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리트의 아침은 유난히 맑았다.
밤새 묵직했던 공기가 걷히자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흰 벽을 따라 투명하게 번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도시의 아침을 깨웠고,
그 소리마저 어제의 고요함이 남긴 잔향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유난히 긴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렐라, 마카르스카, 플로체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기나긴 해안 도로.
지도 위에서는 단순한 파란 선 같지만, 실제로는
절벽과 바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따라 달리는
험하고도 아름다운 도로, 달마티아의 척추였다.
스플리트의 여운은 남겨둔 채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천천히 출발했다.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에 앞서, 길가에 나타난 작은 주유소에 잠시 들렀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유 펌프가 연료를 뿜어내는 동안,
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노란색 조명 아래 진열된 형형색색의 과자와 음료수들이
낯선 동시에 익숙한 풍경을 만들었다.
나는 커피를 주문하고 딸아이는 에너지에 필요한 몇가지를 주워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산맥과 주유소 풍경은 곧 마주할 웅장한 자연의 스케일과,
그 안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일상적인 안정감을 동시에 일깨워주는 듯했다.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아드리아해는 시야를 압도했고,
햇살은 수면 위에서 수천 개의 은빛 조각으로 부서졌다.
공기는 갓 씻은 듯 투명했고, 바람은 가벼웠다.
그 강렬한 풍경 속에서 나는 몇 번이고 숨을 멎었다.
세상의 모든 푸른색과 반짝임이 이곳으로 몰려든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두려웠다.
도로는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S자 커브의 연속이었다.
안쪽으로는 석회암 산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고,
바깥으로는 방호벽도 없이
수십 미터 아래의 낭떠러지와 바다가 맞닿아 있었다.
도로 폭은 좁았고,
다음 커브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끝없이 이어졌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량들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스쳐갔다.
그때마다 차체가 흔들릴 듯 위태로웠다.
손에 땀이 배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딸의 어깨가 단단히 굳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기도했다.
"제발, 이번 커브만, 다음 커브만 잘 돌아가자.”
무사히 이 길을 통과하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여행자라기보다 생존에 집중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창밖의 아름다움은 사치였고,
오직 다음 커브에 대한 집중만이 전부였다.
우리는 결국 잠시 멈춰서야 했다.
바다와 절벽이 가장 극적으로 맞닿는 언덕 위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세상은 갑자기 거대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람은 거칠었지만,
그 바람 덕분에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이 세상에 연결되어 있음을 강렬하게 느꼈다.
손끝이 여전히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눈앞의 풍경은 그 어떤 두려움보다도 거대하고 강렬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바다는
마치 수정처럼 유리처럼 맑게 빛났고,
햇살은 그 위에서 끝없이 부서지며 황홀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무서움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상반된 힘으로 밀려오던 순간,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묘한 울림을 느꼈다.
삶도 어쩌면 이런 해안 도로 위를 달리는 일 아닐까.
때로는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커브와 낭떠러지가 벅차게 다가오고,
그 모든 순간의 긴장과 안도가 이어져
비로소 하나의 ‘흐름’이 완성되는.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무렵, 브렐라에 도착했다.
브렐라의 해변은 기적처럼 잔잔했다.
방금까지 달려온 험준한 해안도로의 격렬함이
이곳에서는 완전히 증발한 듯했다.
햇살은 키 큰 소나무 숲 사이로 부드럽게 부서지고,
바람은 천천히 그늘을 흔들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잠시 차를 세우고,
그 고요한 해변에 발을 담그기 위해 내려섰다.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해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움직임마저 슬로우 모션처럼 느렸다.
누군가는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누군가는 돗자리 위 그늘 아래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 브렐라에서는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밀려오는 파도도,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주변을 감싸는 공기도 모두 같은 느린 박자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고요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조수석에서 느꼈던 조금 전의 아찔한 두려움이 멀리 밀려나갔다.
몸의 긴장도, 마음의 굳은 결도,
따뜻한 햇살과 차가운 바닷물 앞에서 조용히 풀려나며 사라졌다.
잠깐쉬어감은 멈춤이 아니라
이 격렬한 여정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회복이었다.
이 평화로운 도시는 나에게 ‘쉬어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가르쳐 주었다.
마카르스카의 거리는 압도적인 활기로 가득했다.
브렐라의 정적이 시간을 멈춘 듯했다면,
이곳은 다시 시간을 가속시키는 엔진과 같았다.
바다를 따라 길게 늘어선 카페와 시장, 노점상,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겹겹이 쌓여
낮은 진동처럼 도시 전체에 번져나갔다.
나는 그 진동 속에서 삶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꼈다.
항구 근처의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소란스러운 평화를 바라보았다.
땀을 식혀 주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잔잔한 파도 위로 노을이 천천히 붉은 물감을 풀어놓고 있었다.
눈앞에는 활기찬 항구의 모습이 펼쳐졌다.
