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 칼던의 숨결
칼던의 하늘은 희미한 회색빛이었다.언덕을 따라 퍼진 낮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리온 하르메드는 벽난로 앞에 선 채, 손에 쥔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 지원 명단. 차가운 종이지만, 적힌 이름 하나하나가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문이 두드려졌다.
"들어오게."
케일란 바레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군복의 단추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보고 드립니다, 백부장."
"들어보지."
리온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왕실에서 추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용사의 재림이 전선을 흔들고 있습니다. 신속히 지원병을 선발하고, 부대 편제를 조정하라는 명령입니다. 내각과 군부 수뇌부 역시 움직이는 조짐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리온은 손에 쥔 서류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결국, 용사 때문이군."
케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식 경로로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공식 발표는 아직 없습니다."
리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마왕군은 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용사가 없는 인간 세상에 관심을 끊은 듯했지."
"예, 백부장.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동향이 없었습니다."
"이제 달라질 거다."
리온은 짧게 말을 맺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차가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도시, 칼던이 보였다.
"칼던이 흔들리면, 대륙 전체가 흔들린다."
케일란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왕실 특사로부터 통보가 있었습니다. 용사 일행이 칼던으로 이동 중입니다."
리온은 한동안 침묵했다.
"……도시가 술렁이겠군."
"이미 상인들은 물자를 모으고 있습니다."
"군부대 안은."
"공식 지시는 없었지만, 불안은 퍼지고 있습니다."
리온은 다시 지원병 명단을 펼쳤다. 한 이름, 한 이름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서류를 덮었다.
"훈련장을 재정비해라. 선발은 신중히 한다. 숫자에 휘둘리지 말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를 골라라."
"명령 받들겠습니다."
리온은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 명이라도 더 돌려보내야 한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만이 도시를 스치고 있었다. 멀리, 들리지 않는 북소리가 서서히 땅을 울리고 있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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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던의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군부대 훈련장에는 희미한 성에 덮인 바닥이, 새로 집결한 지원병들의 발걸음으로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리온은 검은 망토를 걸친 채, 훈련장 가장자리에서 지원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는 케일란 바레스가 서류철을 들고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모인 건가."
"현재까지 도착한 인원은 128명입니다. 나머지 20명은 늦거나,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칼던이 변경의 소도시인 탓에 이 정도 규모가 전부였습니다."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훈련장을 가로질렀다. 지원병들은 정렬했지만, 행색은 제각각이었다. 그 속에, 한 소년이 보였다. 갈색 머리에 아직 어린 듯한 얼굴. 검은 옷 위로, 해어진 가죽 조끼를 걸친 평범한 차림. 에일런 브레이트.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케일란이 조용히 물었다.
"눈에 띄는 인물이 있습니까, 백부장."
"……몇 있다."
리온은 짧게 답했다. 호루라기가 울렸다. 지원병들은 조별로 나뉘어 간단한 무기 조작과 기초 체력 평가를 시작했다. 리온은 팔짱을 낀 채, 훈련장을 바라보았다. 에일런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령을 받는 태도, 실패해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 끝까지 시선을 흐트리지 않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케일란이 말했다.
"기록 상위권과 하위권이 명확히 나뉘었습니다. 선발 기준을 1차적으로 적용하겠습니다."
"기록으로만 보지 마라. 살아남을 의지가 있는 자를 골라야 한다. 숫자는 의미 없다."
리온은 조용히 대답했다. 곧 에일런이 리온 앞에 불려나왔다.
"이름."
"에일런 브레이트입니다."
"왜 지원했지."
"살고 싶어서입니다."
리온은 그 말을 곱씹었다.
"살기 위해 싸우는 놈이 제일 오래 버틴다."
"줄로 돌아가라."
"예, 백부장."
리온은 다시 훈련장 전체를 둘러보며 다짐했다. 한 명이라도 더.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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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은 어스름이 내릴 무렵까지 분주했다. 잠시 뒤, 리온의 부관 케일란이 큼지막한 양피지 두 장을 훈련장 중앙 게시판에 내걸었다.
“지원병 1차 선발 결과다. 이름이 적힌 자는 앞으로 규정 장비를 수령하고, 내일부터 정식 훈련에 돌입한다!”
휘파람과 한숨, 그리고 작게 터지는 환호가 뒤섞였다. 양피지 맨 윗줄에 ‘에일런 브레이트’라는 이름이 보였다. 에일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옆에서 에릭이 그의 등을 툭 치며 웃었다.
“봤지? 네 이름이 제일 맨 위에 있더라니까!”
가빈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 싶어 싸우는 놈이 오래 버틴다더니, 백부장이 그 말 그대로 뽑았군.”
선발된 100여 명은 해가 지기 전에 간이 연병장으로 집결했다. 지평선 위로 석양이 붉게 번질 때, 리온이 짧은 연설을 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 전쟁은 결코 쉽지 않다. 둘째, 나는 한 명이라도 더 돌려보내려 마지막까지 애쓸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끝까지 버텨라.”
