들 중에서도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했던 몇 가지를 살펴보자. 


르네상스 최초의 천재, 단테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는 르네상스 최초의 천재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고대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앙심을 결합하여 쓴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은 수많은 지신인과 예술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는 단테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미켈란젤로 역시 평생 동안 단테의 작품을 탐독했다. 


당시 라틴어로 글을 쓰던 지식인들과 달리 단테는 피렌체 방언으로 신곡을 썼다. 이 작품의 엄청난 인기 덕분에 이탈리아 전역에 신곡을 암송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유행이 되었다. 자연히 피렌체 방언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현대 이탈리아 표준어의 근간이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단테를 만날 수 있는 곳이 피렌체에서는 의외로 적다. 조각이나 회화가 아닌 글을 쓰는 문인이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정치적 상황에 휩쓸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 라벤나에서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단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단테 생가(Museo Casa di Dante)다. 좁은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가기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단테의 명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찾는 이들도 많지 않다. 



▲ 피렌체를 바라보는 단테(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내부) 정쟁에 휩쓸려 추방당한 단테는 평생 피렌체를 그리워했지만 결국 라벤나에서 숨을 거둔다. 본명은 듀란테(Durante)


▲ 단테 생가(단테 박물관) 실제 단테 생가는 아니다. 1865년 단테 탄생 600주년을 기념해 피렌체 시정부가 복원했고, 1965년 단테 탄생 700주년을 맞아 리모델링해서 단테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데 자신이 평소 흠모했던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는다. 그런데 신곡은 가톨릭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교도인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단테의 안내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단테는 림보(Limbo)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림보는 태어나자마자 죽어 세례를 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순수한 영혼, 즉 갓난아기들이 가는 곳이다. 이 아기들은 죄를 지을 기회 자체가 없었지만 세례를 받지 못해서 원죄 때문에 지옥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가혹한 처사에 어느 부모가 동의하겠는가? 이는 '모든 인간의 구 원을 바란다'는 신의 의지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들은 지옥이 아니라 림보로 간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비롯해 고대 철학자들이 림보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예수가 이 땅에 오기 전에 태어나서 신앙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을 뿐, 그들은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이런 식으로 고대 철학자들과 가톨릭 교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한다. 이는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고대 철학과 예술을 탐구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르네상스 발현을 위해 중세가 남겨준 유산, 연옥 


르네상스는 중세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중세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세를 거치면서 발전된 개념이 르네상스 촉발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은 서론 1곡을 포함해 지옥(Inferno) 33곡, 연옥(Purgatorio) 33곡, 천국 (Paradiso) 33곡 등 총 100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탄 무리가 지상에 추락하면서 깔때기 모 양의 거대한 동굴이 생겼는데,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리고 이때의 충격으로 지구 반대편에 밀려 나온 큰 산이 연옥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연옥이다. 


림보가 세례를 받지 못한 순수한 영혼들이 가는 곳이라면 연옥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이 연옥은 르네상스 발현을 위해 중세가 남겨준 유산이었다. 


▲ 신곡에서 묘사된 지옥의 모습(단테 박물관) 땅 속으로 깊이 파인 깔때기 모양의 동굴이다.
▲ 신곡에서 묘사된 연옥의 모습(단테 박물관) 지옥의 반대편에 크게 솟아오른 산의 모습이다.

메디치를 비롯한 피렌체의 부유층은 양모업과 은행업으로 큰 부를 쌓았다. 그리고 여러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부유층의 후원이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당시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일은 종교적으로 분명한 죄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은행업이 성행할 수 있었을까? 가톨릭의 사후 세계관은 꽤 단순하다. 신을 믿고 순결한 영혼은 천국에 가고 죄를 지은 영혼은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이분법으로 나누기에는 세상에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지옥에 떨어져야 할 대죄인과 당연히 천국에 갈 만큼 선한 사람들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이런저런 사소한 잘못을 한다. 그런데 이런 보통 사람들이 모두 지옥불에 떨어져야 한다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네 종류로 나누었다. 1) 전적으로 선한 자들 2) 전적으로 악 한 자들 3) 전적으로 선하지는 않은 자들 4) 전적으로 악하지는 않은 자들이 그것이다. 대부 분의 사람들은 3)과 4)에 속한다. 


한자로 '태울 연'이 쓰이는 것처럼, 연옥(燃獄)이란 생전에 지었던 죄를 태워 없애는 곳이다. 연옥은 성경이나 공식 교리에 나오지 않지만 민간에는 널리 퍼진 개념이었다. 연옥을 뜻하는 '푸르가토리움(Prugatorium)'이라는 단어는 12세기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그전부터 '정화하는 불(in igne purgatorio)'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옥 개념은 아주 오래 전부 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틈새를 비집고 시작된 르네상스 


연옥에서 죄를 태우는 방법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이다. 지옥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고통스럽다. 신곡의 연옥에서 이간질한 사람은 악마가 칼로 몸을 두 동강 내버린다. 시간이 지나 몸이 회복되면 악마가 다시 칼로 내리친다. 이런 고통을 거쳐 생전의 죄가 모두 없어져야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연옥에서 받는 고통을 경감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신곡 연옥 편에는 고통받는 한 영혼이 단테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로마냐와 카를로 지방 사이의 땅을 여행한다면 파노에 있는 영혼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해 주시오. 그러면 내 죄가 곧 씻겨지기 시작할 것이오. (<신곡>, 단테 지음, 박상진 엮어 옮김, 서해문집, 154쪽) 


어느 정도 죄를 지어도 바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에 머물면서 천국에 갈 기회를 가 질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거기다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시간까지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빡빡했던 사후 세계관에 숨 쉴 틈이 생겼고, 사람들은 좀 더 자유로운 생각과 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연옥을 '중세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부른 다. 


연옥 덕분에 은행업으로 부를 쌓아도 바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재산을 물려받은 후손이 열심히 기도해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시간이 더 빨라진다. 그래서 부유층들은 재산을 교 회에 기부하고 아예 예배당을 배당받아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덕분에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태어났다. 연옥으로 인해 생긴 틈은 점차 넓어졌고, 여기에 새로운 사상과 예술이 자리 잡으면서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 브랑카치 예배당(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부유했던 브랑카치 가문이 사후의 고통을 경감하고자 꾸민 예배당이다. 미켈란젤로가 따라 그렸던 마사초의 유명한 벽화가 있다.


[참고서적]
 서울대학교 중세르네상스연구소 <중세의 죽음> (산처럼)
 단테 <신곡> (박상진 옮김, 서해문집)
 G.F.영 <메디치>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김상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21세기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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