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다노 브루노, 사상의 자유 위해 투쟁한 자연철학자
로마는 어쩌면 피렌체보다 더 많은 여행객들이 더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곳곳에 있는 많은 광장들 중에 '캄포 데 피오리(Piazza Campo de'Fiori)'라는 작은 광장이 있다. 지역 장터가 열리는 곳인데 관광객들이 그렇게 많이 찾지 않는다. 하지만 이 광장은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희생된 한 사람을 기리는 장소이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은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라고 불렀다. 물론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 때 당시 자연철학자들에게는 오컬트적(Occult, 신비적·초자연적)인 면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언제나 교회와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교회가 새로운 지식을 무조건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최고 지식인 그룹인 수도원이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교회가 정해놓은 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나폴리 놀라(Nola)에서 태어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라틴어에 능통했고 논리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독일 비텐베르크와 헬름슈테트 등의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강의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다.
당시 예수회가 관장하는 학교에는 '라티오 스투디오룸(Ratio Studiorum)'이라는 교수 지침이 있었다. 이는 예수회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교에 비슷하게 있었다. 이 지침은 크게 두 가지였다.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고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미니크회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종하고 종교 재판을 주관하는 수도회였다. 자연히 브루노는 도미니크회와 갈등을 빚는다. 그는 마법이나 점성술을 신봉하는 등 다소 비합리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지금으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자연과학이론을 주장한다.
선을 넘은 자연 철학자
1572년 밤하늘에 신성이 나타났고, 1577년에는 혜성이 나타났다. 훗날 갈릴레오와 캐플러는 이것들이 우리가 보는 우주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브루노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데, 우주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크며 태양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드넓은 우주의 수많은 별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소위 '무한 우주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와 신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천구가 우주의 전부라고 주장했다. 이에 브루노는 '자기 집의 작은 창문으로만 보이는 새들 외에는 어떠한 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또한 성경을 도덕적인 부분 외에 자연과학의 해석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게 무한 우주론은 지동설보다 더 위험했다. 지동설은 그래도 우주의 크기를 '천구'로 제한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루노는 태양마저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인간이 신의 손에서 태어난 유일한 창조물이자 지적 생명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으로 연결됐다. 교회는 경악한다.
이 때문에 브루노는 교회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철회하라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위협이 점점 거세지자 브루노는 수도복을 집어던지고 방랑길에 올랐고, 나중에는 칼뱅파로 개종하기까지 한다. 교회는 이런 브루노를 꼭 종교재판에 세우고 싶었다.
어느 날 베네치아의 어떤 사람이 브루노에게 선생으로 초청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는 브루노의 신변보호는 물론 연구에 대한 후원도 약속한다. 이를 믿은 브루노는 베네치아로 향했지만 이것은 교회가 꾸민 함정이었다. 1592년 5월 22일, 브루노는 베네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심문 중에도 브루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과거에 피력했던 몇몇 견해들(예수가 신이 아니라 마법사라는 주장 등)에 대해서는 신학적 오류를 인정했지만, 무한 우주론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 견해가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이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만든 우주 역시 무한할 수 있으며 생명체 또한 다른 별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브루노는 사슬에 묶인 채 가로와 세로 각각 2미터인 지하 감방에 갇혔다. 브루노가 베네치아의 감옥에 갇힐 때,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갈릴레오의 파도바 대학 교수 임용 심사가 열리고 있었다. 브루노는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선고받고 바티칸으로 이송됐다. 끝까지 주장을 꺽지 않던 브루노는 무려 8년을 더 갇혀 있어야 했다.
16세기의 종교재판소
당시 종교재판소는 '길 잃은 영혼들을 재교육해 어머니인 교회의 품으로 돌려놓는 일'이 공식적인 임무였다. 교회는 '길 잃은 영혼들'을 찾기 위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교황이 보낸 첩자들의 감시에 시달렸다. 다빈치는 모든 글을 반대로 썼는데, 아이디어를 도둑맞을까 걱정한 것도 있었지만 도처에 깔린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해부 실험을 본 조수가 다빈치를 신성 모독으로 밀고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종교 재판소는 복수의 무기이자 살인하는 기관이었고 16세기의 나치 친위대였다. 기관은 100만 명도 넘는 남녀노소를 처형했다. (<교회의 적, 과학의 순교자 갈릴레오>,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영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100만 명이면 당시 세계 인구로 봤을 때 200명 중 1명꼴이다. '마르부르크의 콘라트'라는 종교재판관은 '100명의 무고한 자들 가운데 죄인이 하나라도 섞여 있다면 나는 모두를 불태우겠다'라고 말했다.
이단으로 확정되는 데는 단 두 명의 증언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리고 화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의심 인물 12명을 고발해야 했다. 르네상스가 발현한 지 한참이 지난 16세기도 여전히 공포와 감시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세계관에 도전하는 것은 때때로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러 과학 지식들은 많은 자연철학자들의 희생에 바탕하고 있다.
1600년 2월 17일, 브루노는 결국 화형대에 세워진다. 집행관들은 그의 사악한 혀를 벌하기 위해 쇠꼬챙이 두 개로 혀와 입천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 위에 쇠로 만든 재갈을 채웠다.
브루노는 발가벗겨진 채 수레에 실려 로마 시내를 돌면서 조롱거리가 됐다. 그리고 화형대가 세워진 감포 데 피오리 광장으로 옮겨졌다. 불이 붙기 직전 누군가가 화형대 위로 올라와 십자가를 내밀었다. 마지막 회개를 종용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악마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십자가를 본 브루노는 단호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종교와 과학의 조화는 가능할까
브루노를 근대 과학자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양하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과 희생은 훗날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1899년 <레 미제라블>을 쓴 작가 빅토르 위고, <인형의 집>을 쓴 헨릭 입센,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 등의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브루노를 기리는 동상을 세운다. 이때 교황 레오 13세(당시 89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단식기도를 한다. 동상 건립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브루노가 화형 당한 지 380여 년이 지난 1979년에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오의 재판과 함께 브루노의 재판에 대해서도 재조사를 지시한다. 그리고 2000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루노에 대한 폭력적인 고문과 사형집행에 대해 사과한다(이 사과의 진정성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와 과학을 무조건 대립 관계로만 볼 수는 없다. 두 분야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여전히 한쪽을 배척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관련 기사 : 합동신대 교수들 "유신 진화론 배격" 선언, 크리스천투데이, 2018년 11월 28일 보도).
브루노에게 종교재판관들은 진리와 정의를 폭력으로 억압하는 부정한 세력들이었다. 브루노가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종교재판관들에게 내뱉은 말은 곱씹을수록 많은 여운을 남긴다.
"너희는 나보다 더 두려워하면서 판결을 내리고 있다."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강의>,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마이클 화이트, <교회의 적, 과학의 순교자 갈릴레오>,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윌리엄 쉬어, 마리아노 아르티카스, <갈릴레오의 진실>, , 고종숙 옮김. 동아시아
시어도어 래브,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강유원&정지인 옮김, 르네상스
크리스천투데이, 합동신대 교수들 "유신 진화론 배격" 선언, 2018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