곧바로 군용 텐트가 배정되고, 각자에게 천막 번호와 기본 보급품이 지급됐다. 에일런은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손에 쥔 작은 쇠숟가락의 차가움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살기 위해 싸우는 거다. 그리고, 멈춰 있지 않기 위해.”
그날 밤, 칼던의 하늘엔 별이 드문드문 떠 있었고, 먼 언덕 넘어 병영의 횃불이 줄지어 깜빡였다. 잠자리에 든 지원병들은 긴장과 피로가 뒤섞인 채 뒤척였다. 에일런도 쉽게 잠들지 못했지만,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새벽—여명이 채 밝기도 전에 기상 나팔이 울렸다. 긴 밤이 무색하게 서늘한 공기가 텐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원병들은 준비된 군복 위에 망토를 걸치고 다시 훈련장으로 모였다. 그때부터였다. 첫 번째 훈련은 지구력 훈련이었다. 에일런은 무겁고 숨이 가빠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속도로 계속 걸었다. 리온은 훈련장 가장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버티는 놈이 산다."
그는 다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훈련이 끝났을 때, 에일런은 지쳐 무릎을 꿇었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리온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것. 그러나 꺾이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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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 끝난 후, 지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얼었던 공기에는 서늘한 어둠의 기운이 퍼졌다. 병사들의 거친 숨결 사이로 어스름이 퍼지며, 부대는 조용히 저녁빛에 잠겼다. 곳곳에 간이 모닥불이 피워지고, 지원병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몸을 녹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닥불 주위, 지친 지원병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젠장, 이게 훈련이야? 사형선고지."
키가 크고 마른 체구의 청년이 숨을 몰아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늘 입가에 장난기가 가득한 그는 에일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에릭. 로든 쪽 출신이야."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에일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악수를 받았다.
"에일런. 로스벤 마을 출신이야."
"로스벤?" 에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구불구불한 산골짜기? 세상에, 거기서도 사람이 나오는구나."
근처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병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농담이냐. 산골 출신들이 제일 오래 버틴다고. 거긴 걷는 것도 훈련이지."
넓은 어깨를 가진, 묵직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난 가빈. 대강국 경계 지대 출신이다."
가빈은 목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넌 집에서 뭐 했냐?" 에릭이 물었다.
"농사. 맨날 땅만 팠지."
가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에릭이 다시 에일런을 바라보았다.
"넌? 로스벤이면... 양치기라도 했냐?"
에일런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대장장이 집안이다. 아버지가 대장간을 운영하셔."
"오, 튼튼한 팔뚝을 기대해도 되겠군."
에릭이 농담을 던지자, 모닥불 주위에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그때 작은 체구의 병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 들었냐? 용사가... 진짜 칼던으로 온대."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또 그 소리야?" 에릭이 킥 웃었다.
"용사 하나 온다고 전쟁이 끝날 줄 아냐?"
"그래도 소문에 따르면, 신이 내린 힘을 가졌대."
작은 병사는 눈을 빛냈다. 가빈은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신이 힘을 줬으면, 왜 지금까지 숨었겠냐. 마왕 놈이 우리 코앞까지 와도 꼼짝도 안 했는데."
에릭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말이야, 혹시 알아? 나중에 용사 따라다니다가 노래에 내 이름이라도 나올지."
모닥불 주변에 가벼운 웃음이 다시 퍼졌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진 뒤 찾아오는 침묵은 길었다. 누구도 진짜 용사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누구도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했다. 에일런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하늘 아래,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채, 칼던의 숨결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고동치고 있었다. 에일런은 모닥불이 꺼져가는 것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친 발걸음으로 임시 배정받은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은 어둡고 서늘했다. 거친 담요 하나가 깔려 있었고, 옆에서는 다른 지원병들이 이미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에일런은 담요를 몸에 감싸며 누웠다. 눈을 감으려다 문득, 익숙한 풍경이 떠올랐다.
뜨거운 대장간 한복판. 두꺼운 팔뚝으로 망치를 휘두르던 아버지. 웃으며 쇠붙이를 나르던 어머니. 그리고 그 구석에서, 무거운 책을 품에 안고 마법 이야기를 읽던 동생 루크.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가족. 그런 기억 사이로, 또렷하게 떠오르는 말 한마디.
"넌 그냥 평범하게 살다 죽겠지."
로스벤 마을 어귀에서 들었던, 어른들의 무심한 농담 섞인 말. 그때는 웃어넘겼다. 하지만 웃음이 오래 남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던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었다. 그리고, 루크를 보았다. 그 어린 동생은, 작은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고, 틈만 나면 책을 읽고, 마법을 연구했다. 루크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빛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에일런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슴 속 어딘가가 조용히 울렸다.
"나는 정말 평범하게, 멈춰 있고 싶지 않았다."
말로 하지 못했던 감정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있었다. 검도, 마법도, 특별한 재능도 없지만,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흐려지고 싶지 않아서. 에일런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담요 위로 서늘한 밤공기가 내려앉았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아직 들리지 않는 북소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칼던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산골짜기에서조차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내 이름을… 언젠가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불러 줄까?”
에일런의 마지막 생각이 어둠 속에 번졌다. 그리고 에일런 역시, 숨죽이며 긴 잠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