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떠난 14박 17일 동유럽여행 중 (크로아티아)
“자유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도로 위에서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자그레브의 아침은 맑고 조용했다.
창문을 열자, 낯선 도시의 공기가 천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빛이 테이블 위를 비췄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플리트비체.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렌터카를 인수하고,
이 새로운 자유와 마주하는 일이 남아있다.
어떤 차를 고를까.
어떤 업체가 좋을까.
처음에는 유니 렌트(UNI Rent)와 SIXT 중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유니 렌트는 현지 업체라 가격이 조금 더 저렴했고, 후기들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리뷰를 보다 보니 보험 조건이 복잡하고,
차량 상태나 대응 속도 면에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반면 SIXT는 글로벌 브랜드라
보험 조건이 깔끔했고,
무엇보다 면책금 0유로(Full Protection) 옵션이 확실하게 적용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낯선 나라에서 우리 모녀의 심신을 지켜줄
풀 커버는 필수였다.
가격은 유니 렌트보다 조금 더 높았지만,
긴 여정을 안전하게 다니려면
안정성과 서비스 품질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SIXT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너무 소형차는 피하기로 했다.
딸아이와 나, 둘 다 운전할 예정이었고
큰 캐리어 1개와 작은 캐리어 1개를 싣고 이동해야 했다.
중간중간 소도시의 좁은 골목길 주차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조건은 단순했다.
4 도어 차량, 캐리어 2개 적재 가능,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차.
결국 소형~준중형급 중 안정적인 모델,
VW Golf로 예약을 완료했다.
자그레브 메인버스터미널의 SIXT 지점에서
차량을 인수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서류를 확인하고, 설명을 듣고, 서명을 했다.
누가 봐도, 설렘 반 긴장 반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제 정말,
우리는 ‘이동’이 아닌 ‘운전’으로 이 여행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추가 운전자 등록(Additional Driver)도 현장에서 함께 진행했다.
추가 요금은 하루당 약 7유로/일(총 42유로 + 세금).
딸아이와 번갈아 운전하기엔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모든 서류가 정리되고 나서,
직원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추가 비용을 내면 업그레이드 가능한데.”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No, thank you.”
이미 풀 커버 보험과 추가 운전자 등록으로
예산은 생각보다 꽤 넘어 있었다.
여행 첫날부터 ‘업그레이드’라는 사치는 미루기로 했다.
그랬더니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Well... okay, you will get it for free.”
무료 업그레이드라니.
순간 서로를 바라보며
경계심을 풀지 않고 웃음을 참아보았다.
혹시라도 동양에서 온 우리 모녀에게
호구 테스트라도 하려 든다면,
단단히 방어하리라는 결기로 차오르던 웃음을
그저 미소로 눌러 담았다.
그리고 차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숨을 삼켰다.
한국에서도 아직 출시 전이던 신형 BMW.
주행 거리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비닐만 벗겨진 듯 반짝이는 외관은 믿기 어려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새 차의 향기.
그 공기만으로도 설렘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완벽한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거의 환호에 가까웠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세상에 막 태어난 듯한,
이 사랑스러운 녀석 BMW 1시리즈 120i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예상치 못한 행운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내비게이션을 입력하고
등록 앱들을 하나씩 설정했다.
이 녀석은 세상의 신문물을 모두 품은 듯,
영리했고 똑똑했다.
하지만 사랑스럽지만 낯선 녀석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서툴렀다.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몇 바퀴를 돌며 액셀을 밟았다가,
다시 브레이크를 밟기를 반복했다.
우리를 안내했던 직원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질 즈음,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조금 더 단단히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주차장의 바리케이드를 열어젖히고
자그레브 도로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자유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도로 위에서,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도심의 신호등이 하나둘 뒤로 물러나고,
차창 밖의 바람이 우리를 감쌌다.
그제야 손끝의 긴장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자그레브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평이했다.
하지만 여행이 시작된 이후,
늘 흐리기만 했던 하늘이 처음으로 눈부시게 맑았다.
마음이 한없이 가볍워졌다.
공기는 따뜻했고,
하늘은 높고 넓었으며,
빛은 우리를 공중에 흩뿌릴 듯 부드럽게 감쌌다.
그때,
길 위에 맥도날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구글맵의 평점도, 후기 검색도 필요 없었다.
그저 달리던 고속도로 위에서,
표지판 하나에 몸을 맡긴 채
순간의 끌림처럼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그 단순한 동작이
대중교통만 이용하던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해방처럼 다가왔다.
엑셀에서 발을 떼는 그 찰나,
이 녀석의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밟아
주차장 한켠으로 데려갔다.
정말, 운전 경력 30년이 다 되어가는 내가
이만한 일에 이렇게 흥분해야 할 일인지—
이게 뭐라고.
‘델마와 루이스’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 가속을 밟던 그 장면처럼,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다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자유가 주는 해방감이 식욕도 자극하나?
아니면 긴장감이 빠져나간 자리에
허기가 밀려든 걸까.
이상하리만큼 배가 고팠고,
그 햄버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휴게소 야외 벤치에 몸을 기댄 채
따뜻한 햇살을 천천히 즐겼다.
며칠의 피로가
햇빛 속에서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느긋하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만끽했다.
자그레브에서 시동을 걸고,
우리의 첫 도로 위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제 차창 밖 풍경은
도시의 빛을 벗어나 초록의 결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작은 폭포와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 라스토케.
그리고 그 너머, 숲과 호수가 맞닿은 거대한 자연, 플리트비체
다음 이야기 —
〈라스토케에서 플리트비체까지, 발로 새긴 숲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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