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종말을 앞당긴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②
자유낙하 법칙 증명 이후 갈릴레오는 높아지는 명성만큼 동료 교수들과의 불화가 심해졌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학생들도 수업 시간에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고 거만했던 갈릴레오는 그들을 '구식 체계에 매여 있는 노예'라고 비난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1592년, 피사 대학은 계약기간 3년이 끝나자 갈릴레오를 해고한다. 갈릴레오 역시 피사 대학은 자신을 담기에 너무 작은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여러 고위층과 인맥을 다지면서 파도바 대학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교수 임용 건은 1592년 6월 베네치아 상원에서 표결에 부쳤다. 투표 결과, 압도적인 찬성 속에 교수 임용이 승인된다(찬성 149표, 반대 8표).
이 시기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내 어느 도시보다 출판과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는 도시였다. 그래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베네치아로 모여들었고 교황청과 자주 불편한 관계가 됐다.
1606년, 보다 못한 교황 바오로 5세가 도시 전체를 파문하지만 정부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 내 성직자들이 정부 편을 들면서 교황을 당황하게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건너갔다고 얘기한다.
베네치아에 속해 있던 파도바 대학 역시 자유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띠었다. 파도바 대학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면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 대학과 경쟁하던 명문대학이었다. 이런 곳에 교수 경력 4년이 채 되지 않는 28살의 갈릴레오가 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이는 그 짧은 기간 동안 갈릴레오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경제적 어려움
파도바 대학의 진보적인 학풍은 갈릴레오에게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여기에서 18년이나 재직한다. 하지만 처음 몇 년은 마음 편하게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파도바 대학으로 처음 옮길 때 갈릴레오의 연봉은 128두카트(베네치아 금화, 1두카트는 10~15만 원 정도)였다. 피사 대학보다 세 배나 높았지만 갈릴레오는 항상 재정난에 허덕였다. 부친의 사망 이후 갈릴레오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동생 미켈란젤로는 한 가지 직업에 정착 못 하고 사고만 저질렀다. 동생이 일으키는 문제는 갈릴레오가 수습해야 했다(대부분 금전적인 문제였다).
여동생 비르지니아가 결혼할 때는 지참금 1800두카트도 갈릴레오의 책임이었다. 800두카트는 일시불로 지급하고 나머지 1000두카트는 5년간 나눠서 지급하기로 했다. 그래도 갈릴레오의 연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1593년 갈릴레오가 지참금 납입을 몇 달 놓치자 매부는 갈릴레오를 고발한다. 부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해결했지만, 자존심 강한 갈릴레오에게는 큰 굴욕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갈릴레오는 대학 강의 외에도 여러 일을 해야 했다. 개인 교습도 했고 베네치아 해군의 자문도 맡았지만 큰돈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돈이 될 만한 발명품을 만들게 된다. 처음에는 온도계를 만들었지만 수익은 변변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큰돈을 번 발명품은 군사용 컴퍼스였다. 원반에 두 개의 팔이 달려 있고 각 팔에는 세세한 눈금들이 새겨져 있다. 이 컴퍼스는 군용에서 일상생활까지 쓰임새가 다양해서 인기가 많았다.
갈릴레오는 두 명의 장인을 고용하고 작은 집을 하나 빌려 컴퍼스 생산 공장을 차렸다. 1597년부터는 컴퍼스 가격보다 훨씬 비싼 수업료를 받고 사용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귀족이나 고위직에 있는 유명인에게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미래의 인맥을 쌓기 위한 투자였다.
컴퍼스 덕분에 갈릴레오는 빚을 모두 청산하고 3층짜리 집도 장만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는 다시 수학과 자연과학 연구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망원경으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
갈릴레오 이전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가시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관측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천문학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에서 처음 망원경을 접했다. 그리고 이를 개량해 최대 30배까지 확대할 수 있는 고성능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망원경으로 역사상 최초로 천체를 관찰한다.