어부들이 갓 잡아온 해산물을 경쾌하게 정리하는 소리,
옆 테이블에서 와인잔을 부딪히며 터져 나오는 웃음,
멀리서 울리는 관광 유람선의 뱃고동 소리까지.
브렐라에서는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해서
내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마카르스카의 시끄럽고 활기찬 분위기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깨웠다.
이상하게도 주변이 더 소란스러울수록
내 마음은 그 소란에 흔들리기보다
오히려 더 집중되고 안정되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항구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발걸음들까지—
그 모든 활기가 마치 배경음처럼 잔잔하게 깔렸고,
그 속에서 나는 문득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구나’ 하는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마카르스카 사람들의 생동감은
무언가를 이루려는 욕심보다
그 순간의 즐거움,
지금의 삶을 그대로 살아내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에 가까웠다.
그들의 리듬은 나에게 요구하지 않았고,
나를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며
조용히 나를 감싸 안아주는 듯했다.
여행은 어쩌면 이런 반복일지도 모른다.
고요와 소란, 멈춤과 움직임이
서로를 교차하며 하나의 거대한 리듬을 만들어 가는 일.
브렐라에서 나는 모든 것을 비우고 숨을 고르고,
마카르스카에서 다시 세상의 에너지로 호흡을 넓혔다.
하루의 속도는 그렇게,
쉼과 움직임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며 완성되어 갔다.
도시의 심장이 빠르게 뛸 때,
나의 마음은 오히려 가장 차분한 박자를 찾아냈다.
마지막 경유지, 플로체가 가까워졌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도로 위에 있었다.
산과 바다, 속도와 사색이 번갈아 이어지며
도시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스플리트의 고요, 브렐라의 쉼, 마카르스카의 활기 —
그 모든 흐름이 한 줄기 강물처럼 마음속에서 합쳐졌다.
우리는 두브로브니크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 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길 위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플로체의 강물처럼,
우리의 여정도 서로 다른 감정과 방향으로 흘러가다
결국 한 바다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 끝에는 스톤의 성벽과
두브로브니크의 붉은 지붕이 희미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모든 흐름이 한 문장으로 완성되는 자리일 것이다.
바다는 쉴 새 없이 반짝였고,
도로는 매 순간 두려움을 주었다.
그 두 상반된 감정이 나란히 달리던 하루였다.
스플리트의 아침은 고요했지만,
도로 위에서는 긴장이 이어졌고,
그 두려움 속에서도
브렐라의 고요, 마카르스카의 활기,
플로체의 강물이 차례로 마음을 채웠다.
여행은 결국,
두려움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진짜 아름다움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하루의 결이
바람처럼 부드럽고, 파도처럼 강하게,
나의 기억 속에 길고 선명한 흔적으로 남았다.
스플리트 → 브렐라 → 마카르스카 → 플로체
스플리트 → 브렐라 (Brela)
거리: 약 50 km
소요: 약 1시간 10분
도로: 해안도로 D8 (달마티아 해안 루트)
Tip
초반 구간은 절벽과 바다가 나란히 이어지며, 커브 구간이 잦음.
속도보다 시야 확보가 중요. 중간중간 ‘View Point’ 표지판이 있는 지점은 잠시 멈춰 숨을 고르기 좋다.
브렐라 푼타 라타(Punta Rata) 해변 인근에는 짧은 주차 공간이 있으므로 오전 시간대 방문이 유리하다.
브렐라 → 마카르스카 (Makarska)
거리: 약 20 km
소요: 약 25분
도로: 해안도로 D8
Tip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가장 아름다운 구간.
오른편으로는 푸른 아드리아해, 왼편으로는 비오코보 산맥이 이어진다.
마카르스카 진입 전, 작은 휴게 공간에서 바다와 산맥을 함께 조망할 수 있다.
거리: 약 60 km
소요: 약 1시간 10분
도로: D8 해안도로 + D513 분기점
Tip
구간 중 가장 곡선이 많은 절벽 도로.
야간 주행은 피하는 것이 좋으며, 낮 시간대라도 커브 구간에서는 감속 필수.
플로체 진입 전, 네레트바 강을 따라 펼쳐지는 수로 풍경이 인상적이므로 잠시 정차해 볼 만하다.
여행 시기: 2025년 5월
기록: 여행하는 로코라헬
성벽이 지킨 ‘하얀 금’과 여행의 클라이맥스
플로체의 물결이 잦아든 뒤,
길은 다시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 끝엔 오래된 성벽의 도시, 스톤이 있다.
돌로 쌓은 그 긴 성벽은
전쟁의 흔적과 평화의 시간을 함께 품고 있었다.
우리는 그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이 여정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지붕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도시—
두브로브니크에 닿는다.
그곳은 단순한 ‘도착지’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길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곳이었다.
돌의 도시 위에서,
우리는 여행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