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D 콘퍼런스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4차 산업혁명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ATD콘퍼런스라는 행사가 있다. ATD(Association for Talent Development)는 미국의 인재개발협회를 말한다. 이 행사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기업교육, 성인교육, 평생교육에 종사하는 학자와 실무자들이 모이는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 인적자원개발) 콘퍼런스다. 한국은 매년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나라이다.
마치 이슬람교도가 평생에 한 번은 메카를 가야 하듯이 HRD업계 종사자라면 한 번쯤 참여해보고 싶은 행사다. 물론 매년 참석하는 교수나 업계 인플루언서들도 있지만 먼 타국에서 열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보상 차원에서 매년 소수의 직원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콘퍼런스가 끝나면 한국에서는 그 해의 ATD를 디브리핑하는 행사가 많이 열린다. 주로 기업교육 업체에서 ATD에 다녀온 교수나 전문가 등을 섭외해서 그 해 ATD의 주요 내용과 HRD 트렌드에 대해 알려주는 형태이다.
ATD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 '4차 산업혁명'
나는 회사의 배려로 2017년 ATD 콘퍼런스에 참가할 수 있었다. 모 교육업체에서 모집한 단체 참가단으로 다녀왔는데 그 비용만 거의 천만 원에 달했다. 그전까지 나는 전공자로서 십여 년 이상을 HRD 바닥에 있으면서 나름 전문성을 키워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틀랜타에서 열린 콘퍼런스는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콘퍼런스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메일함에는 ATD디브리핑 행사 광고 메일이 가득 찼다. 그런데 여러 디브리핑 행사의 제목과 내용에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HRD',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HRD의 역할' 같은 문구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콘퍼런스에서 단 한 번도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을 그 어느 세션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콘퍼런스에서 반가운 후배를 만났다. 지금은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때는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후배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그 누구한테서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교수나 동료뿐 아니라 TV나 잡지, 책 등 그 어디에서도 말이다. 나 역시 2017년 ATD에서 성실하게 각 세션에 참석했지만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실제로도 외국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ATD 콘퍼런스 디브리핑 행사에서만 유독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붙어있는 것이다.
'네 번째' 산업혁명인가... 4차 산업의 '혁명'인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처음 제시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때도 'Industry 4.0', 즉 '4차 산업'이었다. 1차 산업인 농업, 2차 산업인 제조업,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을 지나 새로운 형태의 산업을 4차 산업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예를 들면 제조업에 IT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 같은 것이다. 독일 자동차 공장에는 수많은 장인들이 있다. 하지만 풍부한 경험과 기술력을 가진 이들은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근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이들에게 근력 강화 보조장치를 지급한다거나 재고 관리 등에 IT 등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기존의 산업 분류로는 규정할 수 없기에 '4차 산업(Industry 4.0)'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4차 산업 '혁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차치하고 진짜 문제는 누구나 말하지만 누구도 정확하게 그 정의를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내 교육을 위해 부르는 강사나 HRD 컨설턴트들에게서 이 문제는 심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내는 제안서의 첫머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키우기 위해 자신들이 솔루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사들도 강의 첫머리에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한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을 강조하는 강사들에게 그 정확한 정의를 물어본다. 그러면 대부분 'IT기술, 초연결, 인공지능' 등의 단어를 주섬주섬 내뱉는다. 하지만 이건 특징이나 구성요소는 될지 몰라도 정의(definition)는 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으로 HRD콘텐츠를 팔려면 우선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4차 산업 혁명이 '네 번째' 산업혁명인가, '4차 산업'의 혁명인가?
네 번째 산업혁명이라면 애초에 처음 다보스 포럼에서 제시한 Industry 4.0과는 상관없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역사에서 산업혁명은 증기기관 발명에서 촉발된 한 번 뿐이다. 그리고 4차 산업의 혁명이라면 애초에 없었던 혁명이라는 단어를 왜 한국에서만 붙이는지 설명해야 한다. 아직까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한 강사나 컨설턴트를 만나본 적이 없다. 적어도 HRD 업계에서는 말이다.
명확하지 않은 조어의 남발, 그 폐해
매시대 트렌드를 주도하려는 이들은 그 시대를 표현하는 새로운 조어를 선점하거나 편승하려 한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시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쉽고 직관적으로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조어의 남발과 수용은 여러 폐해를 남긴다.
