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7대리석 위의 시간, 스플리트 구시가지를 걷다

빛과 돌, 그리고 살아 있는 시간

by 로코라헬


향기가 머무른 자리에서, 이제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향기가 머무른 오미스의 여운을 뒤로하고,
스플리트의 심장, 시간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친 바람은 아드리아해를 건너와
이곳, 스플리트의 단단한 돌에 부딪혀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공기속에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돌가루의 텁텁함과 바다의 짠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손때가 뒤섞인 미묘한 체취였다.


발밑의 돌들은 단순히 밟고 지나가는 표면이 아니었다.
수백 년, 수천 년의 발자국을 품은 채
조용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병사부터 중세의 상인,
그리고 오늘의 여행자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이 돌들 위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좁고 미로 같은 골목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바람은 한때 권력의 중심이었던 로마 황제의 궁전을 통과하여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낡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저 멀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과거의 침묵을 깨고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그리고 끈질기게 살아 있었다.
시간은 박물관처럼 멈춘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부지런히 걷고,
가게 문을 열고, 아침의 커피를 내리고,
서로에게 다정한 말을 건넸다.


역사는 과거의 화려한 기록이나 웅장한 폐허가 아니라,
오늘을 통과해 끊임없이 흐르는 살아 있는 호흡이었다.


나는 그 느린 호흡 속에서 조용히 걷고 있었다.


발끝으로 닿는 돌의 미지근한 온도,
햇살에 반사되어 벽에 스친 황금빛 흔적,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덮는 나지막한 웅성거림.


그건 과거의 유령 같은 소리가 아니라,
지금 이곳을 굳건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숨결이었다.


20250524_162451.jpg
20250524_162407.jpg
KakaoTalk_20250630_112912566_06.jpg
KakaoTalk_20250630_112912566_05.jpg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시간의 중심으로



미로 같은 골목이 끝나는 지점,
눈앞이 갑자기 환하게 넓어졌다.


좁은 통로에서 해방된 시야는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기둥과 아치를 담아냈다.
고요함 속에 빛이 머물다 사라지는 높은 천정.


KakaoTalk_20250630_112805207_08.jpg
KakaoTalk_20250630_112805207_13.jpg



그곳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 후 노년을 보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었다.


한때는 엄격한 통치와 권력의 무게가 가득했던 자리였지만,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여행자의 발걸음이 스스럼없이 스며드는 장소가 되었다.


장엄한 기둥 사이로는
갓 내린 커피의 고소한 향이 흘렀고,
고대 로마의 아치 밑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념품 가게가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따뜻한 돌담 위에는
한가로운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린 채
햇살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무게를 잊은 듯 잠들어 있었다.


황제의 엄숙한 흔적과 생활의 포근한 온도가
이질감 없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겹쳐 있었다.


역사는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신성한 유물이 아니라,
삶이 끈질기게 계속되는 방식 그 자체였다.


이 도시는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과거를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안아
현재의 일부로 만들었다.


세월은 이 고대의 건축물을 닳게 했지만,
그 닳음 속에 비로소 시간의 깊은 결이 새겨져 있었다.


벽의 그림자가 미동하며 천천히 옮겨가고,
그 변화하는 빛 속에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이곳의 시간은 오래되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모든 과거의 순간들이
현재의 순간과 겹쳐지며
끊임없이 새로운 ‘지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KakaoTalk_20250630_113013897_10.jpg
20250524_183803.jpg



페리스틸 광장의 사람들 — 시간의 체온


궁전의 심장부, 페리스틸 광장에 들어서자
시간의 결이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가시처럼 느껴졌다.


웅장한 대리석 기둥이 사방을 둘러싼 원형의 공간,
그 한가운데로 햇살이 마치 무대 조명처럼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빛의 중심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커피잔을 들고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이들,
바이올린을 켜는 거리의 음악가,
돌계단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


그 풍경은 마치 수백 년 전 멈춰버린 듯한 오래된 조각화 같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둥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공간의 웅장한 무게를 역설적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역사는 사람의 체온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서사가 된다고.


계단 가장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그 생동감 넘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으니,
이 도시의 오래된 시간과
나의 느린 호흡이 서서히 맞아들었다.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가 몇 번 요란하게 눌리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커피 향이 은은하게 지나가고,

누군가는 수백 년 전 이 거대한 돌 위를 지나며
자신의 그림자를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그 과거의 그림자 위에서
다시 한 번 오늘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사람의 수많은 발자국이 닳으며 만든 매끄러운 길 위에서
오늘의 삶이 숭고하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대리석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매끄러웠지만, 그 속엔
셀 수 없는 세월의 흔적과 작은 균열들이 숨어 있었다.


