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종말을 앞당긴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④
1633년 4월 12일, 갈릴레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됐다. 종교재판은 일반적인 재판과 그 목적이 다르다. 종교재판에 회부됐다는 것 자체가 유죄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피고는 자신에 대한 변호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종교재판의 목적은 피고가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심문 과정에서 여러 잔혹한 고문이 뒤따랐다.
하지만, 갈릴레오에게는 고문이 없었다. 또한 심문 중에는 방 세 개가 딸린 건물에 머물렀다. 종교재판의 일반 죄수들이 처참한 지하 감옥 등에 수감됐던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는 피렌체의 메디치 대공이 갈릴레오의 공식 후원자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 유럽에 걸친 갈릴레오의 명성과 그를 지지하는 유력 인사들의 힘도 작용했다. 젊은 시절부터 갈릴레오가 노력했던 인맥 관리의 결과였다.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만 볼뿐이고 절대 교회와 신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대화>의 머리말에 썼듯이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맞섰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봤다면 갈릴레오의 이런 주장이 뻔한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다 1616년에 '말과 글 어떤 방법으로도 지동설을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경고가 적힌 문서가 발견된다. 이 경고를 직접 했던 검사성성의 벨라르미누스 추기경이 세상을 떠났고 세월도 많이 지나서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은 갈릴레오 밖에 없었다. 갈릴레오만 입을 다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그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 문서는 갈릴레오에게 치명적이었다. <대화>에 대한 검열을 신청할 때, 갈릴레오는 이 경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을 만났을 때는 물론이고 자신의 후원자인 메디치 대공에게도 이런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세 명의 심문관들은 만장일치로 갈릴레오가 의도적으로 경고를 무시하고 교회를 속였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1633년 6월 22일,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Santa Maria Sopra Minerva Church)의 작은 방에서 이단적 견해(지동설)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이를 저주하고 증오할 것이라는 문서에 서명한다.
이때 돌아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갈릴레오의 성격으로 봐서 충분히 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재판관들이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갈릴레오는 감옥이 아니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후에 가택연금 장소는 피렌체 인근 집으로 옮겨졌고, 갈릴레오는 여기에서 1641년 1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종교재판의 진짜 이유
많은 사람들이 갈릴레오 종교재판의 이유가 지동설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교황청의 문서 보관소에서 1982년(G3문서)과 1999년(EE291 문서)에 새로운 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에 의하면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은 진짜를 덮으려는 일종의 쇼였다.
갈릴레오는 1620년 즈음에 <시금사(Il Saggiatore)>라는 책을 썼다. 여기에서 갈릴레오는 원자론을 주장하는데, 어떤 물질의 외부 특성(맛, 냄새 등)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가톨릭 교리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지금도 미사 때마다 성찬식을 진행한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다. 그런데 이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이 가톨릭의 주요 교리이다. 이를 '실체변화'라고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특성은 그대로 빵과 포도주의 맛과 향을 띄지만, 성직자의 축복을 받으면 그 본질이 진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것이다.
실체변화는 12세기에서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를 대표로 하는 신학자들이 아르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 입각해 발명한 개념이다. 그리고 1545년에서 1563년에 걸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됐다. 당시 발표한 성명서에는 실체 변화를 부정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원자론에 입각했을 때 외부 특성이 유지되면서 본질만 바뀔 수는 없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는 축복을 받아도 그냥 빵과 포도주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실체 변화의 능력을 가진 성직자들의 권위는 실추되고 이는 가톨릭 교회 전체에 엄청난 위협이었다.
이 원자론을 정식으로 종교재판에 올릴 경우 실체 변화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 교황청은 상대적으로 작은 죄목(지동설)을 걸었고, 갈릴레오 역시 더 큰 처벌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받아들인다. 이런 정황이 새롭게 발견된 문서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교회가 원자론을 위협으로 인식했다는 것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것이 종교재판의 진짜 이유라는 주장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갈릴레오의 복권
2009년은 천체 망원경 탄생 400주년이었고 과학계에서는 갈릴레오를 기리는 여러 출판과 행사가 이어졌다. 그해 갈릴레오의 생일(2월 15일)에는 가톨릭 교회 최초로 공식 기념 미사가 열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360여 년이 걸렸다.
