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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Jun 09. 2021

부정하기에 죽여도 되는 존재, 호모 사케르

르네상스, 인간, 그리고 우리...

이탈리아 피렌체 기차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오면 맞은편에 커다란 맥도널드 햄버거 매장이 있다. 이곳은 항상 인파로 붐비는 곳인데 몇 년 전부터 작은 변화가 생겼다.


전에 없던 무인 주문기가 2017년부터 들어선 것이다. 화면을 터치해서 주문할 수 있었는데, 이미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기에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2018년 겨울에 다시 그 앞을 지나는데 한 노부부를 목격했다.


그들은 그 기계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직원을 찾으려 두리번거렸지만 마침 무인 주문만 가능한 시간대여서 그런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른 테이블에서 있던 한 청년이 일어나 노부부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청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문을 마친 그들은 긴 한숨을 쉬며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잠깐 스쳐 지나간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에 남았다.

       

무인 주문기. 과연 모두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일까?


호모 사케르(Homo sacer)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쓰던 말인데,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이 다시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이렇게 정의한다.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vita uccidibile e insacrificabile)
-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새물결, 45쪽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건 제사에 쓰일 수 없다는 것, 즉 신성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일 수는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이 가능하다. 호모 사케르 살해에 대해 면책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신성한 권리를 받았거나 스스로 신성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호모 사케르에 대한 살해를 허락하거나 부추기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장애인이나 나환자들은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호모 사케르였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의 팔다리를 자르고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이는 현대가 되어서도 형태가 바뀌었을 뿐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이나 약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된다. 앞서 말한 피렌체의 노부부는 물론이고 한국에도 많은 어르신들이 급속히 발달하는 기술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그냥 문명에 대한 부적응자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현대 문명의 호모 사케르가 되어 버렸다.


 기득권의 무기 - 호모 사케르화(化)


과거 무고한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대중들에게 던져졌다. 이는 종교 권력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마녀'라는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들이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는 만큼 종교 권력은 강화되었고 견제는 약화되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대중들의 자각과 연대에 의해 발전해 왔다. 그래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고 대중이 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도연맹, 빨갱이로 낙인찍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민이되 국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소수자, 장애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중이 호모 사케르 사냥에 열중할수록 어떤 이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최근 한국에서 본 대표적인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면 전직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이 떠오른다. 백번 양보해서 공직자 당사자는 그렇다고 쳐도 공직과 관련 없는 한 젊은 여성의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는 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잔인했다. 언론들은 늦은 밤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민감한 개인정보인 학생생활기록부까지 공개했다. 당시 온 국민이 그 여성의 내신 등급과 영어 성적을 알게 되었다.


공격하는 자들은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공직자와 가족을 호모 사케르화(化)하여 대중 앞에 내던진 것이다. 호모 사케르, 즉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짓밟고 죽여도 괜찮으니 마음껏 돌을 던지라고 대중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기득권이 그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신문사 사장의 자녀 특혜 채용이 드러났다. 이는 앞서 말한 전직 장관과 유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분노에 차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조리돌림을 부추기던 이들은 모두 침묵한다. 음식 배달원을 둘러싸고 메뉴가 뭐였냐고 폭포수같이 질문을 던지던 이들이 지금은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 누구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 건지 정하고, 또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이 사회의 진짜 권력자들이다.


르네상스, 인간, 그리고 우리...


호모 사케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기술과 자본의 발전 어느 곳에나 스며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삶을 발전시킨다고 하지만 정작 노인들이 햄버거 조차 마음대로 주문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말 옳은지 생각해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와 스크린 도어에 끼여 스러져간 젊은 죽음에 대해 과연 자본과 사회구조는 책임이 없는지 물어봐야 한다. 사회 진출의 기회조차 제대로 잡기 어려운 젊은이들이 정말 아픈 만큼 어른이 되는 게 맞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올라가 삼복더위를 버티며 농성하는 사람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우리의 무관심이 계속된다면 호모 사케르가 되어 대중 앞에 내던져지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내 가족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보다 연대가 필요하다.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얘기하다가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든다. 피렌체는 인간 본성의 재발견이라는 르네상스의 발현지이다. 그리고 코로나 시국이 지나가면 수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르네상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건축물과 예술품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햄버거 주문을 위해 헤매던 피렌체의 노부부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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