그건 마치 삶의 역경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의 피부 같았다 —
견디며 얻어낸, 그 결의 온도.


광장을 감싸는 바람은 차분했고,
그 바람 속에는 돌의 냄새와 사람의 체온이 섞여 있었다.
그 둘은 이 도시, 스플리트의 두 개의 영원한 심장이었다.



20250524_160932.jpg
20250524_161045.jpg


돌의 시간, 빛의 결


광장을 벗어나며 뒤돌아보았을 때,
햇살이 이미 낮게 기울어 있었다.


대리석 벽에 닿은 빛은 부드럽게 번지며 금빛을 뿌렸고,
그 그림자는 돌 위에 길게, 얇게 눌려 있었다.


낮 동안 수많은 발걸음과 목소리가 오갔던 골목은
조용히 저녁의 짙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낮아지고,
카페의 커피잔 소리마저 한 톤 낮아진 듯 차분했다.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기울어가는 햇살은 내 옆에서 함께 움직였고,
시간은 돌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돌은 시간을 기억하고,
빛은 그 기억을 비춘다.


궁전의 마지막 기둥 사이로 남은 햇살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오랜 이야기를 다 들려준 현자처럼,
조용히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사람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의 하루가 고요히 스러지는 그 자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가 힘차게 시작된다.


그 사라짐과 시작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한 도시의 시간이 된다.


돌 위를 걸으며 남긴 오늘의 발자국,
그 위로 내일 아침의 햇살이 어김없이 다시 비출 것이다.


20250524_184403.jpg
20250524_162457.jpg



시간은 그렇게,
언제나 사람이라는 매개를 통해 흘러간다.


우리가 남기는 건 결국 ‘시간의 결’이다.
살아 있는 흔적, 사라지지 않는 빛.


광장을 벗어나 마지막 골목을 지날 때,
하늘 위로 저녁 종소리가 묵직하게 퍼져나갔다.


그 울림이 돌벽을 타고 오래도록 퍼져나가며,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숨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들었다.
그건 과거를 알리는 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만들어내는 시간이었다.


그 웅장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나의 하루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름다운 도시의 조건


아름다운 도시의 조건이 무엇일까.
나는 이곳에서 그 답을 찾았다.


도시는 단순히 화려한 볼거리가 많다고 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스플리트처럼, 고대의 웅장했던 흔적 위에
누군가의 평범한 ‘지금’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곳.


관광객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그저 그대로 살아가는 풍경이 놓여 있는 도시.


그 안에서 우리는, 조용히 함께 걷고,
돌 위에 앉고, 웃고, 잠시 머물렀다.


빨래가 너풀대는 안마당,
느리게 걷는 골목 끝의 재래시장 상인,
햇살 받은 흰 돌바닥 위의 한가로운 고양이 한 마리.


무언가를 열심히 찾거나 보려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따뜻했던 시간이었다.


스플리트가 내게 남긴 건,
‘아름다운 도시’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시간 속에 스며 있는 곳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처럼 고대의 아름다웠던 흔적 위에
오늘의 일상이 힘차게 이어지는 모습은
가장 특별하고도 위대한 유산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왜 하필 이곳을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 택했을까.


그에게 스플리트는 단순한 궁전 이상의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그가 이곳의 평온함을 진정으로 사랑했을 것이라 믿는다.
바다와 맞닿은 햇살 가득한 해안,
달큰한 무화과 냄새가 풍기던 정원,
그리고 로마의 번잡함과는 완전히 다른, 느긋한 공기.


권력과 무게를 내려놓고,
그저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인간적인 욕망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나 역시 여행자에서 잠시 이곳의 일상인으로 스며들 듯
스플리트에 천천히 젖어들었고,
그 감정 속에서 그 고독한 황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250524_185556.jpg
20250524_184851.jpg


여행 노트


이곳에서 나는 배웠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새로움 속이 아니라,
오래도록 겹쳐진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걷고, 머물고, 바라보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도
삶의 온도는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도시는 그렇게, 사람을 천천히 물들였다.


여행이란 결국,
머무는 동안 조금씩 그곳의 삶을 살아보는 연습이었고,
나는 지금 스플리트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 연습을 하고 있었다.



기록


여행지: 스플리트(Split), 크로아티아
장소: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 페리스틸 광장 / 스플리트 구시가지
날씨: 맑음, 햇살과 바람이 교차한 하루
기억: 향기에서 시간으로,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 #페리스틸광장

#크로아티아여행







다음 이야기


EP.08 해안선을 따라 걷는 시간, 마카르스카로


바다의 리듬이 하루의 속도를 바꾼다.

잔잔한 물결과 시장의 소리,

그리고 여행의 중간쯤에서 마주한 또 다른 결의 바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