갈릴레오의 복권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갈릴레오의 모든 책들은 1835년까지도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올라있었다. 1979년 교황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재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켜 1992년 보고서를 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갈릴레오가 복권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조사위원회의 결과보고서를 보면 교황청은 여전히 모호한 말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고 있다. 보고서를 요약하면 아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모형이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태양 중심 세계관을 지지할 만한 증거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이 설파하던 바로 그 과학적 기법을 벗어난 셈이었다.
2. 당시의 신학자들은 성서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3.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사실로 증명되었을 때 교회는 즉시 그것을 받아들였고, 교회의 비난은 실수였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갈릴레오>,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353쪽)
물론 행성의 공전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케플러의 주장을 부정하고 조수 간만의 차가 지동설의 증거라고 보는 등 갈릴레오에게 오류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과학적 기법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보고서는 의도적으로 갈릴레오를 깎아내리고 있다. 또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 성직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나오는 데 무려 12년이나 걸린 것은 교황청의 개입(중간 검열 등)과 압력 때문이라는 내부 폭로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갈릴레오는 2003년 복권된다. 이후 베네딕토 16세 교황(재위 2005~2013)은 '과학과 신앙은 서로 모순이 없다'라고 말한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창조론과 진화론은 모순된 것이 아니며 "빅뱅과 같은 복잡한 과학이론 뒤에도 신의 뜻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시도한다. 과거 과학이 신의 섭리와 영광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갈릴레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2003년 9월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대주교는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오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말해 많은 반발을 산다. 물론 고문이나 감금은 없었지만, 물리적 고문만이 박해는 아니다. 또한 갈릴레오에게만 고문과 감금이 없었다는 건 교묘한 말장난이다. 다른 수많은 피해자가 있지 않은가.
갈릴레오가 원했던 '이성적이고 건강한 상식을 지닌 일반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가톨릭 교회 내부에는 그가 맞서 싸우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잔재와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기득권의 자존심이 남아있다. 이 때문에 여러 학자들은 갈릴레오가 아직 완전히 복권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갈릴레오의 손가락
갈릴레오 사후 피렌체 정부가 산타 크로체 성당에 갈릴레오의 무덤을 만들려고 하자 곧바로 교황청의 압력이 들어왔다. 거짓되고 가증스러운 주장으로 신을 욕보인 인물의 무덤을 성당 안에 만드는 것은 불쾌한 일이라고 했다. 결국 갈랄레오의 시신은 성당 어느 복도 어두운 구석에 묘비도 없이 묻힌다.
이후 1673년에야 묘비가 세워지고, 1737년에야 성당 본관으로 옮겨진다. 이때 누군가 시신에서 치아와 척추뼈 1개, 오른쪽 엄지를 포함한 손가락 세 개를 떼어 갔다. 오른쪽 손가락 세 개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볼 때 썼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후에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치아와 손가락이 2009년 다시 발견돼 갈릴레오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갈릴레오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으면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갈릴레오는 이 손가락을 뻗어 목성의 위성과 태양의 흑점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리고 구시대의 기득권을 공격할 때에도 이 손가락을 뻗었을 것이다. 지금도 또 다른 갈릴레오들은 손가락을 뻗어 진실을 가리키려 하고, 또 누군가는 그 손가락을 꺾으려 하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참고문헌]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 르네상스 철학강의>,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마이클 화이트, <갈릴레오>,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윌리엄 쉬어, 마리아노 아르티카스, <갈릴레오의 진실>, , 고종숙 옮김. 동아시아
고베르트 실링, 라르스 린드베르크 크리스텐센, <하늘을 보는 눈>, 2009 세계 천문의 해 한국 조직 위원회 옮김, 사이언스북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관하여>, 이무현 옮김,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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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갈릴레이 「지동설재판」 과오인정|교황청, 3백46년만에 사과|"과학·신앙조화를">, 1979년 11월 22일 기사
동아일보, <프란치스코 교황, 과학 포용 "진화론-창조론 충돌 안해">, 2014년 10월 30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