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②] 추억을 위한 서로의 배려
피렌체는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영화는 소설 원작의 <냉정과 열정 사이>가 아닐까 한다. 2003년에 첫 개봉한 이 영화는 2016년에 재개봉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이 영화 이후 일본과 한국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피렌체에서 미술품 복원을 배우는 모습이 나온다. 1966년 대홍수로 피렌체가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일본 정부가 미술품 복구 작업을 지원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 대한 피렌체 현지인들의 호감은 상당히 높았다.
어쨌든 이 영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 판타지는 처음부터 깨질 수 있다. 왜냐하면 피렌체에서 영화와 같은 여유를 즐기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하루 이틀 정도의 짧은 일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판타지와 현실의 괴리
피렌체는 걸어서 다닐 수 있을 만큼 주요 관광지가 한 곳에 모여 있다. 또한 도시 중심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좁은 지역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현대인들의 생활방식에 맞게 개보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수기 때 피렌체를 방문한다면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다.
폭이 1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인도에서 무거운 캐리어 가방의 바퀴는 뜻대로 굴러가 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앞으로 나아가기도 쉽지 않다. 한껏 차려입은 옷은 인파 틈에서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이리저리 구겨진다.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육면체 돌을 박아 넣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런 길에서 구두의 높은 굽은 자꾸 휘청거리고 급기야 발목을 다칠 수도 있다. 그리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골목들 사이에서 숙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게다가 여름휴가철 피렌체의 햇살은 상상 이상으로 뜨겁다.
이러다 보니 판타지는 둘째치고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실제로 숙소를 찾아가는 도중에 결국 다투게 되는 여행객들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나는 피렌체에 처음 갈 때는 가급적 편한 옷차림과 운동화를 착용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마음과 시간의 여유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힘겹게 온 여행을 망칠 수 있다.
나의 판타지가 타인에게는 폭력
여행에서 사진은 필수다. 요즘에는 멋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이 판타지의 완성인 듯하다. 그래서 유명 관광지는 언제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넘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양보와 배려다. 내 순서가 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거나, 혹 내가 지나가려는 길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다면 잠시 멈춰준다. 처음 보는 이들이지만 서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이드들이 사진사도 겸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두세 명 정도 소수의 손님을 받아 투어를 진행하면서 DSLR 카메라로 스냅사진도 찍어준다. 어떤 경우에는 반사판을 들고 다니는 보조 인력까지 대동하기도 한다.
보통 이런 스냅사진을 촬영하는 이들은 신혼부부나 연인인 경우가 많다. 신혼여행의 추억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기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관광지에서 사진 촬영은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멋진 사진을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어느 날 나는 안눈치아타 광장 계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곳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장소로 나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한다. 나는 그날도 스냅사진을 찍으려는 한 연인을 목격했다.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두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마주 보는 모습을 촬영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광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사는 이들이 모두 촬영 범위 밖으로 나가길 요구했다. 그들은 멋진 사진을 건졌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한참 동안 광장 가운데를 비워줘야 했다.
이런 경우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도 있었다. 이곳은 피렌체 도시 전체를 바라보기 좋은 곳으로 특히 일몰이 유명하다. 광장 한쪽 계단에는 해 질 녘이면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일몰을 감상한다. 그러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한쪽 통로를 비워두는 등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작동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반사판을 대동한 스냅사진 촬영 일행이 등장했다. 사진사와 그의 보조는 계단 오른쪽 3분의 1 정도 공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잠시만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은 약간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금방 끝날 거라는 얘기에 한쪽으로 비켜줬다.
그리고 사진사는 자신의 고객인 커플에게 계단에 앉아 도시를 바라보라고 한 다음 뒤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란히 앉아 일몰을 바라보는 연인의 뒷모습을 찍는 구도였다. 하지만 사진에는 나오지 않을 그들의 왼쪽에는 촬영이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그런데 한두 장 찍고 말 거라 생각했던 사진 촬영이 끝날 줄 몰랐다. 사람들의 항의가 시작되었고 어떤 사람은 그냥 원래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 버리기도 했다. 결국 그 사진사 일행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광장 한가운데 있는 다비드 동상에서 다시 촬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다.
물론 모든 스냅사진 촬영이 이렇지는 않다. 대부분은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게 조심한다. 그리고 차분히 기다렸다가 순간적으로 사람이 적을 때 재빠르게 찍는다. 하지만 가끔씩 위와 같은 경우가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런 식의 촬영이 고객만족을 위한 사진사의 욕심인지 아니면 고객의 무리한 요구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혹시라도 고즈넉한 배경을 사진에 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된다. 아침 7시나 8시만 되어도 사람이 많이 없다. 나도 유명 관광지 사진은 주로 이 시간에 찍었다.
판타지는 여행의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빡빡한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판타지 실현을 위해 부리는 나의 욕심이 타인에게는 불쾌감을 주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