망원경을 통해 갈릴레오는 달이 거울처럼 평평한 것이 아니라 지구처럼 산과 골짜기로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발견은 1610년 1월 7일, 목성에 딸린 위성의 발견이었다.
지동설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달이 지구를 돌고 있는데 또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갈릴레오가 발견한 4개의 위성은 목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목성은 위성을 거느린 채 12년 주기로 공전하고 있었다. 이는 모든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기존 세계관을 뒤집는 강력한 증거였다.
1610년 3월 13일, 갈릴레오는 이 발견을 <별들의 전언>(Sidereus Nuncius, The Sidereal Message)이라는 소책자로 출판했다. <별들의 전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전 세계는 발칵 뒤집혔다. 갈릴레오는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처럼 일반 대중의 인기까지 한 몸에 받는 과학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이 덕분에 코시모 2세는 갈릴레오에게 '수석 철학자 겸 수학자' 자리를 제안한다.
파도바 대학이 붙잡았지만, 강의 부담이 없고 연구 주제에 대한 제한도 없다는 조건이 갈릴레오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메디치 가문의 보호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별들의 전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의 망원경이 하늘로 향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갈릴레오가 본 것이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며 갈릴레오의 발견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갈릴레오의 반박을 요약하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제발 싸구려가 아닌 성능 좋은 망원경을 쓰시오.'
1611년, 슈퍼스타의 로마 방문
갈릴레오는 1611년 자신의 발견에 대해 교황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를 방문한다. 승인만 받는다면 반대 주장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
교회도 이때까지는 갈릴레오와 크게 각을 세우지 않았다. 어쩌면 갈릴레오의 발견과 주장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1611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예수회와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극진히 대접한다.
1611년 3월 29일,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길릴레오는 여러 추기경과 귀족들을 만났다. 그들은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으며 여러 질문도 던졌다. 그리고 그토록 위대한 발견을 가능하게 해 준 망원경에 대한 시연도 요청했다.
망원경을 이용해 수 킬로미터 떨어진 건물의 글씨까지 읽어내자 참석자들은 놀라워한다. 그 전까지 망원경은 라틴어 '페르스피실룸(perspicillum, 렌즈라는 뜻)'이나 이탈리아어 '오키알레(occhiale)'라고 불렸다. 그러다 이때 시연회를 거치면서 비로소 현재와 같은 '텔레스코프(telescope)'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갈릴레오는 후에 그의 후원조직이 되는 '린체이 학회(Academia del Lincei)'에 가입했으며, 5월 13일에는 로마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는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5세를 직접 만나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등 최고의 시간을 보낸다.
조용히 시작되는 반격
하지만 모두가 갈릴레오를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Ludovico delle Colombe)는 성경을 근거로 지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달은 완전한 구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갈릴레오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까지 차 있는 대기를 포함한다면 지구도 완전한 구형일 것'이라고 반박한다. 콜롬베의 주장을 나름 재치있게 비꼰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정말로 필요한 것은 과학적 대답이었다. 갈릴레오는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에 비하면 달에 있는 산과 산 사이의 간격이 너무 작아서 그 굴곡을 알아볼 수 없고, 그래서 보름달이 완전한 구형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대답했어야 했다.(<갈릴레오의 진실>, 윌리엄 쉬어, 마리아노 아르티가스 지음, 고종숙 옮김, 동아시아, 84쪽)
이번 로마 방문에서 접한 우호적인 분위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교황청이 자신의 발견을 승인해준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쳐 적들을 너무 쉽게 본 것이 갈릴레오의 가장 큰 실수였다. 이제 적들의 반격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참고자료]
갈릴레오 갈릴레이, <새로운 두 과학>, 이무현 옮김, 사이언스북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 이무현 옮김, 사이언스북스
마이클 화이트, <교회의 적 과학의 순교자 갈릴레오>,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윌리엄 쉬어&마리아노 아르티가스, <갈릴레오의 진실>, 고종숙 옮김, 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