첫 째는 소위 '사짜'들의 범람이다. HRD 전문가랍시고 제출한 제안서와 교육 내용을 자신들의 교육이 '4차 산업혁명'에 기반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실체를 뜯어보면 기존 교육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팀장 대상 코칭 리더십 교육을 봐도 내용은 유사하다. 하지만 고작 핸드폰으로 QR코드를 찍어서 실시간 퀴즈를 푼다거나, 슬라이도(Slido) 등의 도구를 좀 쓰는 게 무슨 거창한 4차 산업혁명인가. 그저 얼마 전까지 파워포인트로 퀴즈를 띄우고, 교육생들이 전지에 의견을 작성하던 것을 좀 더 디지털화했을 뿐이다. 그리고 줌(Zoom)으로 하는 비대면 실시간 교육을 4차 산업혁명의 총아처럼 내세우는 걸 보면 헛웃음이 난다. 화상회의와 화상통화는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교육내용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니..... 볼 때마다 황당하다.(물론 코칭 리더십 그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아주 중요한 리더십 중 하나이다.)
두 번째는 교육 담당자의 안이함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가끔씩 기업교육 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외부 강의를 나갈 때가 있다. 연말 연초에 나가는 강의에서는 항상 '올해 혹은 내년 HRD 트렌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물론 이해는 한다. 매년 교육계획을 수립할 때마다 보고서의 앞부분에는 올해 HRD 트렌드가 들어가야 하는 그 고충을. 하지만 솔직히 교육계획이 작년과 완전히 다른 경우가 얼마나 되던가? 비슷비슷한 계획에 트렌드만 바꿔서 올린다. 트렌드 분석이라는 건 매우 어렵고 깊게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해봤자 임원들은 별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른다. 그러니 전국에 휘날리는, 누구나 들어봤을 만한 '특정 단어'를 트렌드라고 보고서에 쓴다. 그럼 임원들도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임원 체면에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요새 유행하고 들어 본 단어니까 대충 승인한다. 이렇게 악순환은 반복된다. 그리고 솔직히 무슨 트렌드가 매년 바뀌나. 나는 현대 HRD 트렌드를 묻는 질문에 '구성주의'라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폐해는 여러 건강한 논의의 장을 함몰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비판의 여지가 없어져 버린다. 예를 들어 기업교육 장면에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검토할 때, 그 교육 프로그램의 도입 이유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로 퉁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왜 문제냐 하면 그 교육이 우리 회사사의 인재 육성 전략에 적합한지, 또 기존 교육과 어떻게 다른지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따져봐야 하는데 그 논의 자체를 희석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돈은 돈대로 나가면서 우리 회사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는 꼴이 된다. 그리고 교육이 끝나면 담당자는 다시 새로운 게 없는지 찾아다닌다.
벌써 저무는 4차 산업혁명, 그리고 새롭게 뜨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2017년 ATD를 다녀온 후 나도 우리 회사 내부에서 자체 디브리핑을 했다. 그때 한 참석자가 4차 산업혁명과 교육의 관계를 물었다. 이때 나는 4차 산업혁명이란 실체가 불분명하고 한국에서만 쓰이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소위 업자들의 이익에 기반한 열풍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단어는 몇 년 안에 사라질 거라고 감히 '예언'했다. 실제로 벌써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지나가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외국에서는 예전부터 현시대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실체도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너머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시대로 진입하는 코미디를 펼치고 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4차 산업혁명 그 차제보다는 '트렌드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교육 담당자 대상 강의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연구자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육 담당자나 강사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트렌드에 기반하여 만든 교육의 피해는 결국 임직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ATD콘퍼런스를 다녀온 이후, 나는 사내 교육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금지시켰다. 적어도 내가 속한 인재개발팀이 주관하는 교육에서는 그렇게 했다. 사외 강사들도 우리 회사에서 강의할 때는 이 단어를 못 쓴다. 자신도 잘 모르는 단어로 똑같은 걸 다른 것처럼 꾸미는 것보다는 진짜 우리 임직원들에게 필요하고 우리 회사의 육성 철학과 방향을 구현할 방법을 고민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